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태이 Jul 09. 2019

사랑은 기억되고, 혐오는 망각된다

<월플라워>를 보며 든 두 가지 의문

1.

샘이 대학교 입학을 위해 이사 가는 전날밤. 찰리는 처음으로 샘과 성애를 나눈다. 그때 찰리는 깨닫는다. 어린 시절 이모가 자신에게 했던 행위가 바로 샘이 지금 자신에게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라는 걸.

여기서 나는 반전에 대한 놀람보다 더 큰 의문이 생겼다. 찰리와 이모 사이의 그 사건은, 지금 이 순간 찰리의 기억 속에 이미지로만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 행위를 바라보는 관점은 찰리의 현시점적 해석이 아닌가.

우리는 어떤 사건의 의미를 당시엔 전혀 눈치조차 못 채고 지내다가, 꽤 많은 시간이 흘러 그 사건이 실은 굉장히 슬픈 일이었다는 걸 깨닫는 경험이 있다. 하지만 우린 여기서 다시 물어야 한다. 그것은 몰랐던 걸 '깨달은' 것일까 없었던 의미를 '재해석한' 것일까.

어쩌면 그 시점에는 정말 그 사건이 슬프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간의 시간이 나에게 준 여러 경험과 다양한 정념이, 슬프지 않았던 그 사건을 지금 슬프게 생각하도록 만든 건 아닐까.




2.
찰리는 이모를 가장 좋아해왔다. 이모와 자신 사이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까맣게 잊은 채. 이모는 찰리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사건 때문에 동시에 가장 혐오해야 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해야 하는 모순. 그 인지 부조화를 해결하는 방법은 둘이다. 가장 사랑하는 기억만 남기거나, 가장 혐오하는 기억만 남기거나. 찰리의 무의식은 전자를 택했고, 혐오스런 기억을 지웠다.

영화 속에는 똑같은 선택을 강요당한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브래드. 그는 패트릭을 사랑하지만 동성애를 거부한다. 연인인 패트릭을 계속 사랑할 것인가 게이인 패트릭을 혐오할 것인가. 브래드는 찰리와 정반대의 선택지를 고른다. 그는 패트릭을 멸시하고 조롱한다.

사랑을 택하든 혐오를 택하든, 결국 진실의 절반을 잃어버린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 한 사람을 지독하게 사랑하면서도 그만큼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실은 사랑이라는 것을. 빛이 있는 만큼 어둠이 있는 게 우리 삶의 본 모습이라는 것을. 찰리는 천천히, 아프게 알아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네가 없으면 나도 없는 거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