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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Jan 15. 2022

'근대인의 교양'을 마치며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1.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학문 분야는 단연코 철학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세상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게 좋은 삶인가, 이런 질문들에 나는 너무 깊지 않게 살포시 휩쓸려 다녔다. 많은 철학자들을 얇고 넓게 읽었는데, 고백하건대 나에게 가장 철학적 감동을 준 이는 영화 <헤드윅> 감독 존 카메론 미첼이었다.


<헤드윅> OST ‘wicked little town’이라는 곡 중 tommy gnosis 버전이 있다. 그 곡 가사 중 대충 “하늘에는 기적도 운명도 신도 없어. 있는 건 공기뿐이야.” 이런 내용이 있다. 지금까지도 나를 뒤흔든 가장 크리티컬한 문장이라 생각한다. 운명 인연 낭만 사랑 진리 평화 그런 단어들을 아이 때부터 품어 온 나에게 휘두른 날카로운 검이었다.


그후 자연스럽게 니체를 읽게 되었다. 우주에는 신도 없고 진리도 없고, 인생에는 아무런 데스티네이션이 없다. 그래도 슬퍼 말고 허무해 말아라. 오히려 삶에는 아무것도 걸릴 것 없으니 마음껏 창의적이고 자유롭게 살아가도 좋다. 그게 더 기쁘지 않은가. 니체는 그렇게 말을 건냈다.


2.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것이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면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고 가치도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어렴풋이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만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살고 싶다고 말이다. 그게 직업선택에도 은연 중에 영향을 끼친 것도 같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생각되는 전문 직종들, 가령 의사 판사, 이런 직업들에 나는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건 꼭 내가 아닌 다른 의사 다른 판사가 해도 상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직업 자체, 그리고 현실에서 그 직업을 수행하는 개개의 의사와 판사들은 당연히 무척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음에 이견이 없다.


그런데 그 현장에 내가 있어야 한다면, 그건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지금도 의사 판사보다는 개그맨이나 유튜버가 나에겐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 개그는, 그 컨텐츠는 그 개그맨과 유튜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미신적이긴 하지만, 아기 때 부모님이 점을 보러 다니면 꼭 나는 커서 예술 관련 일을 할 거라는 말을 많이 들었고, 성인이 된 후에도 주위에 영적으로 발달하신 분들이 꼭 나에게는 보라색 기운, 그러니까 예술적인 기운이 넘친다는 말을 가끔 들었는데, 괜한 얘기는 아니었나 싶다.


3.

자 그럼 이제 나만의 독창적인 삶을 살면 될 텐데. 그 한 발자국을 내딛기도 전에 나에겐 더 큰 고민이 생겼다. 정말 오롯이 나만의 것이란 게 있나? 사실 나란 인간은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하고 읽은 모든 것들의 편중된 결과물이 아닌가 말이다. 나의 생각은 결국 누군가의 생각으로부터 받은 영향일 뿐이다.


헤럴드 블룸은, 실제 시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자신의 시가 과거 선배 시인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라며, 그것을 ‘영향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명명했다. 나는 그들의 두려움이 무척 와닿았다. 결국 문화 예술 작품도 선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텐데. 나의 이런 생각은, 관점은, 가치관은, 사고방식 등등은 어디서부터 영향받은 것일까. 그런 의문으로 자연히 흘러갔다.


4.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그렇게 썼다고 들었다. 그 소설은 프루스트 본인의 자전적 소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작품 속 주인공이 자신의 역사를 자신의 시점에서 재구성해 나감으로써 마지막에 글을 쓸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주인공이 그랬듯 프루스트에게도 이 소설을 쓰는 과정이,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주변인에 대해 본인의 관점에서 재서술해 나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저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그럼으로써 나와 선대의 영향의 관계를 역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의 인식론 전환과 같은 맥락이다. 외부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나의 내면의 프로그래밍에 따라 내가 쏜 빔 프로젝트처럼 외부 세계가 나타난다는 발상.


좀 더 쉽게 말하면 이런 거다. 선대의 인물들이 나에게 일방향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들이 생전에 의도했던 메시지가 전혀 훼손되지 않고 100% 날것 그대로 나에게 와 꽂힐 수 없다. 그들을 만나 선택한 건 나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나의 주관에 따라 그들의 메시지는 왜곡되고 부서진다. 나는 그들을 오독한다. 그러므로 영향의 주도권은 그들에게 있는 게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이다.


5.

나는 분명 과거의 수많은 요인들의 합이다. 그런데 내가 그것들을 호명하는 순간부터 관계는 역전된다. 내가 다윈을, 맑스를, 니체를 호명하고 그들을 내 손으로 쓰는 순간, ‘그들의 나’에서 ‘나의 그들’이 된다. 내가 오롯이 나의 글을 쓰려면, 먼저 나의 내면이 어디서 비롯했는지 스스로 밝혀야 할 것 같았다. 프루스트가 그랬듯.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수많은 시인들이 고민해왔듯. 나도 은연 중에 줄곧 그런 생각이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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