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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Nov 12. 2021

자유의지가 환상이라면 윤리는 어떻게 가능한가

가라타니 고진의 [윤리 21]을 읽고

(잠깐 딴 얘기 먼저)

포퍼가 과학의 정의를 말하며 칸트의 인식론이 틀렸다고 비판한 적 있는데. 가라타니는 사실 포퍼의 주장이 칸트의 생각과 같은 거라고 읽어낸다. 이렇게.

포퍼는 반증가능성이 있는 것을 과학이라 정의하고, 반증되지 않는 동안만을 진리라 주장하는데, 여기서 진리를 현상으로, 반증을 물자체로 바꾸면 칸트의 인식론이 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정말 경악을 금치 못했다.(천재)


(이제 본론)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주체성은 환상이라는 입장인지라 아직까지도 윤리와 책임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어려웠다. 정말 철저하게 따진다면, 모든 범죄자의 잘못은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적 요소의 인과론적 합이 되어버린다. 이때 문제는 범죄자에게 죄를 물을 책임 소지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법을 다 없앨 것인가. 재판도 사법부도 교도소도 다 불필요해지는 것인가. 여기까지 생각하면 또 아닌 거 같다. 분명 사법과 형벌의 존재 또한 하나의 환경적 요인이 되어 인간이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는 작용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꼭 과학의 인과론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원인의 고리를 연쇄적으로 묻는다면 그 끝에는 행위자 본인이 남아있질 않을 텐데. 그럼에도 죄와 벌을 따질 영역은 어디서 생겨나는 걸까.


이 질문에 가라타니 고진은 의아하게도 칸트를 불러온다. 가라타니가 소개하는 칸트는 그간 내가 알던 칸트와 너무 다르다. 내가 알던 칸트는 마치 바보들이 읽고 해석한 칸트였던 것만 같다. 진짜 칸트는 그게 아니라며, 가라타니는 야스퍼스와 헤겔과 하버마스와 아렌트를 격파한다. 근데 웃긴 건 가라타니의 주장이 오히려 너무 말이 되고 정합적이라는 거다. 이게 가라타니의 매력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복잡하지만 요약하자면 이렇다. 인간은 하나의 사태를 전혀 독립적인 3가지 차원에서 볼 수 있다. 이론적/실천적/미학적 차원이다. 이때 우리가 각각의 위치로 언제든 바꿔 설 수 있는 건 각 입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저 세 입장 중 어느 하나라도 인지하지 못한다면 나머지 입장 또한 온전하지 못한다. 일단 이 전제를 깔고 시작하자.(오케이 여기까지는 익히 알던 칸트다)


그렇다면 사람이 실천적(윤리적)일 수 있는 건, 이론적인 차원의 눈 또한 가질 때 가능하다는 말이다. 무슨 말이냐. 사실 인간은 주체적이지 않다는, 인간의 행위는 무수히 많은 변수들의 결과값이라는 인과론을 알고 있을 때에 비로소 찐 윤리가 가능하다.(여기서 갑자기 얘기가 비약하는 거 같다. 그게 무슨 말이지?)


이걸 이해하기 위해 '사적' 레벨과 '공적' 레벨을 이해해야 한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사적이라는 말을 개인의 차원으로, 공적이라는 말을 사회/국가의 차원으로 사용한다. 칸트는 반대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정치인이 공적으로 발언할 때, 그의 발언은 사실 '사적'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그 정치인은 하나의 국가/사회라는 체제를 전제하고 발언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사회의 바깥에서 보면 그의 발언은 지극히 자신이 속한 집단을 향한 이익이 내포된 것이 된다. 그러므로 통상적으로 공적이라는 건 실은 해당 구성원이 속한 공동체를 위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지극히 특수하고 지엽적인 레벨로 묶여버린다. 그러므로 칸트는 그걸 '사적'이라고 칭한다. 반대로 내가 속한 공동체를 상정하지 않은 생각이야말로 '공적'이라 할 수 있고, 그때 인간은 코스모폴리탄(세계시민)이 된다.


그런데 사적인 차원에서도 '사적'인 차원에서도 인간은 윤리적일 수 없다. 사적인 차원이라면 개인의 행복/이익을 위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돌이 공중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자연의 영역에 속한다. 우리는 중력을 윤리라 부르지 않듯 우리 안의 본성을 윤리라 부르지 않는다. '사적' 차원에서는 공동체라는 외압이 존재한다는 건데, 그때 나의 행동은 당연히 타율적이기에 진정한 윤리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윤리는 '공적'인 코스모폴리탄으로서의 개인에게서만 발현된다.


이때 개인이 '공적'이려면 사적인 레벨과 '사적'인 레벨 모두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가능하다. 더불어 내가 아닌 타인 또한 그러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낙관이 있어야지만 가능해진다.


결론. 인간은 자연적 차원에서는 자신의 쾌락/행복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사회적 차원에서는 공동체를 유지/발전시키려는 경향을 가졌으므로, 자신의 행동이 그러한 경향을 따른다는 걸 완전히 인지하고 있을 때만이 자유로울 수 있고, 그때 비로소 책임과 윤리가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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