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의 [탐구2]를 읽고
인지부조화. 인간의 내면과 외부 세계 사이에는 늘 괴리가 존재한다. 그 괴리가 작으면 상관 없겠지만, 괴리가 크다면 인간은 고통 받는다. 그때 인간은 고통을 해소하려 애쓴다. 고통을 해소하는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내면을 바꾸는 것. 다른 하나는, 세계를 바꾸는 것. 전자는 대부분의 사람이 일상적으로 수행하며 살고 있다. 후자의 방법은 자칫 잘못 썼다간 희대의 악인이 되기 일쑤다. 히틀러나 전두환 등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지금까지 2500여 년 동안 수학자들도 심각한 인지부조화를 앓았다. 100년 전의 수학자들은 그것을 무한론 혹은 집합론의 역설로 총괄했다. 가령 이런 거다. 모든 짝수는 모든 자연수와 1 대 1 매칭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짝수의 개수와 자연수의 개수는 같은가? 하지만 우리는 자연수의 개수가 짝수의 2배임을 안다. 좌표에서 0과 1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점이 있다. 그런데 0에서 1로 이동하려면 그 무수한 점을 모두 통과해야 하는데 그것을 다 통과하려면 무수한 시간이 걸리므로 0에서 1로 이동할 수 없다. 이는 본질적으로 제논의 역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역설과 같다.
그 괴리를 봉합하기 위한 현대수학자와 현대물리학자의 해법은 정반대다. 수학자들은 수학의 이론을 변화시켰다. 예를 들어 ‘실무한’ ‘가무한’ 등의 개념을 개발해 무한에도 양적/질적 차이가 있음을 구분 지었다. 반대로 물리학자들은 현실을 변형시켰다. 우주의 시간과 공간이 연속체가 아니라 불연속체라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0과 1 사이의 공간에 위치하는 최소 단위는 무한개가 아니라 유한개가 된다.(현대 물리학자들이 희대의 악인일지는 미래 세대가 판단할 일이다)
그보다 200여 년 더 전의 지식인들이 겪은 인지부조화는 인과론 때문이었다. 뉴턴 탓이다/덕이다. 우주의 모든 입자가 우주의 법칙을 따른다면 과거뿐 아니라 미래의 모든 시점에 모든 물질의 운동은 이미 정해진 거나 진배없다. 여기서도 해법은 둘로 나뉜다. 내면을 바꾸거나, 세계를 바꾸거나. 대다수의 철학자들은 전자를 택했다. 모른 체하기. 인과론은 철저히 자연과 우주의 영역이기에 인간 사회에 관해서는 일절 그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때 유명한 두 사람은 후자를 택했다. 세계를 바꾸기로. 뉴턴 본인과 라이프니츠였다. 전체가 정해져 있다면 개별을 보고서도 전체를 점칠 수 있어야 했다. 미적분학이 탄생한 배경이다. 가령 미분을 통해 우리는 한 점의 방향성을 예측할 수 있다. 미분을 이미 배웠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자명하다고 여기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하나의 점에 대체 방향성이 어디 있는가. 그 점은 다음 시점에 어느 방향으로든 갈 수 있다. 그 문제를 라이프니츠는 dx/dy라는 무한소 개념을 도입해 해결했다. 그런데 0보다 크지만 그 어떤 실수보다 작은 숫자가 대체 뭐람. 무한소 또한 대표적인 수학의 인지부조화 중 하나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미분이 가능한 이유는, 그러니까 한 점의 방향성을 알 수 있는 이유는, 이미 우리가 전체 그래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반칙이다. 우리가 알고 싶은 건, 미래를 모르는 상황에서 매 시점의 점의 방향성을 예측하는 방법이다. 이미 전체를 다 아는 상태에서 모든 점의 방향성을 계산할 수 있다는 발상은 이미 도착적이다. (우주의 처음과 끝을 다 알고 있는 신의 관점을 자기 이론의 중심으로 놓고, 그를 바탕으로 현실을 개조하려한 라이프니츠는 역시 위험한 인물이었던가. 덕분에 현재 한국의 수많은 수험생들은 수포의 길을 택했고 택하고 있고 또 택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개체의 성질은 이미 전체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전체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개체라는 인식과 명명이 가능해진다. 흔히 개체와 전체는 대립되는 개념이라 여기지만, 실상은 선후관계였던 셈이다. 그것도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는 반대로 말이다. 개체에서 전체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전체에서 개체가 태어난다. 우리는 개체를 늘, 그것을 포함하는 몇 겹의 큰 바운더리 안에서 이해한다.
가령, 나는 인간이라는 전체 바운더리 안에서 이해된다. 옆집 독구는 개라는 전체 바운더리 안에서 이해된다. 나는 인간 바깥에서 생각될 수 없다. 독구도 마찬가지다. 인간 한명한명은 특별하고 독특한 개인이라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한 무엇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그 생각에는 전체 인간이라는 바운더리가 이미 쳐져 있다. 그러므로 개체가 전체의 대립항이라는 인식틀은 거짓이다.
특수성이 실은 보편성에서 기인한 것임에도, 그 둘을 대립 관계로 설정한 것은 지금까지의 철학이 속여온 기만이다. 그 둘을 대립시켜 놓고 어느 한 쪽을 편드는 식으로 철학은 발전해 왔다. 하지만 어느 쪽을 우위에 두더라도 결론은 같아진다. 개체를 두둔하든, 전체를 옹호하든 결론은 전체로 귀결된다. 철학은 처음부터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나를 가장 혼란스러우면서도 신비롭게 느끼도록 만든 대목이 있다. 오라클의 존재였다. 그는 네오의 존재를 예측하고 그 존재를 판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오라클 또한 매트릭스라는 시스템의 일부라는 것. 나는 그것이 모순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건 지극히 당연했던 거다. 오라클의 예측과 판단은 이미 시스템 전체를 전제하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마치 라이프니츠의 미분처럼 말이다. 운명을 점치고 운명을 바꾸는 것 또한 운명이라던 속세의 말이 영 쓸모없진 않았다니.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흘러간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바운더리를 벗어나서 인식할 수 있을까? 그러한 인식을 상상할 수 있을까? 나는 다시 내 공부의 원점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