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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Mar 05. 2020

우리가 진짜로 잃어버린 것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다시 읽기

도시에 살던 센은 부모님의 사정으로 시골로 이사 간다. 시골로 가는 승용차 안 뒷자석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는 센. 학교의 단짝 친구가 준 손편지조차도 그녀를 위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갈 곳은 센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시골이기 때문이다. 센이 향하는 새로운 삶의 터전은,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영원한 타자다.


우리는 ‘자연’을 지구 및 생명체의 탄생과 함께 존재하는 어떤 본질적이고 선험적인 존재 혹은 개념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자연’은 근대와 함께 탄생한 근대의 산물이다. 사람들이 생각해 온 ‘자연 → 문명’이라는 시간적 선후는 근대인이 만든 환상이다. 문명 이전에 자연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자연은 문명과 함께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공식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자연 ↔ 문명’이, 우리가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과거의 세계관에서, 도약적으로 탄생한 거라고 말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이사 가는 날 센이 흘리는 눈물은 센으로 대표되는 근대인이 가지고 있는 환상, 즉 내가 사는 도시/문명은 자아/주체이며, 나와 멀리 떨어진 시골/자연은 타자/객체라는 인식에서 비롯한다. 그러니 시골로 가는 길이, 센은 기쁠 리 없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존재론적 부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골이라는 타자는 약과다. 지금부터 더 무시무시한 타자가 기다리고 있으니, 바로 터널 너머의 세계다. 그곳은 신의 세계다. 혹은 무의식의 세계다. 잠깐 영화의 맨 끝으로 가보자. 터널을 나오자 부모님이 센을 기다린다. 센이 겪은 일은 사실이었을까 허구였을까. 사실이라면 그것은 신의 세계였을 것이고, 허구라면 무의식의 세계였을 것이다. 해석의 방향은, 영화를 봤거나 이 글을 읽는 당신 마음이다. 앞으로 나는 그곳을 신의 세계로 가정하겠지만, 신의 자리에 무의식을 넣어도 무방하다.


센의 아빠는 옆으로 돌아가는 법을 모른다. 뒤돌아 갈 줄도 모른다. 오직 그가 할 수 있는 건 거친 직진이다. 센의 아빠는 나무로 둘러싸인 숲길도 어마무시한 고속으로 달린다. 아빠는 터널 속에 들어가서도 이상한 낌새를 못 느낀다. 그곳이 이세계(異世界)인 줄 알아채지 못한다. 아빠는 가장 바깥의 표층을 살아가는 자, 이면을 알지 못하는 자다. 불러도 주인 없는 가게에서 그는 돈이며 카드며 다 가졌으니 얼마든지 음식값을 치를 수 있다 뻐기며 다짜고짜 음식에 손부터 댄다.


그에게 세상 모든 것은 등가교환이 가능하다. 심지어 윤리마저도.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센의 아버지는 근대 시스템의 궤도 표면을 충실히 따라가는 자다. 그는 시스템의 안도 바깥도 보지 못하며 아예 그러한 인지 자체가 없다. 그러니 센의 부모님은 처음부터 이세계(異世界)에 포섭되지 못한다. 입장거부. 신의 세계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자는 오직 센뿐이다. 그 때문에 영화 마지막, 유바바가 낸 최후의 문제에서 센은 이 돼지들 중에는 부모님이 없다고 답했던 거다. 치히로의 부모님은 처음부터 유바바 세계에 편입되지 못했으므로.


흥미로운 건 센을 처음 본 하쿠가 다짜고짜 센의 목숨을 구해주는 장면이다. 영화는 나중에 센과 하쿠가 이미 구면이었기 때문이었다며 하쿠의 호의를 정당화하려 하지만, 그것은 진짜 이유가 아니다. 하쿠는 애초에 유바바가 짜놓은 이세계(異世界)의 판을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마침 센은 그곳에 속하지 않은 외부인이었으므로 하쿠의 목적을 달성하기에 유용한 변수였기 때문이다. 반면, 센이 처음에 하쿠를 믿지 못하는 이유는, 하쿠와 달리 센의 목적은 자기 세계를 벗어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 세계를 지키며 그곳에 머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잠깐, 터널 너머의 세계=신의 세계에 대해 대략 살펴보자. 근대인인 우리가 신의 세계에 대해 떠올리는 생각과, 우리가 시골/자연에 대해 떠올리는 생각의 결은 완전히 동일하다. 우리는 도시/문명 이전에 시골/자연이 있었다고 여기듯 과학과 현실 이전에 신의 세계가 시간적으로/인식론적으로 먼저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의 세계란 고대/중세인의 세계관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고대/중세인은 지금의 우리보다 역사적으로 먼저 살다갔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발상 또한 오해다. 신화와 종교는 근대 이전에 이미 존재한 게 아니라 근대와 함께 탄생한 개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화 자체가 고대에 없었다는 게 아니다. 그것을 ‘신화’라고 명명하고 이미지화하는 근본적인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신화’는 고대인에게는 신화가 아니었다. 고대인에게 그것은 신화이자 종교이자 과학이자 예술이면서 동시에 신화도 종교도 과학도 예술도 아닌 것이었다. 그것은 현재를 사는 우리가 감히 명명할 수 없는 ‘무엇’이다. 우리는 고대인의 세계관을 생채기 하나 없이 되살릴 수 없다. 그것은, 고대인의 죽음과 함께 영원히 죽었다.


유바바의 세계는 근대인이 지닌 신화에 대한 환상을 깨부순다. 유바바의 최대 목적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온천을 운영하고 온천장에 수많은 개구리남과 여성을 두어 그들로 하여금 쉴 틈 없이 일하게 만든다. 항상 최상의 시설과 서비스를 갖추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매일 밤 신들의 목욕과 휴식을 도모한다. 그것은 개구리남들과 여성들의 생계를 돕기 위해서도 아니고 신들을 존경해서도 아니다. 오로지 유바바 자신의 금전적 이익을 위해서다.


그녀는 말한다. 일하지 않으면 마법이 풀린다고. 유바바의 마법에서 풀린 자는 해방되는 게 아니라 삶을 연명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온천장의 직원들은 모두 불평불만 없이 일하며 유바바의 마법 세계 속에서 살려 한다. 그것이 유바바 마법의 본질이다. 여기서 말하는 마법이란 건, 까마귀로 변장해서 하늘을 난다든가, 번개와 불꽃을 날려 적을 공격하거나, 흐트러진 물건을 제자리로 되돌리는 그런 게 아니다. 정작 본인은 물리적으로 일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이들을 부리며 온천장에서 벌어들인 거의 대부분의 부를 거머쥘 수 있는 것. 그것이 유바바의 진짜 마법이다.


이쯤 되면 눈치 챘을 것이다. 유바바의 세계는 현실 세계의 기업과 똑같다. 혹은 자본주의 사회의 미니어처다. 그러니 유바바의 세계에 속하려면 센도 일을 해야 한다. 아니, 먼저 센은 치히로가 돼야 한다. 센은 인간 세계에서의 명칭이다. 이름이란, 어떤 시스템에서의 입지를 의미한다. 그런데 센이라는 인간 세계의 이름으로는 유바바 월드에서 어떠한 입지를 가지지 못한다. 그것은 투수인 야구선수가 축구 경기에 끼어들었을 때 ‘투수’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투수였던 그는 이제 이름을 바꿔 골키퍼가 되든 미드필더가 되든 해야 한다. 골키퍼가 된다면 이제 야구공을 던질 게 아니라 상대팀이 찬 축구공을 온몸으로 막아내야 한다. 그것이 센이 치히로가 돼야만 했던, 그리고 온천장에서 일해야 했던 이유다.


부를 거머쥐려는 건 유바바만이 아니다. 치히로를 제외한 온천장 직원 모두가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해 혈안이다. 그래야 유바바의 온천장을 떠나 윤택한 노후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이는 린의 대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에 대한 욕망은 가오나시의 출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신들도 온천장 바깥 어딘가에서는 돈을 번다는 것과(그래야 그 돈을 지불해 온천장을 이용할 수 있다), 온천장 직원들도 온천장 밖에서는 돈을 소비한다는 것이다.


온천장 안에서 생산자인 자들은 밖에서는 소비자가 되며, 그 역도 성립한다. 단, 유일하게 생산자의 위치에 서지 않아도 되는 자가 있는데 그가 바로 가오나시다. 그는 베블런이 말한 유한계급인 셈이다. 부가 넘쳐나, 살면서 노동을 전혀 하지 않아도 되는 부류.


정리하자. 유바바의 세계뿐 아니라 신의 세계 전체는 화폐를 통해 매개되어 있다. 인간 세계도 신의 세계도 자본주의 사회라는 말이다. 도시/시골, 문명/자연, 인간/신이라는 대립쌍은 근대와 함께 동시에 태어났음을, 유바바의 온천장을 통해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깨야 할 환상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도시·문명·인간 세계는 자본주의적인 반면 시골·자연·신의 세계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과 무관한, 체제의 바깥이라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머릿속에 존재하는 모든 세계는 자본주의적이다.


더 흥미로운 건, 신의 세계 안에서도 시골·자연이 존재한다는 것. 그곳이 바로 제니바의 세계다. 제니바의 세계에서는 유바바의 마법이 통하지 않는데, 그것은 화폐 질서가 통용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가오나시가 유한계급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은 유바바의 세계에 국한된다. 그곳에서만 모든 것이 화폐로 매개 가능하기 때문이다. 유바바 세계의 바깥=제니바의 세계에서 화폐는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치히로가 가오나시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 거다. “목욕탕 안에서만 저래요. 빨리 밖으로 불러야 해요.” 목욕탕을 나온 가오나시는 난폭한 진상 고객이 아니라 온순한 순둥이가 된다.


터널을 기준으로 한 쪽은 인간의 세계, 반대 쪽은 신의 세계다. 그리고 인간의 세계는 센의 이삿길을 기준으로 도시와 시골로 나뉘는데, 신의 세계 또한 기찻길을 기준으로 유바바 세계(=문명)와 제니바 세계(=자연)로 나뉜다. 이 이중의 거울쌍을 기억하기 바란다.


유바바의 아들과 부하인 3머리와 까마귀가 제니바의 마법에 의해 각각 생쥐 아기 파리로 변신한 것은, 유바바와 제니바의 세계가 전혀 이질적인 시스템으로 돌아감을 방증한다. 다시 위에서 써먹었던 비유를 재탕하자면, 야구에서 투수 내야수 포수였던 자들이 축구에서는 스트라이커 미드필더 골키퍼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제니바는 말한다. 마법으로 만든 것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말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라는 마법을 통해 매개된 상품 따위에는 진정한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이게 이 작품의 궁극적인 메시지인데, 이제부터 왜 그런지 살펴보자.


하쿠와 치히로를 제외한 온천장의 모든 이들은(심지어 린과 가마지마저도!)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죽도록 일한다. 그러니 그들이 목욕하러 온 신을 섬기는 것은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위해서다. 처음부터 목적과 수단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강의 신이 왔을 때 모두가 꺼려했던 것이다.


엥? 그들은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 아니었나? 맞다. 그런데 강의 신과 같은 빡센 손님을 상대하든 다른 온순한 신을 상대하든 그들에게 주어지는 임금은 동일하다. 따라서 강의 신에게 서비스를 베푸는 노동은 그들에게 결코 등가교환일 수 없다. 그들이 허용하는 부등가교환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한에서다(가오나시의 경우를 다시 떠올리자). 강의 신을 모시는 건 그들에게 손해가 되는 부등가교환이기에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유바바는 강의 신을 친절히(?) 맞이했냐고? 자신이 직접 서비스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직원 누구라도 시켜서 강의 신을 모시고 이득을 챙기면 그만이다. 이때 빛처럼 나선 구원자가 바로 치히로였지 않나. 치히로에게 온천장 노동은 교환 행위가 아니다. 그녀에게 노동의 목적은 자신의 존재이다. 치히로는 사라지지 않기 위해 일한다. 그렇기 때문에 강의 신을 씻길 때도 수단이 아닌 존재 자체로 대할 수 있었다. 다른 직원이었다면 신이 결제한 금액만큼의 목욕물을 제공했겠지만, 애초에 노동을 교환으로 생각지 않은 치히로는 온천장의 손해에는 아랑곳없이 강의 신에게 최고급 온천수를 막 퍼준다.


강의 신을 씻겨내는 데 성공한 치히로는 신으로부터 경단을 얻는다. 그 또한 교환행위가 아니다. 치히로가 강의 신을 씻긴 것과 강의 신이 치히로에게 경단을 준 것은, 등가교환은커녕 아예 교환일 수가 없다. 그것은 양측 모두 서로에 대한 호혜에서 비롯한 행위이다. 노동을 교환으로 바라보는 다른 직원들이었다면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며, 신의 경단은 그런 교환 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한편, 하쿠의 목적은 유바바를 능가하는 마법을 체득하는 것이다. 아마 그는 그것이 제니바의 마법이라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서 그는 제니바의 도장을 훔치는 독단적인 행동을 취하지만 실패한다. 몇 번이나 거듭 언급했듯, 한 세계에 속한 무언가는 다른 세계에서는 전혀 다른 입지를 차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제니바의 도장은 제니바 세계에서만 통용되지 유바바 세계로 가면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된다. 영화 속에서 도장은 하쿠의 몸을 태우는 무기로 변한다.


이때, 치히로가 하쿠에서 경단을 먹이는 것 또한 등가교환이 아니다. 그것은 하쿠에 대한 사랑과 연민에서 비롯된 호혜이다. 강의 신이 준 경단은 값을 매길 수 없으며 하쿠의 목숨 또한 마찬가지다. 치히로의 그 호혜 덕분에 하쿠는 목숨을 건진다.


유바바의 마법은, 모든 것을 등가교환할 수 있도록 만든 시스템이며, 그 중심에는 화폐가 있다. 그런데 그런 유바바에게도 유일하게 화폐로 교환할 수 없는 존재가 하나 있으니, 바로 그의 자식=‘보’이다. 유바바는 온천장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보는 절대 포기하지 못한다. 보는 유바바의 마법으로도 케어할 수 없는 거대한 구멍이다. 유바바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자식이, 유바바 마법이 지닌 근본적인 한계라는 이 모순.


그렇다면 이제 하쿠는 어떻게 유바바를 능가하는 마법을 배울까. 바로 제니바의 집에 있는 보와, 돼지로 변한 치히로의 부모님을 맞교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상품은 양적 가치로 환원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우리 부모님에게만큼은 우주와도 맞바꿀 수 없는 가치를 띠는 건, 적어도 부모님에게 나라는 존재는 양적 가치로 환원될 수 없는 유(唯)적 존재이기 때문이다(남들에겐 전혀 그렇지 않다). 유바바에게는 보가, 치히로에게는 부모님이 그러하다. 결코 양적 가치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를 맞바꿈 한 것. 그것이 영화의 마지막에 하쿠가 터득한 마법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유바바가 결코 부리지 못한 마법이다. 이로써 하쿠는 유바바를 능가했다.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이사 가는 치히로에게 단짝 친구가 준 손편지를 기억하는가. 이번엔 내가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지겠다. 다음 선물 중 무엇이 더 가치 있는가. 1번=친구가 써 준 손편지. 2번=친구가 사 준 10만원 상당의 상품. 평소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2번이 당연히 더 가치 있지 않냐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자. 10만원 아니라 100만원 상당의 상품이어도 그것은, 그 친구 아닌 누구라도 돈만 내면 살 수 있는 물건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 가치 없는 것과 같다. 아무나 줄 수 있는 대상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하지만 친구가 써 준 손편지는, 그 당시 그 친구가 아닌 다른 누구도 써 줄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편지에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가 담겼다.


현실뿐 아니라 인간의 상상과 꿈의 세계, 심지어 신의 세계마저도 실은 근대의 논리를 따른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상정하는 모든 세계는 이미 자본의 논리를 따른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현실 세계만 자본의 논리를 따를 뿐 꿈의 세계와 신의 세계는 자본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고 착각한다. 그 망상이 우리의 건조한 현실을 거짓 위로하며, 거짓 가치를 양산한다.


하지만 현실이든 가상이든 이미 모든 대상은 화폐라는 마법을 매개로 교환 가능하다. 진정 가치 있는 존재가 사라진 세상. 삭막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인간 세계에서도, 신의 세계에서도 사라진 진짜 가치를 깨치는 법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터널을 통과하며 뒤돌아보지 않는 결단이며, 소중한 것을 상대에게 흔쾌히 건네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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