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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Jan 16. 2019

네가 없으면 나도 없는 거야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이별이 슬픈 이유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가장 내 마음을 뭉갠 건, 주인공 척이 구조되어 돌아온 이후 부인 켈리와의 재회 그리고 이별 장면이었다. 켈리는 남편 척이 제발 살아있기를 간절히 바랐고 그것은 정말 그녀의 진심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내심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살아돌아왔을 때, 켈리가 느낀 감정은 100% 순수한 기쁨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살아돌아가 켈리를 만나고 싶어하는 척의 마음은 100%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혼한 켈리를 다시 만난 척의 마음 또한 100% 퓨어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재회의 순수한 즐거움을 앗아간 것일까. 왜 그들은 서로를 그토록 욕망하고 갈구했음에도 다시 함께 할 수 없었을까. 영화가 내게 준 가장 큰 의문과 주제는 그것이었다.


꽤 많은 이들이 무인도에서 척이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면들과, 배구공에 윌슨이라는 호칭을 부여하고 정을 붙이다 끝내 바다에서 헤어지는 장면 등을 꼽을 때, 나는 (부정적인 의미로) 우습거나 시큰둥했다. 오히려 지금도 영화 OST의 마지막 곡인 ‘end credits'를 들으면 눈물이 나는데 그것은 앞서 말했듯 두 남녀의 비극적 이별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적이었기에 더 내 마음에 큰 여운을 남겼던 듯하다. 만약 둘이 다시 합쳐 살림을 차렸다면, 적어도 내게 이 영화는 [로빈슨 크루소]를 흉내낸 3류작으로 기억 저편에서 지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부터 그 얘기를 하려 한다. 그 둘의 이별이 내게 준 슬픔에 대해.


택배 회사 직원인 남 주인공이 택배 업무를 위한 비행 도중에 추락하여 무인도에 표류했다는 이야기 설정은,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노예 무역을 하기 위해 배를 탔다가 난파된 남자의 이야기인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 대한 음험한 패러디로 읽힌다. [로빈슨 크루소]라는 작품을 들어본 적조차 없는 이라면 모를까, 그 작품을 읽지 않았더라도 그 존재를 안다면 자동적으로 연상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는, 영화가 [로빈슨 크루소]의 세계관을 재탕하는 게 아니라 철저히 부정한다는 점을 전제로 논의를 계속하려 한다.


그렇다면 우선 [로빈슨 크루소]의 세계관이 뭔지 알아야 할 텐데, 그것은 바로 ‘근대적 인간관’이다. 근대 과학은 우주를 최소한의 입자=원자의 조합으로 이해한다. 레고처럼 말이다. 그래서 각 원자의 성질과 원자 간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현재 과학의 주요 관심사다. 사회과학도 마찬가지다(오죽하면 인문/사회 분야를 ‘과학’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겠는가).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단위를 인간으로 보는데, 그것은 인간을 독립적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의미다.


[로빈슨 크루소]에서 로빈슨이 무인도에서 하는 일은 지금의 우리 관점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지만, 따지고 보면 굉장히 괴상하다. 다른 누구도 없이 혼자 사는 사람이 왜 그렇게 철저히 날짜를 계산하고 시간을 지키려 했을까. 왜 모든 작업을 계획과 절차에 입각해서 수행했을까. 왜 일하는 공간과 쉬는 공간을 분리시켜야 했을까.


혼자 사는 이에게 그러한 인식과 작업 방식은 굉장히 불필요하며 오히려 비효율적이기까지 하다. 그것들은 사람이 여럿이 모인 ‘사회’라는 영역에나 해당하지, 개인에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작가 디포가 로빈슨에게 그러한 작업 방식을 고수하도록 그린 이유는, 디포의 머릿속에도 사회는 개인의 합이기 때문에 사회와 개인 사이에 질적/근본적 차이가 없다는 관념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캐스트 어웨이>는 바로 그러한 인간관, 인간을 독립적/주체적 존재로 보는 관점을 철저하게 부정한다. 무인도에서 척은 로빈슨 크루소와 달리 상당히 좌충우돌하며 나약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인다. 종국에는 외로움을 참지 못해 배구공에게 이름을 붙이고 그를 인간 또는 신을 대하듯 하지 않는가. 그러한 장면들은 오히려 사람이 오롯이 혼자일 때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거의 불가능함을 방증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니엘 디포처럼 근대적 인간관을 인식의 디폴트로 깔고 있기 때문에, 죽음이란 관념을 오해하곤 한다. 보통 우리는 죽음을 한 개체의 생물학적 소멸로 인식한다. 하지만 그것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인간을 독립된 개체로 이해하는 관점의 발로다. 허심탄회하게 생각해 보자. 잔인하게 들릴 수는 있지만, 솔직히 말해 A라는 사람의 ‘부재’와 ‘죽음’에는 차이가 없다.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나와 친한 A씨가 이제 멀리 떠나려 한다. 한 번 떠나면 그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며 연락조차 불가능하게 된다고 가정하자. 나의 입장에서 그것은 A씨의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적어도 나와 내가 몸담은 사회에서 A의 부재와 A의 죽음은 그 차이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할 만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 말은, A라는 존재는 우리 사회에서 독립된 개체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사회 관계망 속에 하나의 ‘자리’로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A가 멀리 떠나든 죽든, 그를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A가 몸담았던 사회는 조만간 그가 사라진 후의 진공을 차츰 메워 나갈 것이다. 영화에서 척이 행방불명된 이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바로 그와 동일한 메커니즘을 나타낸다. 켈리를 포함해 척이 살았던 생활세계는, 척의 생물학적 생존과 상관없이, 그에게 사회적 사망을 선고한다. 그것을 입 밖으로 명명하지 않더라도 이미 사회적 관계는 그의 빈틈을 메우며 그의 부재를 사망으로 동일시하게 만든다.


켈리는 매일 밤 남편 척이 살아있기를 기도했겠지만, 그리고 그것이 진심이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켈리의 머릿속 바람이었을 뿐, 켈리는 사회적으로 척의 장례식을 치른 후 새로운 남자를 만나 재혼한다. 개인적 인식과 사회적 관계의 괴리. 그것이 영화 속 켈리의 모순이었고, 실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순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후반부, 켈리에게 척과의 재회는 사실 유령과의 만남과도 같다.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과의 만남이지만, 그럼에도 그와 다시 재결합할 수 없는 건, 마치 귀신과 함께 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회적 입장에서도 척의 생존과 복귀는 유령의 출몰과 동급의 의미를 가진다. 척에게도 앞으로 그의 삶은 환생과도 같다. 전생에 대한 기억과 감정을 너무나 온전히 간직한 내생이다.


척이라는 인간의 존재는, 그와 관계한 모든 이들의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관계와 무관하게 척은 그 자체로 척 개인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정작 홀로 무인도로 갔을 때를 보자. 무인도에서 그는 인간 척이 아니라 나약한 생명체에 불과했다. 배구공을 신격화하지 않고는 살아갈 용기조차 없는.


주체적/독립적 개인에 대한 환상의 붕괴. 그것이 영화 <캐스트 어웨이>가 나에게 준 슬픔의 의미다. 인식과 현실 사이의 괴리. 결국 그 균열은 봉합되지 못하고, 그것은 척과 켈리의 헤어짐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그 이별은 영화의 필연적 결말이다.


어쩌다 모순을 알아차린 슬픈 얼굴. 그것이 <캐스트 어웨이>의 엔딩 크레딧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나의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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