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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Dec 09. 2016

[시월애]의 ‘시’는 2년이 아니다

- 2년이 아닌, 어쩌면 수 십 년의 시간을 극복한 사랑이야기

그럴 때가 있다. 가만히 누워(혹은 앉아) 지나간 짝사랑을 떠올리는 때. 시간 순으로 그들을 하나하나 상기하며 내가 몇 명이나 놓쳤는지 손가락으로 세어 보기도 한다. 가히 열 손가락으로는 부족하다. 물론 그게 온전한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사랑으로 발전할지도 모를 최소한의 호감은 가지고 있었던 이들이다. 나는 왜 그들에게 좋아하는 티도 한 번 못 내고 그네들을 모두 떠나보냈을까. 아마 용기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도 나를 좋아할지. 혹은 나의 고백을 받아줄지. 고백 이후 어색해지지 않을지 하는 온갖 벌어지지도 않은 기우들 때문에. 하지만 고백은커녕 좋아한다는 몸짓도 제대로 취해보지 않았음에도 그들 모두는 현재 내 곁에 없다. 연락도 끊긴 지 오래다. 굳이 연락하려면 할 수 있지만 이미 서먹한 사이가 돼버린 후다. 이럴 거면 역시, 좋아한다는 표현이라도 해볼걸 그랬나.


영화 [시월애]는 좋아한다는 고백조차 내뱉지 못하고 혼자 단념한 서글픈 사랑의 무한반복을 94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안에 보여준다. 잠깐. 무한반복이라고? 그렇다 무한반복이다. 영화 속 이은주에 대한 한성현의 사랑은 결코 한 번이 아니었다. 영화 속 시간은, 1997년 12월부터 2000 2월까지, 2년이라는 시간의 순환에 빠져있다. 97년 12월 22일에 한성현이 2년 후의 은주에게 편지를 받으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리고 1999년 12월 22일에 은주가 성현에게 편지를 보내면 다시 97년 12월 한성현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무한한 진행을 영화는 단 한 번 연출한 것이다. 그것은 몇몇 장면을 통해 암시된다. 가령, 일마레를 떠나 처음 이사 간 아파트에서, 은주는 옆집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어제 이사 왔어요. 하지만, 아주머니는 완전히 무시하고 지나간다. 이때 은주는 혼자서 안녕하세요를 3번 연습한다. 그 장면은 세 컷으로 나눠진 채 연출된다.


그것은 마지막 장면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은주가 성현에게 자신의 부탁을 들으러 여의도로 가지 말라는 편지를 일마레 우편함에 넣기 위해서 온갖 힘을 다해 뛰어가는 모습. 똑같이 달려가는 모습이 세 컷으로 나뉘어 3번의 장면이 나온다. 은주가 편지를 처음 보낸 날부터 마지막으로 보낸 날까지의 이야기가, 실은 무수히 반복됨을 암시하는 장면이다(3은 많음을 뜻하는 관습적 상징이다). 더욱 확실하게는 은주의 직장에서 녹음하는 장면이 처음 등장하는 씬이다(그녀의 직업은 성우다). 하나의 씬이 마무리되자, 바로 녹음실 피디가 컷을 외친다. 다시 녹음하겠단다. “메리 크리스마스” 부분부터. 녹음이든 촬영이든, 실패하면 성공할 때까지 끝없이 같은 장면을 반복하지 않는가. 그것은 아마 사랑도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 싶기에 이 슬픈 사랑이야기가 무한히 반복되는 세계관을 설정하였는가. 만약 위와 같은 암시를 연출하지 않고, 영화의 결말이 한성현의 죽음 장면에서 끝났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영화는 수많은 평범한 슬픈 사랑이야기들 중 하나에 그쳤을 것이다. 슬프고 아련하지만, 딱히 특별히 기억나지는 않는 흔한 영화로. [시월애]의 백미는 단연 마지막 장면이다. 어떤 소설이나 영화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시월애]야말로 마지막 씬을 보여주기 위해 앞의 모든 장면들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날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세월이 가면>, 박인환


한때(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박인환의 시이다. 아마 <목마와 숙녀> 다음으로 인기있는 시가 아닐까 싶다. 이 시는 개인적으로 나도 좋아한다. 첫 두 행만 읽어도 지난 사랑의 미련과 안타까움을 소환하는 능력을 갖춘 시다. 특히 밤에 읽으면 센티멘털 지수가 극에 달한다. 하지만 박인환이라는 작가를 비롯해 특히 이 시는 평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우선 시의 주제가 단순히 지난 사랑을 씁쓸하게 추억하는 것 말고 특별할 게 없다. 그러한 시적 화자의 시심은 매우 속되고 또 과거지향적이다. 유종호 교수는 심지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는 완전히 거짓된 증언이라고 평했다. 어떻게 눈동자와 입술까지 기억할 정도의 연인인데, 정작 이름을 잊을 수 있냐고 말이다. 다만, 저렇게 시를 쓰면 우선 읽기에는 멋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인환은 순간의 멋을 위해 진실을 버렸다고 평가받는다. 그러한 이유들로 위의 시는 명편이라 보기 어렵다. 만약 [시월애]가 한성현의 죽음으로 끝났다면, <세월이 가면>이 보여준 그 이상의 성취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대조되는 또 한 편의 시를 읽어 보자.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곳에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위 시는 독자들에게도 인기 많을 뿐만 아니라, 평단에서도 높은 성취를 거둔 작품으로 평가된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과 무엇이 다르기 때문일까. 위 시의 마지막 열 행 때문이다.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가기 때문이다. 만약 이 부분 없이, ‘다시 문이 닫힌다’로 끝났다면 이 시는 우수한 작품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그런 유행가 가사 같은 시가 되지 않았을까. [시월애]의 마지막 씬이 바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의 마지막 열 행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보고 싶은 사람들은 늘 멀리 있었습니다”라고 한성현은 말한다. 그는 혼자 산다. 어울리는 사람이라곤 공사장의 인부들과 대학원의 남자 선배 정도인 듯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랑의 손짓은 모두 거부한다. 아버지의 사랑을 한사코 부정하며 당신을 원망하고, 자신을 짝사랑하는 대학원 후배의 고백도 사전에 입막음한다. 그럼에도 외롭다고 칭얼댄다. 하지만 그건 사실 아마, 이은주가 보고 싶은데 시간적으로 너무 멀리 있어 볼 수 없음을 표현한 것이리라. 그러니까 그건, 사랑의 간접적인 표현이다. 실제로 만나지도 못한, 만날 수도 없는 여인에게 어떻게 좋아한다는 말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있겠는가.


평생 누군가를 짝사랑만 하는 삶이 불쌍하다고 혹은 가치 없다고 평가절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짝사랑은 그 나름대로의 고유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희망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고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그러고 싶다면, 지난 사랑을 그리워하며 슬퍼하고만 있으면 안 된다. 누군가 나에게 와주기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 나서야 한다. 찾았다면 그를 만나러 가야 한다. 만났으면 좋아한다고 말해야 한다.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 한성현은, 이은주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단념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은주에게 선물로 받은) 물고기를 바다에 놓아주었고, 마지막으로 은주의 부탁을 들어주러 가는 날에도 마음을 체념한 채 우편함 한 번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것이 그에게는 사랑의 실패뿐만 아니라, 죽음을 안겨 주었다. 그러므로 이번 생은, 사랑은 또 실패다. 수없이 많은 실패 끝에 성현은 딱 한 번의 희망을 더 가진다. 그것은 은주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러 출발하기 전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우편함 한 번 더 열어 보는 것. 그 속엔 당연히 은주가 급히 월급 봉투에 속에 써넣은 편지가 들어있다. 그 편지를 읽은 성현은 은주의 부탁을 들어주러 가지 않게 되고. 2년 후 처음으로 은주 앞에 당당히 나타난다.


은주가 1999년 12월의 첫 편지를 부치기도 전에 그가 그녀 앞에 나타났으므로, 더 이상의 편지 교환은 없다. 이로써 무한히 반복되던 2년이라는 시간의 순환도 그 실타래가 끊어.(이것은 마치 불교적 세계관과도 흡사하다. 해탈을 통해 윤회의 수레바퀴를 끊고 더 이상 이생의 삶을 반복하지 않듯) 그들의 시간은 더 이상 반복되지 않는다. 드디어 녹음실의 오케이 사인이 난 거다. 성공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한성현의 입장에서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해피 엔딩을 뜻하지 않음을 주의해야 한다. 성급해선 안 된다. 나의 모든 고백이 어디 항상 사랑의 결실을 맺어주던가. 마지막 씬에서 한성현이 “지금부터 아주 긴 이야기를 시작할 텐데, 믿어줄 수 있어요?”라고 말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과연 은주가 그의 말을 믿어줄지는 미지수다. 혹은, 그의 말을 믿어준다 해도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사랑을 어떻게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성현이 그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그녀에 대한 희망을 거두지 않고 그 마음을 끝까지 지켜온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음을. 그래서 그 마음을 현실에서 온전히, 그리고 당당히 전달했다는 것만으로 가치 있음을. 영화는 무척이나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영상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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