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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Jun 01. 2017

영원히 닿지 못할 박제된 과거를 향한 그리움

[붉은 돼지]가 꿈꾸는 자유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보세요
생각해보면 정말 쉬운 일이죠
우리에겐 지옥이 없고
우리 위엔 오직 하늘만이 존재해요
모든 사람이 오늘을 위해 살아간다고 상상해봐요
국가가 존재하지 않다고 상상해보아요
어려운 일은 아니죠
살인도 없고 죽음도 없고 종교도 없는 곳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간다 상상해봐요
당신은 내게 몽상가라 말하겠죠
하지만 저만 그런 게 아니에요
언젠가 당신도 우리와 함께 하길 바랄게요
그리고 세계는 하나가 되겠죠
소유할 것이 없다고 상상해보아요
당신도 할 수 있어요
탐욕도 굶주림도 없는
인류엔 사랑만이 남아있을 거에요
모든 사람들이 양보하며 살아간다 상상해 보아요
그래도 당신은
당신은 내게 몽상가라 말하겠죠
하지만 저만 그런게 아니에요
언젠간 당신도 우리와 함께 하길 바랄게요
그리고 세계는 하나가 되겠죠
- 존 레논, <Imagine>



내가 존경하는 위인들 혹은 작품을 따져보면 거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들은 평화주의자였고, 자유를 무엇보다 아꼈으며, 어떤 집단이나 프레임에 구속되는 것을 싫어했다. 니체가 그랬고 존 레논이 그랬다. 미야자키 하야오 [붉은 돼지]의 포르코 로쏘도 동일한 인물 유형이다. 그는 법도 제도도 종교도 국가도 가족도 없이 홀로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아간다. 그는 누구도 적으로 두려 하지 않고, 누구와도 연대하지 않는다. 아군과 적이 없으니 그 어떤 관계나 정치로부터 자유롭다.

그렇다고 포르코 로쏘가 완전히 자급자족하는 로빈슨 크루소는 아니다. 그는 해적/공적단을 처벌하고 그 대가로 많은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부족함 없이 산다. 그렇다고 해적/공적을 악마화하며 전멸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며, 자신이 영웅이 되겠다는 꿈도 없다. 다만 그가 돈을 벌 수 있는 가장 최적의 작업이 ‘공적 퇴치’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여전히 ‘자본’이라는 제도를 신뢰하고 의지하며,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기대어 살아간다. 커티스에게 비행기가 박살났을 때도 그는 스스로 비행기를 수리하거나 만드는 능력이 없어 조국이었던 이탈리아로 간다. 거기서 피콜로 영감뿐 아니라 손녀 피오와 그의 가족/친족들(모두 여성)의 도움으로 비행기를 리모델링한다. 다시 이탈리아를 탈출할 때도 전우의 도움을 받고 연료가 떨어지면 기름장수에게서 석유를 구입해야 한다.

그가 사는/꿈꾸는 사회가 완전히 원자화된 개인의 삶은 아니라는 거다. 서로 조금씩 도움을 주되 서로를 구속하거나 방해하지 않는 삶을 원한다. 특히 그는 패거리 문화를 싫어하고 국가를 불신한다. 집단/사회가 형성되면 그 공동체 전체에 적용되는 일관된 규칙이 존재할 것이고 그것이 때로는 개개인의 지향점과 상충되거나, 개인을 주체적이지 못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맘마유토단이 유치원생들을 납치했을 때, 꼬마아이들에게 꼼짝 못하는 공적단의 모습은 웃기면서도 인상적이다. 맘마유토단은 패거리문화/조직/성인/남성/규칙의 세계를 상징한다면 유치원생들은 자유/개인/아동/여성/방임의 세계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그 씬은 전자의 세계관을 부정하고 후자를 응원하는 작가의 메시지가 강력하게 담긴 장면으로 읽힌다. 그리고 그것은 곧 포르코 로쏘가 지향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포르코 로쏘는 가족은커녕 연애도 하지 않고 독신인 채 산다. 아마도 그는 이미 지나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음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 또한 지나를 아끼고 사랑하며, 그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나의 마음을 이끌어내지도 않고 자신의 마음을 고백은커녕 드러내지조차 않는다. 그것은 물론 자신만 남긴 채 전쟁에서 죽은 전우들(그들 중 몇 명이 지나의 전 연인들이었다)에 대한 죄책감과, 만약 지나와 관계를 맺은 후 자신 또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어 지나 혼자 남게 될 만약의 상황에 대한 불안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판단일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포르코 로쏘는 지나든 다른 여인이든 연인 또는 부부로서의 관계를 맺을 경우 그것 또한 개인의 자유로운 삶을 방해한다고 생각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일 터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피오의 사랑에도 묵묵부답이다. 애초부터 그는 여인들과 사랑에 엮이는 것을 경계해왔던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돼지로서의 삶이 된 이유는, 실은 저주가 아니라 포르코 로쏘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포르코 로쏘가 꿈꾸는 세계에 사랑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 씬은 그에 대한 답으로 읽힌다. 그 어떤 명예도 사회적 위신도 신경 쓸 것 같지 않던 포르코 로쏘가 커티스의 대결에 응하는 이유. 커티스와 끝까지 싸워 무승부가 될 뻔한 경기를 지나의 한 마디로 이겨내는 장면. 전자는 피오의 사랑에 대한, 후자는 지나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다. 포르코 로쏘는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는 거부하더라도 사랑 자체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에게도 사랑은 자신을 움직이는 중요한 동인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 모두가 포르코 로쏘와 같다면 행복해질까. 그것은 무의미한 질문이다. [붉은 돼지]는 전쟁이 끝나고 국가의 역할이 상당히 약화된 잠시 동안 꾼 일장춘몽 같은 영화다. 경기가 회복되고 시스템이 복구되고 국가가 다시 제 기능을 되찾은 지금, 세상은 다시 너무 많은 집단과 제도와 이데올로기와 종교와 자본이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또 너무 많은 욕심과 꿈과 갈등과 투쟁에 뒤얽혀 살아간다.

영화의 엔딩에서 세피아톤의 작화들과 함께 들려오는 엔딩곡은 정확히 그러한 감수성을 겨냥한다. 불과 한 세기도 안 된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어쩌면 너무 오래된 미래에 대한 퇴행적 갈망. 그 막막함은 아마도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유토피아에 대한 어떤 감정들의 현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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