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은 세상 모든 일은 각 개인의 뇌피셜이라고 결론 지었다. 끔찍한 전쟁도 즐거운 파티도 한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철학자들이 관심 가질 대상은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머릿속이라고 후설은 강경하게 주장했다. 인간의 관념만 이해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지 않냐며.
제자인 하이데거는 회의적이었다. 인간의 관념만이 문제라면, 인간 바깥에 펼쳐진 세계는 무관하다는 말일까. 그런데 애초에 인간에게 관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만약 어떤 인간이 오감이 망가진 채로 태어난다면, 그에게도 관념이 만들어질까. 생각이라는 게 가능할까. 자기라는 의식이나 정체성이 있을 수 있을까.
하이데거는 아니라고 보았다. 인간은 오감을 통해 세계를 감지하고, 그것을 토대로 자기의 내면에 정보를 입력한다. 그리고 오감을 통로로 입력된 외부의 이미지를 근간으로 인간은 자신의 관념을 형성한다. 관념보다 세계가 선행한다. 그러므로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해답은 관념이 아니라 세계에 있다. 그것이 하이데거의 결론이었다.
2.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논쟁.
소쉬르의 경우, 의미는 차이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단어에서 사과라는 의미가 발생하는 이유는, 단어 자체에 내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과’, ‘배’ 등의 차이에서 나오는 거란 말이다. 그러므로 약속만 한다면 사과와 배를 바꿔 불러도 상관없다.
나는 그 원리가 자소서와 같다고 생각한다. 1명의 자소서로는 그 가치가 발현되지 않는다. 다른 여러 사람들의 자소서를 비교함으로써 내 자소서는 어떤 위치(가치)를 얻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 도착이 발생한다는 거다. 보통 우리는 내 자소서의 가치가 자소서 자체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다른 경쟁자들이 어떤 거지 같은 자소서를 냈는지, 기발한 자소서를 써냈는지에 따라 내 자소서의 가치는 바닥을 칠 수도 있고 천장에 가닿을 수도 있다. 내 자소서의 가치는 내재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자소서들의 가치는 자소서를 쓴 지원자들과 독립적인 셈이다. 그 당시 각 지원자들이 어떤 자소서를 써냈느냐에 따라 자소서들의 가치는 매겨진다. 다시 이를 언어 문제로 생각하면, 언어의 의미 체계도 독립적이란 걸 알 수 있다. 그것이 소쉬르가 말하고자 했던 관건이다. 사람들은 보통 언어의 의미가, 언어와 대상의 연결고리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대상과는 무관하고, 언어끼리의 차이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언어는 그 자체로 독자적인 세계관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소쉬르에게 동의할 수 없었다. 소쉬르의 생각은 결과론적 해석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미 해당 언어를 아는 사람에겐 소쉬르의 주장이 수긍될 수 있겠지만, 해당 언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소용없거나 틀린 이론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가령 한국어를 아예 모르는 노르웨이 사람에게 소쉬르의 이론은 난센스가 된다.
만약 그가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면, 그래서 소쉬르의 방법을 따른다면, 한국어 사전 하나면 충분하다.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사전을 찾아 정의를 읽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어의 모든 단어를 사전으로 다 찾으면 클리어다. 하지만 정말 그런 방법으로 한국어를 배울 수 있나? 아니다. 최소한 단어 하나가 무엇을 지시하는지는 알아야 비로소 한국어사전이 빛을 발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의미는, 언어와 현실의 연결고리에 있었다. 해당 언어가 현실의 무엇을 지시하는지를 알게 되면서 우리는 언어를 배운다. 문제는 이거다. 우리는 어떻게 어떤 단어가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지 알게 될까. 이것이 일상적인 일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조차 갖지 않지만 생각해 보면 매우 불가사의한 일이다. ‘엄마’라는 말이 저 사람을 지칭하는지 아기는 어떻게 알게 될까. 단순히 반복적으로 듣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엄마’라는 발화가 그 사람 신체의 특정 부위를 지칭하는지 아니면 기분 상태를 지칭하는지 행동을 지칭하는지 아기는 알 길이 없다.
백번 양보해서 지시체가 명확한 구상명사는 반복해서 알게 된다고 치자. 허나 가령 ‘싸움’이라는 말은 어떤가. ‘싸움’에 해당하는 장면을 아기가 수십 수백 번 본다면 싸움의 의미를 저절로 알게 될까. ‘싸움’이 두 사람 이상을 지칭하는지, 움직임을 의미하는지, 공기의 상태를 뜻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물론 ‘싸움’의 의미를 사전을 보거나 다른 사람에게 설명을 들어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전에서 ‘싸움’을 설명하는 글도, 다른 사람의 말도 모두 또 다른 단어들의 뭉텅이라는 데 있다. 그 단어들의 의미를 아기는 또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대상 사이의 관계를 비약으로 본 듯하다. 그러니까 그건 합리성의 영역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으로서는 언어가 어떻게 현실 세계와 연결되는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 비합리적인 비약이야말로 언어 생활의 근간이다.
3.
고전경제학파와 마르크스의 가치 논쟁.
우리는 상품과 화폐의 교환을 등가교환이라 생각한다. 가령 빼빼로는 정말 평균적으로 1500원 어치의 가치가 있을까. 사실 빼빼로가 정확히 얼마의 가치를 지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정가가 1500원으로 매겨져 있고 그렇게 계속 거래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관습으로 자리잡았을 뿐이다. 반복된 행위는 인간에게 습관으로 새겨지고, 오래된 습관은 진리가 된다.
만약 정말 상품과 화폐 간 교환이 등가교환이라면 구매자와 판매자의 관계도 동등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화폐를 가진 사람, 그러니까 상품을 구매하려는 사람이 갑의 위치에 서게 되고, 판매자는 을의 위치에 선다. 또 한 가지, 구매/판매가 등가교환이라면 환불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환불은 모종의 미안함 또는 껄끄러움이라는 죄의식을 동반한다. 심지어 환불 불가능한 상품도 수두룩하다. 그 또한 상품에 대한 화폐의 우위를 방증하는 사태들이다.
그러므로 상품과 화폐의 교환은 부등가교환이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그러한 부등가교환이 당연시되었을까. 이것이 첫 번째 의문이다. 하지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우리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화폐는 왜 상품보다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되었을까.
화폐가 노동력의 축적이므로 축적된 노동력만큼의 가치를 지닌다는 건 고전경제학의 전제이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은, 소쉬르가 언어에 대해 가진 생각과 유사하다. 화폐가 노동력의 축적이라는 것, 노동력을 단일한 가치로 환산할 수 있다는 것, 가치가 하나의 단위를 지닌 표준적 수량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이다. 하지만 세상은 처음부터 자본주의가 아니었다.
만약 고전경제학자들의 생각이 맞다면, 왜 수 천 년 전의 사람들은 조개를 화폐로 사용할 수 있었는지 의심해야 한다. 조개를 캐는 노동력은 그 사회에서 조개가 발휘하는 가치에 미치지 못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금이나 은은 어떤가. 금과 은은 오래 전부터 화폐 이상의 역할을 했고 또 가치를 지녀왔다. 하지만 금과 은을 노동력의 축적이라 부를 순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금은을 현실 상품과 맞바꾸길 원하고 희망했다.
4.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이거다. 금이든 지폐든 화폐가 경제적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 또한 비합리적 비약이라는 거다. 세계에 대한 이미지가 개인의 관념이 되는 비약. 현실의 대상들이 언어와 짝을 이루는 비약. 상품이 화폐와 교환되는 비약. 이 모든 비약의 메커니즘이 실은 동일하다는 것이 가라타니 고진의 사고관이다.
그 비약을 여태까지 알아채지 못한 이유는, 철학이 지닌 태생적 한계 탓이라는 게 고진의 문제의식이다. 지금까지의 철학은 결국 자기독백의 확장일 뿐이었다고. 인간 사회를 작동시키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모두 비합리적이다. 그 비합리성을 근간으로 합리성이 표면에서 작동한다. 합리성의 영역에 속하는 철학은 결코 세계의 비밀에 가닿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속한 세계가 아닌 전혀 다른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 진짜 변화의 시작이라고 고진은 주장한다. 지금 눈앞의 난초를 윤리적인 차원에서가 아닌 존재론적 차원에서 고려하는 것이 그 실천의 시작이 될 수 있으려나. 아직은 나의 공부가 더 필요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