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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Oct 05. 2020

5-03. 무의식이 대체 어디 있어?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증거

흔히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정신분석학을 심리학의 분과학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대학교에서는 정신분석학을 배우고 싶으면 심리학과에 가야 하지만, 그건 정신분석학과를 따로 설립할 수 없는 현실적 이유가 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신분석학은 심리학이 아니다. 둘은 개별적인 학문이다. 왜냐하면 둘의 연구 대상과 방법론 및 학문적 전제 등이 상이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은 의식을,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그래서 심리학은 의식을 수치화하고 데이터화할 수 있는 과학적 연구 방법을 중시한다. 과학이 아니면 심리학이 아니다.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을 다루는데, 무의식을 의식적으로 다룰 수는 없기 때문에, 자연과학자들이 생각하는 과학적인 연구방법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그럼에도 정신분석학자들은 본인들의 연구가 과학적이라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심리학은 무의식의 존재를 부정하는 반면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의 존재를 긍정하며, 무의식이야말로 인간 정신의 근간이라고 보는 데서 둘의 입장은 정반대다.


그렇다면 정신분석학에서는 무슨 근거로 무의식의 존재를 주장하는가? 특정 대상에 공포증을 느끼는 정신질환자를 가정하자. 예를 들어 그가 폐쇄된 좁은 공간에 혼자 들어가 있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한다면, 그는 과거에 그것과 관련된 어떠한 사건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의 정신은 분명 과거의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사건과 관련된 유사한 공간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는 자신이 겪은 그 사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에게 남은 건 사건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공포라는 감정뿐이다. 사건을 기억하기 때문에 특정 대상을 두려워하면서도 사건을 망각했기 때문에 자신이 왜 그 대상을 두려워하는지 알지 못하는 현상. 그게 공포증이다. 정신은 기억하면서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은 한 겹이 아니다. 최소 두 겹이다. 사건을 기억하는 정신과 망각하는 정신. 그런데 그는 의식적인 차원에서 그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므로, 그 사건을 기억하는 정신의 층위는 적어도 의식적인 층위가 아닌 게 된다. 그래서 그러한 정신의 층위를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만난 신경의학자 샤르코의 최면 기법을 보면서 무의식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켰다. 당시 유럽에는 신경증 환자가 속출했는데, 의사들은 신경증을 치료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았다. 왜냐하면 신경증자들에게는 이렇다 할 생물학적 원인이나 신체적 증상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의사들은 신경증을 꾀병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신경증 환자의 치료법으로 극단적으로는 구타와 가혹행위가 행해지기도 했다. 꾀병을 그만두라는 뜻에서 말이다.


샤르코는 신경증을 진지하게 다룬 의사였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최면 기법을 통해 환자에게 암시를 주어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키게 만들기도 하고, 반대로 또 다른 암시를 통해 발작을 멈추기도 했다. 대체로 최면 상태에서 일어난 일을 환자들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샤르코는 또다른 외압을 가함으로써 강제로 최면 상태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존재를 확신하게 된 계기는, 『히스테리 연구』의 공동 필자인 브로이어의 환자, 안나 O의 사례 덕분이다. 안나 O는 신체 마비와 사시, 안면 마비, 언어 장애, 환각과 환상을 겪었고, 컵에 든 물을 마시지 못하는 증상을 보였다. 도무지 진전이 없던 안나 O의 진료 때문에 골치를 앓던 브로이어는 프로이트에게 영감을 얻어 최면 치료를 강행했다.


브로이어는 최면상태의 안나 O에게 마음을 괴롭히는 게 무엇인지 묻자 안나 O는 그 원인을 답해냈다. 그러면서 그녀의 증상은 조금씩 완화되었다. 안나 O는 브로이어에게 계속해서 최면 치료를 해달라고 요구했고 추가적인 최면 요법으로 안나 O의 증상은 차츰 사라졌다. 흥미로운 점은, 최면이 아닌 의식 상태에서 안나 O는 여전히 문제의 원인이나 증상과 관련하여 아무 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이를 전해들은 프로이트는 의식과는 전혀 무관한 정신 영역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샤르코와 브로이어에 착안하여 프로이트는 몇 년 간 환자를 치료할 때 최면 요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는 최면 요법을 관두게 된다. 첫째, 정말 치명적인 내용은 최면 상태에서도 발설되지 않고 철저하게 방어되었다. 둘째, 최면의 성공 확률이 매우 낮았다. 최면은 특정한 유형의 사람들만 빠지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점은, 프로이트가 생각하는 목표와 맞지 않았다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환자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인지하고 자신의 무의식적 욕동과 그것을 억압해온 환경에 대한 전반적인 반성이야말로 치료의 근본이라 여겼다. 하지만 최면 요법은 철저하게 의사에 의존적인 방식이었다. 암시를 통해 최면을 거는 기술은 온전히 의사의 숙련도에 달렸고, 최면에 대한 부작용의 책임 또한 의사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악영향은 온전히 환자가 받아야 할 몫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면 치료는 처음부터 환자가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상태에서 시작하며, 치료 과정 내내 의사의 권위와 지식에만 집중된다. 따라서 최면으로 성공한 치료는 근본 치료가 아니라 일시적인 증상 치료에 머문다. 환자는 여전히 자신의 문제를 모른 채 남게 되고 자신의 병을 치료한 것은 의사의 지식 덕분인 게 된다. 그렇게 되면 증상은 언제라도 재발한다. 그러한 이유들로 프로이트는 최면 요법을 관두고, 길지 않은 탐색 끝에 ‘자유연상법’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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