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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Jun 08. 2020

4-09. 더 이상의 마법은 없다

'신'의 의미와 '죽음'의 의미

“신은 죽었다.” 니체의 가장 유명한 말이다. 니체를 몰라도 저 말은 만화든 영화든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터. 저 간명한 문장에서 사람들은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자의 외침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리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저 한 문장에 전혀 상반된 다양한 의미가 숨어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가장 쉬운 해석은, 니체를 무신론자로 간주하여 그가 신과 종교를 부정했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 사람을 보라』에서 니체는 자신의 스탠스를 못박아 두었다. “나에게 무신론은 본능으로부터 이해되는 자명한 사실이다.” 저 문장만 보면 무신론은 너무나 자명해서 증명조차 필요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저 문장만 잘라왔다고 해서 악마의 편집이 아닐까 하는 오해는 금물! 앞뒤 내용을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니체는 신 따위에 투자할 시간조차 없다고 말하며, 신을 조잡한 개념이라고 치부한다. 그러므로 니체의 의도는, 무신론은 자명한 진실이며, 따라서 신 따위는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 있지도 않은 신을 믿느라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는 뜻이겠다.


그런데 위와 같이 해석하고 끝내면 니체 사상은 시장 바닥에 굴러다니는 항설(巷說)이 되고 만다. 저 시대에 무신론자가 니체 한 명뿐이었을까. 니체가 세계 최초의 무신론자였을까. 당연히 아니다. 1장에서도 밝혔지만, 찰스 다윈뿐 아니라 다윈 할아버지도 무신론자였으며 당시 생물학자들에게 무신론은 디폴트였다. 이래 가지고는 니체 사상에 독특함을 부여할 수 없다. 아니, 그걸 떠나서, 해석이 너무 단조롭고 1차원적이다. 이 지면에서는 니체의 ‘신의 죽음’에 대한 주요 해석 3가지를 소개하겠다.


니체는 부처와 예수를 ‘초인’의 단계에 접어든 역사상 몇 안 되는 인물이라 평했다. 니체가 무조건적으로 무신론만 외쳤다면 예수를 존경받을 인물이라 추켜세울 리 없다. 그러니 니체가 종교 자체를 비판했다고는 할 수 없다. 니체가 궁극적으로 비판의 칼날을 세운 건 자기 시대였다. 19세기 유럽. 못난이들로만 구성된 집단. 훌륭한 정치가 한 명도 두지 못한 서글픈 사회.


니체가 말한 ‘신’이란 절대자로서의 신이 아니라 철학 윤리 관습 전통 법 국가 등을 통칭하는 유비라는 해석이 첫째다. 신이 죽었다는 말은, 무신론자로서의 커밍아웃이 아니라, 그동안 유럽 사회를 지탱해온 모든 기존의 가치가 사실은 부당하거나 허구적이거나 무가치하다는 진단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니체가 비판하고자 한 건 종교 자체가 아니라 19세기 유럽의 종교인들이었다는 것이 둘째 해석이다. 자신들이 신의 대리자라며 신을 대신해 스스로를 신격화하려 했던 자들. 자신의 말을 듣고 실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달콤하고 더러운 유혹. 종교인들이 오히려 종교를 오염시키고 가치 절하하고 있다고 말이다. 본래 종교는 고고한 정신의 현현이었는데, 그 숭고한 정신을 세상에 전파해야 할 종교인들이 자신의 사리사욕과 권력욕에 눈멀어 종교를 수단화하는 행태에 신물이 났던 건지 모른다.


그러므로 니체의 ‘신의 죽음’은, 결과적으로는 반대로 읽혀야 한다. 나는 네들이 말하는 신 따위는 믿지 않아, 네들이 말하는 신은 가짜야, 그건 너희가 너희 좋으라고 만든 허상이잖아, 나는 너희들이 져버린 신을 진정한 신이라 부를 거야, 하는 외침이 된다. 그러므로 니체는 무신론자가 아니라 어느 종교인보다 진지한 유신론자다. 종교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독실하고 신실한 종교신자다.


셋째는, 종교와 신조차 저물고 더 이상 쫓아갈 목소리가 사라진 시대의 허무와 불안에 대한 전망이라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의 시제는 현재형이 아니라 미래형이 된다. 가까운 미래. 사람들은 조만간 자기 손으로 신을 죽이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한 직접적인 서술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온다.


니체의 철학을 ‘니힐리즘’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래서다. 하나 둘씩 전통적인 가치들이 사그라드는 19세기 후반의 유럽. 언제부턴가 신의 존재를 회의하고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조만간 사람들은 삶의 나침반을 잃고 기계적이고 무미건조하게 살아갈지 모른다는 예측.


가만 생각해 보면 그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요즘 사람들의 다수는 무신론자이며, 종교를 가졌다고 해도 종교활동을 거의 하지 않거나 성실히 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종교를 갖게 된 동기마저도 어릴 적 부모의 영향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니, 이쯤 되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종교가 뿌리 내려 있다고 보긴 힘들다. 그렇다고 도덕이니 전통이니 그런 가치를 진지하게 존중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쫓는 건 하나다. 돈.


그런 시대가 오기 직전에 니체는 간절하게 외쳤던 건지 모른다. 신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자신만의 근간을 스스로 만들라고. 너의 정신을 허무 속에 외롭게 홀로 두지 말라고 말이다. 삶을 가치 있게 만들려면 내 삶을 이끌 기준 설정이 필요하다. 인간인 우리가 신을 죽였으니, 그 신을 대체할 더 강력한 대상을 구축해야 한다. 니체의 철학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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