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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Oct 08. 2020

5-04. 꿈은 수면을 지키는 파수꾼

농담과 꿈으로 본 인간 보편의 정신 구조

애초에 정신분석학은 히스테리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프로이트가 오랜 시간 고안한 치료법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그는 차츰 무의식이, 히스테리 환자만의 독특한 특성이 아닌 인간 보편이 가진 정신 구조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오랜 시간 축적된 환자들의 사례와 지속적인 ‘자기 분석’의 결과였다.


프로이트가 맨 처음 주목한 것은 ‘말실수’였다. 프로이트는 말실수가 순전히 우연적 현상이나 상황이 만든 해프닝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말실수는 무언가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의도나 동기가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물론 모든 말실수가 내적/심적 동기에 의해 발생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상당수 농담은 그럴지 모른다.


이해를 돕기 위해 프로이트는 몇 가지 예시를 들었다. “여러분, 선생님의 행복을 위해 축배(anzustoben)를 듭시다”라고 할 것을 “여러분, 선생님의 행복을 위해 트림(aufzustoben)을 합시다”라고 하거나. 한 여인에게 “제가 동행해도 될까요?”라고 말하려던 청년이 “제가 동욕해도 될까요?”라고 말한다든가.(동행과 모욕을 절반씩 합쳐서 발음했다) “본인은 존경하는 전임자의 공적을 치하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고 말할 것을 “공적을 치하하고 싶지 않습니다”고 말하는 경우. 국회의장이 “개회를 선언합니다”고 해야 하는데 “폐회를 선언합니다”고 실수하는 사례. 푸앵카레 대통령을 슈앵카레(돼지갈비)라고 부르는 실수.


위 사례들에서 프로이트는 본래 말하려던 바를 방해받는 의도, 실수로 터져나온 말을 방해하는 의도라 칭했다. 방해받는 의도는 사회적 압력에 의해서 말할 수밖에 없었던 표층적 동기이고, 방해하는 의도는 억눌린 충동에 의해 정말 화자가 말하고 싶은 심층적 동기이다. 그런데 후자가 전자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강할 경우 참지 못하고 새어나온다. 어차피 말실수이므로 한순간 우스운 해프닝으로 무마할 수 있으므로, 화자는 딱히 외적 처벌을 받지 않고 자신의 사회적 입지를 유지한 채 자신의 내면에 억압돼 있던 충동을 간접적으로 충족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말실수는, 무의식적 충동과 사회적 압력 사이에서 정신이 타협하는 활동이다.


프로이트는 꿈도 말실수와 동일한 관점으로 인식했다. 꿈의 특징은 잘 때만 꾼다는 점, 통제할 수 없으며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꿈을 안 꾸는 사람은 없으며, 모든 사람이 꿈을 꾼다는 것은, 꿈이 정신활동에 있어 필수적인 기능을 수행한다고 짐작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프로이트는, 그렇다면 꿈의 역할이 무엇일지 진지하게 생각했다.


어른의 꿈은 대체로 뒤죽박죽이지만 어린이의 꿈, 특히 취학 전 유아의 꿈은 실타래처럼 꼬이지 않고 이해하기 쉬웠다. 전날 오리배를 오래 타지 못해 아쉬웠던 아이는 꿈에서 오리배를 탔고, 소망하던 등산을 가지 못한 아이는 등산 가는 꿈을 꿨다. 목마른 아이는 꿈에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런 꿈들은 전혀 추가적인 해석 작업이 필요없을 정도로 내용이 명백했으며, 그들을 통해 프로이트는 꿈이 1차적으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소망을 대리 충족하는 기능을 한다고 판단했다.


허나 어른들의 꿈은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럴 경우 프로이트는 가벼운 질의응답이나 자유연상법을 통해 당사자의 현실적인 경험이나 기억을 끄집어냈는데, 대체로 꿈의 내용과 겹치는 지점이 있었다. 그 지점들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가며 프로이트는 꿈의 의미를 해석하곤 했는데, 대체로 내담자들은 그의 해석에 놀라며 스스로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면서도 동의하곤 했다.


보통 우리는 꿈이 잠을 방해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악몽을 꾸다가 잠을 깬 적도 있고, 잠에서 깨진 않더라도 자는 동안 꿈을 꾸느라 수면에 집중하지 못하거나 쓸데없는 정신적 에너지를 낭비했다며 피곤해 한다. 프로이트는 반대로 생각했다. 꿈이야말로 인간의 수면 활동을 지켜주는 파수꾼이라고 그는 여겼다. 사람에겐 다양한 소망이 있는데 어떤 소망은 현실에서 실현되어 충분히 충족되지만 어떤 소망은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주변 환경의 여건이 맞지 않아서일 수도 있으며, 그것이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충족되지 못한 소망은 해소되지 않고 신체에 남는다. 가벼운 소망이라면 인내할 수 있지만, 중요한 소망이라면 정신은 그것을 무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충족될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그 억압된 소망이 외부로 표출되지 않는다. 그런데 의식을 끄고 잠을 자는 동안에 그 소망 충동은 밖으로 표출되려 한다. 그로 인해 수면은 방해받는다. 그대로 둔다면 지속적으로 수면 방해를 받을 것이므로, 정신은 꿈을 통해서 소망을 대리 충족시킴으로써 충동을 잠재운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견해다.


그러므로 꿈의 구조는 말실수와 동일하다. 꿈에서 방해받는 의도는 수면이며, 방해하는 의도는 충족되지 못한 소망이다. 그것을 꿈이라는 형태로 대리만족시킴으로써 수면과 소망 사이를 타협한다. 말실수와 꿈은 둘 다 의식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무의식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정신활동이므로 당사자는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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