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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Dec 25. 2019

사랑 이야기를 넘어서

영화 <헤드윅> 다시 읽기



어린 시절. 나는 운명의 짝을 믿었었다. ‘잠 자는 숲 속의 공주’ 때문인지 ‘신데렐라’나 ‘백설공주’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뿐 아니라 세상 사람 모두에게 운명적으로 짝지어진 단 하나의 영혼이 있을 거라고, 난 믿었다. 짚신도 제 짝이 있다는 말은, 나에게 속담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흥미로운 건 그러한 생각이 꽤 오래 되었다는 것. 지금으로부터 2400여 년 전에 이미 아리스토파네스는, 자신의 희곡 작품에서 재밌는 듯 서글픈 이야기를 전한다. 지금의 인간은 사실 반쪽자리라는 것. 원래 우리는 둘이 합쳐 완전체였단다. 남-남, 여-여, 남-녀 결합으로 된 해와 달과 지구의 자식이었다고. 완전체였던 본래 인간의 힘과 능력이 점점 높아져 신을 넘보게 되자 화가 난 신들이 인간들을 반으로 쪼개 놓았다고. 그래서 지금처럼 남/녀 2개의 성으로 구분되었다고, 이야기는 말한다. 반이 된 우리 인간은 쪼개지기 전 한 몸이었던 다른 반쪽을 늘 그리워하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사랑의 기원이다.


위 내용은 영화의 2번째 곡 ‘origin of love’의 가사와 영상에서도 반복된다. 그것이 헤드윅의 사랑관이다. 그래서 헤드윅은 영화 내내 자신의 반쪽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아빠도 엄마도 아니었고 선생님도 아니었고, 자신을 미국으로 꾄 미군 장교도 아니었다. 심지어 토미 노시스도 그의 반쪽은 아니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나체로 미국의 밤길을 걷는 헤드윅은 다시 진짜 반쪽을 찾아 가는 것일까. 하지만 도무지 그렇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 이유는, 헤드윅은 토미를 만나면서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토미는 헤드윅과는 전혀 다른 사랑관을 가졌다. 그는 헤드윅에게 말했다. 자신에게 지혜를 달라고. 이브가 신의 금기를 깨뜨리고 선악과를 먼저 먹고 이성(理性)에 눈을 뜬 뒤, 그 선악과를 아담에게도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토미는 믿는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그 선악과를 달라고 헤드윅에게 조르는 토미.


토미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 성서의 세계관을 그대로 수용했기에 위와 같은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또 흥미로운 건, 위와 같은 생각이 역시 지금으로부터 약 2400여 년 전에도 이미 전승되고 있었다는 사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에게 전했다. 남녀 간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말이다. 남녀 사랑의 목적은 번식에 있는데, 그것은 생물학적 본성이기 때문에 결코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이성(理性)의 극단적인 활동이다. 따라서 진정한 사랑은 남성 간의 사랑이다. 남-남의 사랑은 생물학적 본성에 입각한 것이라 아니라 오히려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를 깨친 성인 남성은 아직 미숙한 소년을 가르치며 그를 진리의 방향으로 이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사랑이다. 토미에게도 사랑은, 먼저 깨달은 자가 미성숙한 자를 깨치는 것이었다.


영화 속에서 토미는 헤드윅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후 미국의 유명 락스타가 되어 독립한다. 그렇다면 이제 토미는 완전한 사랑을 이룬 걸까. 애석하게도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듯하다. 영화의 후반부에 토미의 표절 사태가 밝혀지며 그는 구속되고 락스타로서의 명성을 잃고 만다. 토미의 추락. 물론 그가 추락할 수 있었던 건 날개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가 불행해질 수 있었던 건, 그가 이미 행복했기 때문이리라. 허나 그렇게 쉽게 추락하고 불행해지는 걸, 우리는 감히 사랑이라 불러도 좋을까.


다시 영화의 결말. 맨몸으로 미국 어느 도시의 어둠을 맞는 헤드윅의 뒷모습에서 나는, 영화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대체 우리가 일생 동안 찾아 헤매는 사랑이란 게 무엇이냐고. 그것을 찾기 위해 온 삶을 바쳐도 괜찮은 거냐고. 그런 사랑이 정말 세상에 존재하냐고. 그렇다면 당신은 이 생에서 그 사랑을 찾을 수 있냐고, 말이다.


나는 오랫동안 영화 <헤드윅>을 위와 같이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렇게만 읽고 나면 많은 빈 곳이 생긴다. 왜 헤드윅은 독일인이어야 했나. 왜 무대가 독일에 한정되지 않고 미국으로 옮겨져야 했나. 그렇다면 헤드윅이 처음부터 미국인이었으면 안 됐나. 이러한 질문들에 나의 독법은 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최근 두 번 더 영화를 다시 보고 나는 생각을 고쳤다. 이것은 사랑 영화가 아니라고 말이다.




세상에 모든 좋은 시는 연애시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동의한다. 하지만 그것이 오직 사랑이야기에서 그치면 좋은 시가 될 수 없다. 겉은 사랑이야기지만 속은 다른 층위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어야 한다. 시뿐 아니라 다른 모든 문화·예술이 그렇다. <헤드윅>도 다르지 않다. 사랑이야기라는 포장지 속에 감춰진 이야기를 읽어야 작품을 제대로 본 것이다.


헤드윅의 사랑관과 토미의 사랑관은 각각 독일과 미국의 역사·정치적 상황과 매칭된다. 특히 헤드윅을 서독 출신이 아닌 동독 출신으로 잡은 설정은, 헤드윅과 토미의 삶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여정으로 보도록 만든다. 게다가 헤드윅이 성전환 수술한 날에 동독과 서독이 통일했다는 각본은, 헤드윅의 잃어버린 반쪽 찾기와 양 독일의 잃어버린 반쪽 찾기와 정확히 대응되는 것처럼 읽힌다. 더불어 동독 출신의 헤드윅이 미국의 하위문화에 이끌리는 것과 미군 장교와 결혼하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 가는 이야기는 공산주의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로 흡수되는 현실 사회와 겹쳐 보인다.


허나 그 결혼을 처음부터 실패였다. 미군 장교가 독일에서 미국으로 발령받기 위한 꼼수였듯, 동독과 서독이 합쳐져 하나의 완전국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또한 처음부터 실패가 예견된 것이었다. 그렇게 합쳐진 독일이 미국처럼 완전한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다 한들 그것은 하나의 완성된 세계일 수 없다. 미국 또한 마찬가지다.


미국을 보기 위해 나는 토미를 주목했다. 토미가 계몽한 자의 가르침을 사랑이라 믿었듯, 미국 또한 그랬을지 모른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데에, 프랑스의 쇠망을 건 희생과 지원이 있었고, 그후 세계최강국이 되기 위해 유럽을 상대로 한 막강한 보호무역과 세계 1·2차 대전을 거쳤다. 하지만 2차 대전 후에도 미국은 절대 라이벌인 소련으로부터 많은 내상을 입었고, 아랍 지역의 석유 수출국으로부터 큰 타격을 입었다. 떠오르는 새로운 국가들, 가령 일본이나 멕시코, 아시아의 용이라 불리는 국가들로부터 몇 번의 잽을 맞기도 했다. 그때마다 미국은 IMF라는 카드를 끄집어내 상대 국가들을 내리 찍었다. 가르침을 주는 것이 사랑이었기에, 그 가르침이 끝나면 사랑도 종료된다고 생각했던 걸까.


허나 가르침은 세대를 이어가며 계속 전승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브의 사랑은, 고대 그리스 지식인의 사랑은, 끊김없이 흘러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토미의 몰락은 결국 미국의 몰락을 예견하는 걸까.


이 영화가 2000년에 나왔으므로, 당시로서는 아직 오지 않은 9·11테러 및 이라크 전쟁과 2008년 금융 사태에 대해 말하는 것은 외삽적 접근법이기에 여기까지는 대응시킬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드윅이 끝내 자신의 반쪽을 찾지 못하는 것과 토미가 자신이 배운 가르침을 다른 이에게 베풀지 않고 자신의 명성에만 써먹다가 몰락하는 이야기는, 앞서 언급한 두 세계(=동독 및 통일 독일과 미국)의 불완전성을 시사한다고 생각한다.





전자의 세계관이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들의 평등을 중요시한다면, 후자는 온전한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여긴다. 전자의 세계에서 헤드윅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라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의 경계로 그려졌다면, 후자의 세계에서 헤드윅은 온전한 자유를 구사하면서도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 영원한 이방인으로 묘사된다. 그런 그가 설 곳은 이 땅에도 저 땅에도 없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곡에서 헤드윅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이 되라고 노래한다. 그리고 헤드윅의 오른쪽 골반에 있던 두 개의 반쪽이 문신은 온전한 하나의 원-얼굴 문신으로 바뀐다. 헤드윅 밴드는 이제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각자 홀로 자신의 길을 걸을 것이다. 그럼에도 혼자 걷는 밤의 골목은 쓸쓸하고 외롭지 않을까.


우리 사는 이 세계가 하나의 방향으로 단일하게 나아간다는 생각은 성립할 수 없다.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가는 서로 다른 이방인이니까. 세계는 처음부터 파편화되어 있었으므로 외로움은 필연일까. 나는 영화가 끝난 후 헤드윅의 삶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다. 미국의 밤길을 홀로 건너가 버린 헤드윅의 발자취를 더는 따라갈 수 없다. 그 너머의 세계가 몹시도 궁금하지만 그건 온전히 헤드윅만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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