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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Jan 09. 2022

의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현대 일본 철학자의 데리다 새로 읽기

1.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피타고라스의 발견/발명 이전에 선험적으로 존재했었다는 생각은 도착이다. 피타고라스가 발견/발명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런 법칙이 있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원래 있었고 그 다음에 피타고라스가 그걸 발견/발명한 게 아니라, 피타고라스가 정리를 발견/발명한 다음에 피타고라스 정리가 우주에 원래 있었다는 생각이 가능해진 것이다.


피타고라스 정리의 기원을 피타고라스로 지정하는 것 또한 도착이다. 피타고라스가 정리를 발견/발명한 이후, 기하학/수학의 서술은 피타고라스를 중심으로 쓰였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그 길을 더듬어가다보면 피타고라스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다른 길은 없기 때문이다.



2.

소쉬르가 주장한 '언어의 자의성'도 도착이다. 언어가 자의적임을 알려면 최소 2개의 언어를 알아야 한다. 모국어 하나만 아는 사람은 '자의성'을 깨달을 수 없다. 예를 들어 한국어와 일본어를 아는 사람은 어떤가. 그는 '개'와 '이누'의 시니피에가 같음을 어떻게 아는가? 분명 한국어 체계와 일본어 체계는 서로 다르고 무관하며 독립적이다. 그렇다면 그 둘을 비교할 수 있는 제3의 객관적 기준/체계가 어딨는가? 한국에서 '개'의 위상과 일본어에서 '이누'의 위상은 완전히 독립적이며 무관하다. 그러므로 '개'와 '이누'가 지칭하는 대상으로서의 관념이 일치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3. 

'문화 상대주의'는 반드시 경험적 타자를 전제한다. 타자가 있다면 당연히 '내집단'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모든 상대주의는 자신의 '내집단'에서 기원한다. 그렇다면 상대주의가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4.

단순 음악 청취와 라디오 청취는 다르다. 라디오는 같은 시각에 같은 노래를 전국의 청취자들이 같이 듣고 있다는 걸 전제한다. 그런데, 전국에 같은 라디오를 듣는 사람은 무수한 익명의 고유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말이다. 나의 세계에서 그들은, 나와 유사한 감성을 느낄 것으로 짐작되는, 나의 ctrl c + ctrl v로 무수히 존재하게 된다. 내가 현재 이 음악을 들으며 느끼는 감정과 감수성을 전국의 다른 청취자들도 비슷하게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을 들으며 느끼는 감정과, 다른 청취자들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은, 서로를 보강하며 순환한다.


라디오 음악 자체는 단수의 에크리튀르지만, 청취자는 나와 '동일한' 복수로 존재한다. 그 '도약'/'비약'이 라디오 청취만의 독특한 경험이다. 그리고 그와 동일한 과정이 그간 서양철학의 역사였다는 게 데리다의 진단이다.



5.

언어의 '의미' 자체는 어디서 오는가.


5-1.

러셀의 경우.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에 축약된 확정기술의 다발이다. 예를 들어, '김성주'라는 단어는, 대한민국의 국민 mc다, 예전에 mbc 아나운서였다, 중앙대를 졸업했다, AB형이다, 등등의 모든 관련 정보들의 합이 '김성주'의 의미라는 게 러셀의 주장이다.


5-2.

크립키의 경우.


단어의 의미는, 언어 외적 사건이 가진 힘의 흔적이다. 크립키의 저 주장은 러셀을 반박하며 나왔다. 가령, 김성주가 모든 방송을 그만둔다면? mbc가 아니라 kbs 아나운서였다면? 알고 보니 중앙대 졸업이 학력위조였다면? 혈액형 검사를 해보니 AB혀이 아니라 B형이었다면? 그렇다면 그때는 김성주가 아닌 게 되는가? 아니다. 김성주를 둘러싼 모든 속성/성질/역사 등이 다 부정되어도, 그 대상은 여전히 김성주일 수 있다.


그렇다면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를 기술하는 모든 성질의 다발이라는 러셀의 주장은 오류다. 김성주라는 단어의 의미는 현실의 김성주 개인에게서 나온다는 게 크립키의 설명이다. 책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예로 든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은 아테네에 살지 않았다면? 다른 시대에 살았다면? 플라톤의 제자가 아니라면? 알렉산더의 스승이 아니었다면? 그래도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단어를 우리는 어떻게 쓸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게 됐는가? 우리는 심지어 그를 실제로 본 적도 없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시간을 거슬러 아리스토텔레스 생전에 그를 실제로 본 사람들이 그를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명칭이 지금까지 이어져왔기 때문이라는 거다. 언어의 의미는 언어의 바깥인 현실 속 사건에서 유래한다는 게 크립키의 주장이다.


5-3.

지젝의 경우.


지젝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언어에 적용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쉽게 말하면 수학 법칙이 논리적으로 참이라는 걸 수학 자체로는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말 쉽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만약 수학이라는 체계에 모두 A B C D라는 4가지 법칙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때 A가 참임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B C D가 참임을 근거로 쓸 것이다. 그렇다면 B가 참인 건 어떻게 증명하는가? A C D가 참임을 근거로 들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법칙이 참임을 증명하려면 자연히 다른 법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모든 법칙은 다른 법칙에 의존하므로 결과적으로 그 어떤 법칙도 참임을 증명하지 못하게 되는 셈이다.


이는 언어도 똑같다. 만약 어떤 언어에 단어가 ㄱ ㄴ ㄷ ㄹ 4개 있다고 가정하자. ㄱ의 의미를 알기 위해 사전을 찾으면, 거기엔 ㄱ의 의미를 ㄴ ㄷ ㄹ을 써서 정의해 놓았다. 마찬가지로 ㄴ ㄷ ㄹ 또한 다른 단어를 써서 풀이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ㄱ ㄴ ㄷ ㄹ의 의미를 어디서 어떻게 알 수 있냐는 거다.



6.

러셀의 오류는 크립키가 이미 했으니 패스.


크립키의 오류는, 추상적 관념은 어떻게 설명할 거냐는 거다. 가령 '사랑' '평화' 따위는 어떤가. 물론 사랑이라는 실제 사건이 현실에 나타나며 우리는 그것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다. 문제는 사랑이라 부르는 개별적인 사건은 사실 너무 천차만별이라는 거다. 그 천차만별의 사건의 공통점을 우리는 어떻게 설정할 수 있냐는 거다. 그 기준은 어디에 기원하는가. 이것을 설명할 수 없다.


지젝의 오류는, 그래서 의미가 어디서 오며, 어떻게 언어가 작동할 수 있냐는 거다. 물론 수학도 지금까지 잘 작동하고 있으니 언어도 문제 없지 않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설명에 만족할 수 있을까. 아즈마 히로키는 그런 담론을 '부정신학'이라고 말한다. 무언가의 정의나 기원을 '부재/부정'으로 설명하는 모든 방식이 부정신학이다.


[존재론적, 우편적]은 '의미'를 부정신학적이지 않게 분석하려는 데리다적 독해를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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