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행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현대인들의 여행 행태를 좋아하지 않는다. 맛집‧카페‧SNS‧호텔‧리조트 어디에도 거대 기업과 자본이 끼어있지 않은 구석이 없다. 여행을 힐링과 놀이라고 포장하지만 그 본질은 평일의 생산 뒷면에 있는 주말의 소비다. 생산과 소비는 자본이 자가증식하기 위한 필수적인 메커니즘. 그런 면에서 여행만큼 가성비 뛰어난 소비는 없다. 단 며칠 동안 월급을 아작 낼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일해도, 놀아도, 기업의 손바닥 안이다.
아즈마 상이 여행을 옹호하는 이유는 잘 알겠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의도와 결론에는 나도 동의한다. 사람은 생명체인지라 결국 육체의 자극과 반응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어디에 있고 무엇을 보고 접하는지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느낌은 달라진다. 아주 많이. 현실에서 우리의 육체를 가장 많이 바꿀 수 있는 게 낯선 곳으로 가는 거라는 말은 타당하다. 하지만 나는 아즈마 상이 자기모순에 빠진 거라고 생각한다.
아즈마 상은 세계의 글로벌화를 긍정한다. 제3세계의 어느 시골이 유럽화/미국화하면서 각 개인의 구체적인 삶의 질은 높아진다고 그는 논증한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나는 전통을 지키기 위해 현실의 발전을 막는 법안은, 결국 현실 속 실제 개인을 억압하는 악법이라 생각한다. 100년 뒤에도 200년 뒤에도 한옥을 유지할 순 없다. 거기엔 사람이 사니까. 그 사람도 더우면 에어컨 틀고 싶고, 개성에 따라 인테리어를 바꾸고 싶을 것이다. 차를 몰고 싶은 사람에게 다양성과 전통을 위해 인력거와 마차를 사용하도록 강제할 순 없다.
좋은 게 발견/발명되었다면 그것을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에는 이의 없다. 다만, 그렇게 되면 동질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 얻는 만큼 잃는 법이니까. 그리고 동질화된다는 건, 이제 내가 모르는 타지에 가도, 나와 비슷한 삶의 양태를 마주할 거라는 것까지 내포한다.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는 전 세계 어디에나 있다.
항공사에 항공권을 예매하고, 호텔을 예약하고, 인스타그램에서 맛집을 검색해 놓고, 그래서 그 루틴을 그대로 따라 하고 온들, 우리는 나와 다른 무엇을 얻기 어려워지는 시대다. 글로벌화 때문이다. 물론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기에 당연히 차이와 간극은 존재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시간이 지날수록 그 틈새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아즈마 상은 그 틈새가 줄어드는 것에도 긍정하면서도 독자들에게 여행을 권유하는 모순적인 주장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거다.
2.
만약 위 글을 아즈마 상이 읽는다면, 그가 어떻게 반박할지도 예상된다. 그 전에 잠깐 딴 얘기를 하겠다.
17년 전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할머니가 손자와 맥도날드 드라이브스루에 가서 뜨거운 커피를 주문했다. 할머니는 본인의 실수로 조수석에 앉은 채로 허벅지에 커피를 쏟았고, 3도 화상으로 2년 간 고생했다. 할머니는 맥도날드에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딸랑 800달러를 지급받았고, 결국 이 문제는 소송까지 갔다.
처음에 여론은 맥도날드 쪽으로 기울었다. 커피를 쏟은 것도, 뜨거운 커피를 주문한 것도 할머니였으니, 당연히 화상도 본인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우세했다. 언론도 그렇게 몰아갔다. 하지만 마지막 재판에서 배심원들은 할머니의 손을 들어주었다. 할머니 측 변호사가 막판에 할머니의 화상 당시 허벅지 사진을 증거 자료로 제출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천 마디 말보다 하나의 현실이 더 힘이 세다는 것이다. 말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아즈마 상도 같은 말을 할 것이다. 글로벌화로 동질화되는 것은 언어적 세계관이다. 하지만 현실의 인간은 언어적 세계에만 사는 게 아니라, 물질로 이루어진 구체적인 현실에 육체로 붙박여 있다. 그리고 그러한 물리적/현실적 세계는 글로벌화로 동질화될 수 있는 차원의 층위가 아니다.
인스타그램에 접속해 방탄 공식 계정이든, 내셔널지오그래픽 계정이든 들어가서 댓글들을 보라. 댓글만으로는 그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기 어렵다. 하지만, 그 사람을 직접 만난다면, 그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한다면, 그 사람의 집에 방문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맞힐 수도 있을 것이다. 아즈마 상이 하고픈 것도 그런 얘기일 것이다. 세계가 아무리 동질화되더라도 실제 그 장소에 가게 되면 우리는 분명 낯선 경험을 하고 이질적인 생각에 잠길 것이라고 말이다.
3.
그렇다면 좋은 여행이란 무엇인가? 맛집 찾고 관광명소에서 사진 찍고 면세점 털어오는 여행은 나쁘고, 박물관과 전시회를 방문하고 역사적 현장을 찾는 여행은 좋은 여행인가? 아마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 같다. 왜냐하면 아즈마 상은 모든 여행은 그 나름대로 다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는 모든 여행은 결국 다 나쁨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여행이란 물질적으로든 언어적으로든 현재의 시스템을 더욱 공고히 할 뿐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자본주의’라는 텍스트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고 믿는 내가 도착하는 목적지는 ‘허무’뿐이다. 이미 지난 세기에 다수의 사상가들이 종착한 곳이기도 하다. 아즈마 상은 그걸 뛰어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는 허무가 아닌 다른 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 아니 나 자신을 바꾸는 것도 말이 아니라 행동이라고.
그렇다면 이제 선택지는 둘이다. 확실한 허무를 택할 것인가, 불확실한 가능성을 택할 것인가. 아즈마 상은 후자를 택하라고 독자들을 종용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갈림길에서 어느 쪽이든 움직일 동기를 갖지 못했다. 이 논쟁은 말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지 않을까. 용기 없는 나는, 먼저 간 사람들의 응답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