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관광객으로 살래!
1.
20대 때의 나는 확실히 여행/관광에 부정적이었다. 여행이야말로 가장 강력하게 중산층까지 확실히 쫙 뽑아먹을 수 있는 자본과 기업의 아이템이라고 말이다.
여행 가서 현지의 문화를 체험한다는 것도 개구라라고 생각했다. 비행기를 타고 목적지에 가서 우선 호텔에 체크인을 한다. 그리고 검증된 식당과 카페에서 음식을 즐기고, 이미 수십만번도 더 포스팅된 (자연)명소 등에 방문한다. 그리고 밤에 숙소로 돌아와 잠들고, 귀국할 때까지 같은 루틴이 반복된다. 국내여행도 다를 바 없다. 우리는 그곳에서 일상의 현지인을 만나 그와 대화하며 그의 일상을 알아낼 겨를이 없다. 아니, 애초에 그럴 의도가 없다. 우리는 안전하게 검증된 스팟만 찍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나라는 가봤다며 지도에 빨간 표시를 한다. 그렇게 지도에 빨갛게 표시된 국가가 늘어봤자, 실은 그 국가들에 대해 현실적으로 아는 건 거의 없다.
현지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너무 부실한 주장이다. 실제 여행비의 대부부은 항공비와 숙소에 다 쓰인다. 그리고 항공사와 숙박업체는 국내 또는 해당국가의 대기업이다. 기타 예약을 위해 사용하는 플랫폼도 모두 국내의 대형업체다. 내 월급의 상당액이 여행경비라는 이름으로 다시 관광계열의 자본에 회수된다. 현지의 주민들에게 돌아가는 비율? 얼마나 되겠나.
위와 같은 취지로 예전에 <효리네 민박>을 비판하는 글도 썼었다. 그런 나의 태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했는데 최근 아즈마 히로키의 책 [약한 연결]과 [관광객의 철학]을 읽으며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즈마 히로키의 표현대로라면 나는 그저 원작충이었던 거다.
아즈마는 원작과 2차 창작의 관계를 주민과 관광객의 관계와 동일하다고 말한다. 일본의 경우 코믹케를 필두로 원작 애니나 코믹스에 대한 2차 창작물이 굉장히 활성화돼 있고 또 인기도 많다. 예를 들면, <드래곤볼>의 등장인물이 주인공인 BL물을 만든다거나, 일러스트를 그린다거나, 인형이나 장식물을 만든다거나 등등. 그런데 우리는 이때 2차 창작물이 원작의 구조와 어긋난다거나, 원작의 세계관과 모순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폄하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것대로 새로운 창작물로 인정하고 또 나름대로 즐긴다.
그렇다면 여행의 경우는 어떤가. 현지인이 원작의 주인공이고 여행지는 원작의 세계관이다. 그런데 여행자가 방문해, 자기가 가고 싶은 식당에 가서 사진 찍고, 경치 좋은 바다에 사진 찍고, 돌아와 그것을 SNS에 올리며 그것이 그 지역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여행자에 의해 편집된 2차 창작이 되는 셈이다. 이때, 과거의 나라면, 니가 방문하고 즐기고 사진 찍은 00의 모습은 진정한 00이 아니야, 라고 말했다는 거다. 그런데 아즈마는, 과연 그렇게 손쉽게 비판해도 될 문제냐고 반문한다. 그게 왜 나빠, 라는 거다.
2차 창작이 활발하다는 건 그만큼 원작에 대한 충성도가 높다는 거고, 종종 2차 창작 덕분에 원작이 재조명되는 경우도 많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몰랐을 00지역을 관광객들의 소개 덕분에 알려지는 경우도 많고, 그럼으로써 그 지역에 방문자가 많아진다면, 비록 여행자들이 그 지역의 일상의 모습을 다 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관심이 많아지는 것 자체는 긍정적이라는 말이다.
더 나아가 아즈마는 그런 태도를 자신의 철학의 모토로 삼으며, 현대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서 유비로 삼는다.
2.
관광객의 태도로 당대의 꼰대들을 냉소했던 사례가 과거에 있다. 볼테르의 [캉디드]다. 이 작품은 당대 유행하던 사상인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최선설')을 비판하기 위해 볼테르가 쓴 소설이다. 예정조화설은 우주는 항상 완벽하다는 이론이다. 왜냐하면 신이 우주를 만들었으니까. 범죄는 왜 있어요, 전쟁은 왜 일어나요, 저는 왜 가난하고 불행하죠? 응~ 그건 신이 우리가 알지 못할 의도를 가지고 마련해 놓으신 것들이야. 그러니까 걱정마. 다 뜻이 있어. 이게 예정조화설이다.
그런 라이프니츠에게 볼테르는 fuck you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다. [캉디드]는 주인공 캉디드가 재수없게 모함에 걸려 전 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이야기다. 여행하며 캉디드는 온갖 우연적인 행운과 불행을 목격하고 돌아온다. 볼테르의 메시지는 확고하다. 이 모든 행운과 불운은 신에 의해 예정된 게 아니라, 지극히 우연적이라는 것이다.
재밌는 건 다윈의 진화론도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에 기반한다는 점이다. 현 상태의 생물상이 오랜 도태의 결과 탄생한 '최선'의 결과물이라는 발상이 진화론이다. 그런데 지금 이 생태계의 모습이 정말 최선인지 우연인지는 아직도 논쟁의 영역에 남겨졌다. 우주의 시간을 45억 년 전으로 되돌린다면, 그리고 다시 45억 년이 지난다면, 그때도 지금과 똑같은 모습의 지구가 될까. 알 수 없다. 다만, 이것이 모든 생물학적 사건의 최선이라고 생각한 다윈은, 실은 라이프니츠와 정반대에 선 인물이었음에도,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를 벗어날 순 없었나 보다.
3.
슈미트는, 여전히 정치를 경제 도덕 진리의 방법론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정치는 경제 도덕 진리와는 전혀 무관한 독립적인 레벨임을 알려주기 위해 새로운 정치학을 썼다. 사실 그런 사고방식의 기본틀은 칸트에게서 나왔다. 참/거짓을 밝히는 레벨과, 선/악을 가르는 레벨과, 미/추를 구분하는 레벨은 전혀 다르다는 얘기를 했던 사람이 칸트다. 동지/적을 가르는 레벨이 정치라고, 슈미트는 축을 하나 더 추가한 것이다. 그러니까 전쟁에서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수많은 적군을 총 쏴 죽이고(도덕적 악), 어리석게 아군의 희생을 택하고(경제적 손실), 별 거 아닌 고지에서 쪼잔하게 굴어도(미학적 추), 그런 선택을 옹호할 수 있다는 게 정치적 선택이라는 거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을 있게 한 선배 역사 철학이 반 세기 전에 있었다. 코제브의 포스트역사론이다. 코제브의 의도는, 세계대전 후 소비사회에 절어버린 서구사회에, 2차대전이 끝났다고 역사가 끝난 게 아니라고, 지금 이 순간도 역사의 일부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다. 역사의 도중에 멈춰버린 인간들에게 채찍질하며 어서 역사의 종착지로 달리라는 게 코제브의 메시지다. 정치적 입장은 반대지만, 역시 같은 시기의 사르트르나 카뮈와 맥락은 상통한다.
한나 아렌트의 경우, 아이히만을 보며 무엇이 인간의 조건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전체 사회를 조망하지 못하고(않고), 내 눈앞에 주어진 작업에만 성실한 당대 사람들의 모습은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며 아렌트는 쓴소리를 했다.
셋의 정치적 입지는 완전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슈미트는 공동체가 아닌 경제적 이익만 추구하는 인간들을 비판하는 게 목적이었다. 경제적 이익 말구 공동체라는 선택지가 더 소중하다고 말이다. 코제브는 투쟁도 역사도 필요로 하지 않고 쾌락에 자족하는 동물적 인간을 비판하는 게 목적이었다. 역사적 투쟁을 통해 온전한 사회를 완성시키는 게 인간의 의의라고 말이다. 아렌트는 타자와의 활동에 무관심하고 사적인 공간에 갇혀 노동에만 안주하는 인간들을 비판하는 게 목적이었다. 노동하는 인간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타자와 관계 맺으며 자신을 실현하는 게 인간의 본모습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아렌트는 계승했다.
4.
정치/경제, 인간/동물, 시민/소비자, 규율 훈련/생명 권력, 국가/제국, 내셔널리즘/글로벌리즘. 이것들은 현대사회를 가로지르는 핵심적인 이항대립이다. 전자는 공동체주의, 후자는 자유지상주의의 속성이다. 이때 위의 세 사람은 후자의 위치에 있는 현대인들을 비판하며, 전자의 모습을 회복하기를 주문했던 학자들이다.
여기서 아즈마는 새로운 통찰을 제시한다. 실은 공동체주의도 자유지상주의도 동전의 양면이라는 거다. 바로 자유주의에서 공동체주의와 자유지상주의가 갈라져 나왔다고 말이다. 가라타니가 네이션에서 국가와 제국이 나왔다고 했던 이야기와 같은 맥락이다. 정치적으로 우리는 국가라는 바운더리 안에서 공동체주의적인 방식으로 살고 있으며 그것을 지탱하는 이념이 내셔널리즘이다. 경제적으로 우리는 세계라는 바운더리에서 자유지상주의적으로 살고 있으며 그것을 지탱하는 이념이 글로벌리즘이다. 결국 어느 쪽으로 가든 자멸할 수밖에 없다는 게 아즈마의 전망이다.
그래서 그는 관광객으로서의 정체성을 제안한다. 온전히 국가에도, 제국에도 속하지 않으며, 그 사이를 아슬하게 비켜가는 삶. 그것이 관광객으로서의 삶이다.
5.
관광객으로서의 삶이 추상적으로 받아들여지기에,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상을 제시하기 위해 아즈마는, 존 롤즈와 (로버트 노직을 업은) 마이클 샌델의 논쟁을 소환한다. 롤즈는 '무지의 장막'이라는 개념을 통해 모든 인간의 속성을 표백한다. 내가 남성인 것, 특정 연도에 태어난 것, 하필이면 한국에 태어난 것, 나의 부모님을 부모님으로 만난 것, 혈액형이 O형인 것, 키가 이렇고, 외모가 이 모양인 것, 모두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 우연히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에게 붙은 모든 태그를 다 떼고 졸라맨이 되어보자는 게 롤즈의 주장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들은 중립적이고 정의로운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말이다.
위 주장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이라는 얘기를 하기 위해 새로운 자유주의를 쓴 게 로버트 노직이다. 내가 남성도 아니고 국적도 없고 키 외모 다 빼고 사회적 관계 다 지우고 졸라맨이 되면, 나와 너의 구분이 어딨냐고 말이다. 그런 존재를 개인이라 부를 수 있으며, 그런 존재에게 개성과 기본권이 성립될 수 있냐고 노직이 반문했다. 샌델은 그런 노직의 반론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여 롤즈의 정의론이 무의미한 논의라고 비판한다.(이 논의에서 사실 샌델은 롤즈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판단된다. 자세한 논의는 생략)
아즈마는 위의 롤즈와 샌델의 논쟁을 종합적으로 계승한다. 누구를 만나든, 내가 그 사람의 가족으로 태어났을 수도 있었다는 마음으로 그를 대하라는 게 아즈마의 결론이다. 그것이 관광객의 삶이다. 지금은 내가 태어난 바로 이 공동체에 속하지만, 어쩌면 다른 공동체에 속할 운명이었을 수도 있다는 개방된 마음을 가지라고.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 수 있고, 또 어디에도 속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