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해력이란 무엇인가
문해력을 높이는 일상의 변화들
요즘 10대들의 문해력이 급격히 낮아졌다고 아우성이다. 고등학생이 국어 시험을 치다가 요절을 손절로 이해했다는 둥,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명징’이라 표현했다고 왜 ‘명확’이라 쓰지 않고 어려운 말을 쓰냐며 네티즌들이 화내는 둥. 그러므로 문해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그러려면 이러저런 방법을 활용하라는 조언들이 난무한다.
문해력을 높이는 방법을 찾아보면 크게 3가지로 정리되는 듯하다. 1: 어휘력 높이기. 2: 교양으로서의 배경지식 쌓기. 3: 다독. 너무나 상식적인 해법이기에 틀린 방법은 아니지만, 그래서 저 방법들을 통해 문해력을 높일 수 있다는 데에 이견은 없지만, 그럼에도 저것이 진짜 해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 3가지 방법은 현상적인 접근일 뿐.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어휘력. 일단 나 자신부터 인위적으로 어휘력을 늘리기 위해 노력한 적은 없다. 내가 아는 단어의 거의 대부분은 저절로(!) 알게 된 것들이다. 사전을 찾거나 인터넷에 검색해서 알게 된 건 극히 일부다(은어나 유행어, 전문용어 정도?). 중고등학생 때도 딱히 국어사전을 찾아가며 공부하진 않았다. 고1 때 고사성어 교재를 가지고 다니며 암기하긴 했다. 그러나 그때 외운 고사성어 중 일상적으로 쓰이지 않는 것들은 전부 잊어버렸다. 아마 지금 그걸 다시 본다 해도 대부분의 사자성어는 생소하게 느껴질 것 같다.
무엇보다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 아는 것보다 일상에서 사용하며 익히는 게 훨씬 기억에 잘 남는다. 중학생 때 하루에 영어단어를 50개씩 암기하던 시절이 있었다. 쪽지시험을 봤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거의 다 외우게 되었다. 하지만 시험이 끝나고 며칠만 지나도 그것들은 기억에서 사라졌다. 거의 1년 정도 한 듯하니 50×300=15000 단어 정도는 외웠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고3 정도의 영어 어휘력이 6000단어이고 텝스가 1만 단어 내외이니 말 다 했지.
둘째는 교양과 배경지식. 아는 분야에 대한 글을 읽을 때 이해력과 속도가 급상승하는 건 당연하다. 실제 속독학원에서도 이 방법으로 접근한다. 계속 같은 텍스트를 반복해서 읽힌다. 그러면 어느 정도 스토리라인이 머릿속에 있기 때문에 세밀하게 읽지 않아도 내용이 포괄적으로 머릿속으로 들어온다(들어오는 게 아니라 정확히는 상기되는 거겠지만..). 그러다 보면 동체 움직임이 확실히 빨라지고 그걸 반복하다 보면 그 움직임이 습관화된다.
아는 지식이 많으면 당연히 다양한 텍스트를 용이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는 분야의 텍스트를 쉽게 읽는 걸 두고 진정 문해력이 높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몇 년 전에 페이스북에서 잠깐 이슈가 되었던 글이 생각난다. 당시 고3 수능 모의고사 국어 과목에서 후설 관련 비문학 지문이 나왔다. 논란의 주인공은 그걸 두고 사교육 조장과 교육의 양극화 조장이라며 비판하는 논지의 글을 썼다. 고3이 후설을 어떻게 아냐며, 강남 대치에서 학원 다니는 애들만 알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해당 글은 2가지 차원에서 개소리다. 하나는 현실적인 차원. 대치동 국어학원에서 후설 강의했다간 그 국어강사는 그날로 짤린다. 그 논란의 필자는 40대 남성이었는데, 아마 대치 학원가의 실상을 본인 10대 때는 물론 그 후로도 전혀 접해보지 않은 게 미스였을 게다. 대치뿐 아니라 입시의 최전선에 있는 학원에서 서양철학사 같은 커리큘럼을 시도했다간 진짜 박살난다. 학생과 학부모의 니즈는 지금 당장 코앞에 있는 내신과 모의고사 성적을 올리는 것이다. 학원에서는 철저하게 시험 점수를 높이기 위한 테크닉 전수에 혈안이 되어있지, 한가하게 인문학 강좌를 할 여유가 없다. 후설이 과연 언제 수능 지문으로 나올 줄 알고 그걸 강의하고 자빠져있단 말인가. 대치 고딩들도 후설은 모른다.
다른 하나는 본질적 차원. 내가 진짜 지적하고 싶은 지점이다. 애초에 수능 국어의 취지가 뭔가. 글을 읽고 글의 논지를 파악하고 적용하고 비판할 수 있는가를 묻기 위함이다. 수능 국어야말로 정확히 ‘문해력’ 검증 시험인 셈이다. 국어 점수를 높이기 위해 배경지식을 공부하는 한심이들은 없다(있다면 미안). 어떤 주제 어떤 소재의 글이 나올 줄 알고 그걸 미리 공부하겠는가. 더구나 그걸 안다고 해서 국어 문제를 더 잘 맞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수능 국어 지문이 그렇게 어렵게 나오지도 않는다. 평균적인 문해력을 지녔다면 누구나 충분히 독해할 수 있는 수준의 지문이 나온다. 해당 주제나 분야를 알든 모르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후설을 모르는 사람이 읽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지문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배경지식을 쌓아서 문해력을 높인다는 발상은, 문해력의 본질과 모순된다. 문해력이 무엇인가. 텍스트를 읽거나 듣고 그 내용을 파악하는 것 아닌가. 문해력이 높다는 건,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의 텍스트를 접하더라도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임을 뜻한다. 배경지식 자체도 텍스트 없이 저절로 쌓이는 게 아니다. 배경지식을 쌓는 행위도 결국 해당 텍스트를 읽거나 들음으로써 성립된다. 과연 최초의 배경지식은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 말이다. 배경지식의 유무와 관계없이 사람은 텍스트를 읽(거나 듣)고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다.
마지막은 독서. 최근 본 한국인 1년 평균 독서량이 8권이었다. 다른 자료에서는 1달 평균 독서량이 0.8권이라고 했고. 10명 중 3명은 아예 책을 읽지 않는다는 자료도 있었다. 조심스레 추측해보자면, 독서량은 양극화가 심각할 것이다. 0.n% 탑티어들은 1년에 100권 200권 300권 읽는다. 내 주변엔 그런 이들이 꽤 된다(나도 한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런 사람들이 평균을 그나마 올린 거라고 생각된다. 한국에서 절반 이상의 사람들은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의 문해력이 떨어진다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대학생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얘기되는 게 있다. 고딩 때 수능 국어 3-4등급 받던 애들도 대학생활 1년쯤 하면 국어 점수가 상당히 오른다는 거다. 내가 프레시맨 때는 듣고 흘려 넘겼었다. 그러다 군대 다녀오고 저 말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입대 전에는 영수 과외만 하던 내가 전역 후 우연찮게 국어 과외까지 하게 되었다. 허나 당시 나는 3년 반 가까이 국어를 손 놓은 상태였다. 첫 과외를 준비하며 일단 내 수준을 테스트하기 위해 작년 수능 국어 기출을 풀어보았다. 집에서 타이머를 재서 풀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고딩 때 나는 수능 국어(라때는 ‘언어영역’이었다) 바보였다. 시간은 늘 15~20분쯤 모자랐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모의고사에서 국어가 총점을 다 까먹었다. 수능 때까지도 그랬다. 참고로 나는 중3 겨울방학 때부터 고3까지 수능 국어 공부를 상당히 열심히 했다. 책상 한켠에 국어 문제집을 10권 20권씩 쌓아놓고 풀곤 했다. 그럼에도 내 국어 성적은 끄떡도 없었다. 반면 공부 하나도 안 하는 형은 나보다 늘 모의고사 국어 성적이 좋았다. 형뿐 아니라 국어 공부 하나도 안 해도 모의 성적이 좋은 친구들은 널리고 널렸었다. 아무튼 군필자인 내가 푼 작년 수능 국어는 만점이었다. 시간도 5분 정도 남았다. 와 씨 재수할까, 싶은 생각을 3일 정도 했던 거 같다. 대학생활을 하면 저절로 국어 점수가 오른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다른 과목과 달리 수능 국어의 경우 학습량과 성적이 양의 상관관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나뿐 아니라 죽어라 공부 해도 성적이 엉망인 애들이 많았고, 수능 국어 공부를 왜 해? 너 이민 왔니? 라던 애들도 많았다. 나는 독서와 문해력의 상관관계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1차적인 결론은 이거다. 어휘력, 배경지식, 독서 경험이 많을수록 문해력이 높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저 3가지는 문해력의 핵심은 아니라는 거다. 어휘력이 낮아도, 배경지식이 적어도, 독서를 안 해도 문해력은 높을 수 있다. 왜 그런지 이제부터 말하려 한다.
맨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애초에 문해력이란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 텍스트를 접하고 그것의 의미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전반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이것을 기본적인 단위로 환원시켜보자. 가령 ‘사랑해’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 의미를 획득하는가. 저 글자 혹은 음성에서 어떻게 그런 의미가 생겨나는가. 인간은 어떻게 그런 능력을 얻게 되는가. 나는 그에 대한 힌트를 얻기 위해 4명의 위인을 모셔볼 생각이다.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을 대결시킨 뒤, 후설과 하이데거를 마주 세우려 한다.
소쉬르의 경우 언어의 의미는 언어 자체에 내재하지 않으며, 언어가 지칭하는 대상에서 비롯하지도 않는다고 보았다. 그 말인즉슨, 언어는 현실 세계와 대응하지 않는다는 거다. 언어가 현실에 착 달라붙어 있는 듯한 기분은, 우리의 관습에 따른 고정관념에 불과하다. 이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아주 간단한 실험을 따를 것을 제안한다. 눈앞에 있는 물체를 아무거나 스무 번 연속해서 말해보라. 가령 지금 내 눈앞엔 휴지가 있다. 휴지 휴지 휴지 …… 빠르게 스무 번만 발화해 보라. 묘한 기분이 들 것이다. 휴지? 왜 이게 낯설지? 왜 저걸 휴지라고 부르지? 뭐 이런 느낌과 생각이 들 것이다. 언어는 현실과 무관한 독자적이고 완결된 세계를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지구상에는 최소 6천 개 이상의 언어가 있을 수 있다. 언어가 현실 세계와 맞대응한다면 오직 하나의 언어 체계만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대체 의미는 어디서 비롯하는가. 소쉬르에 따르면 의미는 언어 구조 내부에 차이들의 체계에서 발생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오디션 프로그램을 예로 들어보자. 10명의 뮤지션이 참가했다고 치자. 첫 번째 참가자가 노래를 불렀다. 이때 이 참가자의 순위는 어떻게 매겨지는가. 혼자만 부른 상태에서는 순위를 매길 수 없다. 점수는 어찌어찌 매겨지겠지만 그 점수는 아직까지 아무 의미가 없다. 결국 이 사람의 순위는 10번째 참가자가 노래를 마쳐야 결정된다. 그 사람의 점수 또한 그때 온전한 의미를 얻는다. 결국 10명의 참가자들의 실력과 가치는 스스로가 아니라 다른 9명의 참가자와의 차이의 체계에서 발생한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가령 사과‧멜론‧포도라는 단어를 예로 들자. 사과의 의미는 사과라는 언어 자체에서 나오지 않는다. 사과와 멜론과 포도라는 말의 차이에서 셋의 의미가 발생한다. 그 증거로, 셋을 바꿔 부르기로 사회적으로 합의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소쉬르는 체스를 비유로 들었는데, 가령 퀸에 해당하는 말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을 지우개로 대체하면 그만이다. 퀸의 역할을 하는 말이 꼭 퀸처럼 생길 필요는 없다. 그 형상과 역할을 짝짓는 건 우리의 상상 또는 망상이다. 언어에서도 동일하다는 말이다. 언어의 겉모습과 의미를 한몸이라 여기는 것 또한 우리의 상상이다. 현실 세계와 한국어, 영어, 중국어 등은 모두 각각의 독립적인 세계를 구성한다. 현실을 한국어와 연결해서 생각하는 건 한국인의 관습이고, 현실을 중국어와 접착시켜 바라보는 건 중국인의 관습이다.
위와 같은 소쉬르의 생각에 반대한 사람이 비트겐슈타인이었다. 물론 그 둘은 만난 적도 없으며 비트겐슈타인이 대놓고 소쉬르를 비판한 적도 없다. 다만 그들의 사후에 둘의 논의를 살펴보면 서로 반대되는 얘기를 했다는 정도다. 그러니 오해 없기 바란다. 한 가지 더. 비트겐슈타인은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여기서 언급하는 비트겐슈타인은 전기 버전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세계는 똑같은 논리 구조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언어의 의미는 언어 내부의 차이들에서 성립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을 지시함으로써 가능하다. 나는 러시아어를 아예 모른다. 그런 내가 러시아어 사전(러한 아니구 러러 사전)을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완벽하게 암기한들 여전히 나는 러시아 단어의 뜻을 하나도 알지 못한다. 이런 식이다. 러시아어에 단어가 모두 1부터 10까지 10개라고 하자. 1이란 단어를 찾으면 2~10을 이용해서 뜻을 풀이해 놓았을 것이다. 2를 찾으면 역시 나머지 9개 단어를 써서 의미를 설명... 이때 나는 1부터 10까지 모든 단어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10개 단어의 의미 설명을 모두 암기하더라도 여전히 의미는 모른 채 남는다.
그러니 소쉬르가 틀렸다. 단어를 다 암기했고 그들 사이의 문자적/음성적 차이를 모두 파악하더라도 여전히 내 안에서 러시아어의 의미는 생성되지 않는다. 러시아어의 의미를 깨치려면, 최소한 최초의 단어 하나의 의미는 알고 있어야 한다. 실제 사례를 들어보자. 헬렌 켈러가 어떻게 언어를 배웠는지는 다들 알 것이다. 짐승과도 같았던 헬렌의 손을 잡고 설리번 선생님은 몇 번이나 분수에 집어넣고, 헬렌의 등에 w a t e r을 쓰는 걸 반복했다. 처음에 헬렌은 계속 발버둥쳤지만 설리번의 끈질긴 반복으로 헬렌은 알아채게 된다. 지금 내 손에 닿은 이것이 지금 설리번 선생님이 내 등짝에 쓰는 거구나, 하고. 그 순간부터 헬렌의 언어적 호기심은 폭발한다. 손에 닿는 것마다 이건 뭐라고 쓰냐고 설리번에게 물어댔다. 그와 같은 방식은 헬렌만의 독특한 경험이 아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언어를 배우는 보편적인 과정이다.
이번엔 한 걸음 더 딥하게 들어가 보자. 문해력도 결국 생각의 일종이다. 문장에서 의미를 도출하고 이해하고 적용하고 반성하는 등의 내적 행위가 ‘문해’이다. 이런 능력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알아가기 전에 예고했던 대로 후설과 하이데거를 새로 소환하겠다. 앞서 잠깐 특별출연했던 그 후설 맞다. 이번엔 정식으로 모셔보자. 참고로, 여기서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철학적 논의를 고찰하려는 게 아니다. 그들의 논의를 발판 삼아 생각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하나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함이다.
후설은 기존의 철학이 잘못된 곳에 시선을 집중했었다며 비판했다. 그 잘못된 곳이란 바로 세계를 일컫는다. 철학이란 현상들을 분석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는 일련의 지적 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간 철학자들은 현상의 진원지를 세계에서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후설에 의하면 현상의 진원지는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이었다. 우리가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느끼거나 기억하거나 생각하거나 계산하거나 판단하거나 상상하거나 예측하거나 등등 모든 것은 결국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태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태를 받아들이는 인간 내부의 문제라고 말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철학자들이 시선을 인간의 내부로 돌려 정신부터 정확히 연구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의 애제자 하이데거는 반기를 들었다.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하이데거가 후설을 저격한 게 맞다. 결국 둘은 척지는 사이가 된다.) 후설은 인간의 내면과 외부 세계 중 인간 내면이 먼저라고 생각했지만, 하이데거가 보기엔 그 반대였다. 외부 세계가 우선이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만약 태아가 오감이 없이 태어났다고 가정하자.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맛볼 수도 냄새 맡을 수도 없는 상태라고 말이다. 이 아이는 외부 세계를 전혀 감각/지각할 수 없다. 이 상태로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된다면? 아이는 생각할 수 있을까? 의식이란 게 생길까? 아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앞서 헬렌 켈러를 떠올리면 이해될 것이다. 그나마 헬렌은 시각과 청각만 장애가 있었고 나머지 3개 감각은 멀쩡했기에 언어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런 헬렌조차도 설리번이 없었다면 짐승인 채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감이 모두 작동하지 않는 이 아이의 경우 설리번 아니라 설리번 할배가 와도 도움 줄 수 없다. 아이는 외부 세계 자체를 인지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이라는 존재도 모르고 생존만 할 것이다.
하이데거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거다. 인간의 정신이란 것은 오감이라는 각 채널을 통해 외부 세계를 입력 받음으로써 생성되는 거라고 말이다. 그러니 인간 정신을 만드는 것은 외부 세계이고 따라서 선후를 따지자면 외부 세계가 먼저다.
지금까지 살펴본 4명의 철학자를 발판 삼아 생각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제 본격적으로 알아보자. 최근 10~20년 사이 신경과학의 주요 연구 주제 중 하나는 인간에게 의식이 어떻게 탄생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그에 대해 크게 두 그룹이 있는데, 하나는 광역작업공간이론 그룹, 다른 하나는 정보통합이론 그룹이다. 여기서는 정보통합이론을 따라가려 한다.
인간의 모든 정신 활동은 생명과학의 관점에서 신경으로 환원 가능하다. 정확히는 신경과 신경의 연결인 시냅스의 문제다. 인간의 뇌에는 1000억 개 정도의 신경세포가 있다. 신경끼리의 연결점인 시냅스는 총 100조 개 정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재밌는 건 소뇌에는 신경세포가 800억 개, 대뇌피질에는 200억 개 있다. 그렇다면 의식 같은 복합적인 정신 활동은 소뇌가 담당할 것 같지만, 실상 의식은 대뇌피질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이 문제적이다.
왜 소뇌보다 신경세포가 4배나 적은 대뇌피질에서 의식이 발생할까. 그것은 신경세포의 연결 방식의 문제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소뇌는 신경세포들이 병렬적으로, 대뇌피질은 직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차이는, 병렬적 연결은 각 연결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독립적 존재라는 것인 반면, 직렬적 연결은 각 연결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의존적인 형태라는 점이다. 그게 무슨 말이고 왜 중요한가.
사진기든 USB든 알파고든 인간이 만든 기계의 메모리를 담당하는 기본 유닛인 반도체의 경우 각 단자는 소뇌처럼 병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어느 한 부분이 망가져도 나머지 부분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반도체의 개별 단자가 가질 수 있는 값은 ON/OFF 2가지뿐이다. 단자가 1억개든 100억개든 개별 단자의 정보값은 어쨌든 2개이다. 소뇌도 마찬가지다. 800억 개의 신경세포가 있으니 시냅스 개수는 80조 개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80조 개의 시냅스 각각은 연결되었나 안 되었나 2가지 정보값만 가질 수 있다. 바로 옆에 시냅스가 연결되었든 말든 해당 시냅스와는 아무 관련 없으며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그러니 소뇌가 가질 수 있는 정보값는 2×80조=160조 개가 된다.
반면 대뇌피질은 다르다. 200억 개 신경세포가 있으니 단순 계산으로 20조 개 시냅스가 존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20조 개의 시냅스는 모두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 말인즉슨, 하나의 시냅스는 나머지 19조 9999억 9999만 9999개 시냅스의 상태에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대뇌피질이 가질 수 있는 정보값은 2의 20조 승이다. 이건 정말 어마무시한 수치다. 왜냐하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원자의 개수가 대략 2의 300승이기 때문이다. 비교불가한 수준이다.
그렇다면 저와 같은 초우주적인 용량을 가진 신체만 있으면 의식이 바로 발생하는가. 아니다. 아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정보통합이론은 5세 이전의 기억이 없는 이유는, 평균적으로 5세 미만에서는 의식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라 여긴다. 그렇다면 왜 의식이 발생하기까지 5년 정도의 시간이 걸릴까. 그에 대해서는 다시 소쉬르에게서 힌트를 구할 수 있다.
의식이 생기려면 적정량의 데이터가 필요하다. 대뇌피질에 어느 정도의 정보량이 각인되어야 의식이 나타날 수 있다. 어떤 대상을 보고 치욕을 느낀다거나, 어떤 소리를 듣고 화난다거나, 무언가를 만지고 안심한다든가, 어떤 냄새를 맡고 과거를 회상한다거나, 어떤 음식을 맛보고 행복을 느낀다거나 이 모든 것들은 정신의 내적 활동이다. 그런데 그러려면 그것과 다른 데이터와의 비교‧대조‧분석을 통해 단일한 가치 체계에 위치 지어져야 한다. 소쉬르가 말했던 대로 말이다. 가령, 평생 어둠 속에만 살아 아무것도 보지 못한 이에게 딱 한 순간 고양이 사진을 보여준다 한들, 그에겐 아무런 느낌도 생각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좋은 재밌는 실제 사례가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가 길을 걷다 길 잃은 아이를 발견했다. 어이하여 길을 잃었느냐 묻자 아이는, 자신은 원래 장님이었는데 방금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세상이 온통 낯설어서 도무지 길을 찾을 수 없다고. 박제가는 단번에 해법을 제시했다. 아이야, 지금 뜬 눈을 다시 감거라. 아이는 태어나서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시각 정보를 축적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날 눈 앞에 펼쳐진 시지각 정보는 무의미를 넘어 혼돈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엄청난 값의 정보량을 의도치 않게 입력 받고 있다. 눈을 뜨고 있는 한, 눈 앞의 장면은 실시간으로 시각 정보로 입력되고 귀를 막지 않는 한, 모든 소리는 뒤엉켜 청각 정보로 들어온다. 나머지 감각 층위 또한 마찬가지다. 영유아도 똑같다. 감각이 작동하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외부 정부가 물밀 듯 뇌에 박힌다. 적어도 이와 관련해서는 하이데거가 옳았던 셈이다.
그와 관련된 또 다른 흥미로운 심리학 연구가 있다. 모국어를 습득하는 과정에 대한 연구인데, 대상은 A그룹 B그룹으로 나뉜다. A그룹 아기들은 영유아 때 부모님이 없는 낮 시간 동안 주로 라디오를 듣고 자랐다. B그룹은 영유아 때 보호자의 음성을 직접 들으며 컸다. 결과적으로 단연 B그룹의 모국어 실력이 훨씬 높았으며, 일부 A그룹 아기는 취학연령까지도 모국어를 학습하지 못하거나 지적 능력이 평균보다 낮게 발현되는 등의 현상을 보였다.
그 이유는 이렇게 추론할 수 있다. 라디오의 경우 mc가 하는 말과 아기가 실제 접한 현실 세계가 괴리되어 있는 반면, 보호자와 함께 있었던 B그룹의 경우 보호자의 말은 아기가 처한 현실 환경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라디오에서 남의 사연을 소개하거나 증권시장을 분석할 때 그와 관련된 실제 세계는 아기 눈앞에 펼쳐지지 않는다. 그에 반해 보호자는 아기에게 무언가를 주면서 그 대상을 언급하는 등 말과 현실을 계속 접목시키는 작업을 해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적 차원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옳았다.
이제 다시 맨 처음의 문제 제기로 돌아가자. 애초에 왜 요즘 10대는 과거 세대보다 문해력이 낮아 보일까. 어휘력이 부족해서? 교양지식이 없어서? 책을 안 읽어서? 아닌 거 같다. 그건 윗세대들이라고 특별히 더 우세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문해력이 낮아진 게 특정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의 문제라면, 보다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이 외부 세계와의 접촉 부족, 외부 세계로부터 직접적으로 입력 받는 정보량의 절대 부족이라 추측한다. 의식이란 건 있다/없다 같은 디지털값이 아니다. 종이가 무색에서 검은색으로 점진적으로 변하듯, 대뇌피질에 정보량이 쌓일수록 의식은 점점 선명해진다. 정신 활동의 명확성과 대뇌피질에 쌓인 정보량은 비례관계이다.
그렇다면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줄어든 이유를 찾으면 된다. 나는 그것이 크게 2가지 원인 때문이라 생각한다. 하나는 스마트폰의 사용 증가. 이는 앞서 심리학 연구에서 A그룹 아기들에 비유될 만하다. 그나마 나은 점은 스마트폰은 시각 정보를 함께 제공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머지 3가지 감각질은 스마트폰으로부터 입력받을 수 없으며, 시각 정보마저도 전체 시야가 아닌 딱 스마트폰 크기만큼의 양만 입력 받게 된다. 실제 현실과의 조우에서 얻는 정보값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다른 하나는 루틴의 단순화. 과거에 비해 학구열과 사교육의 정도가 훨씬 심해졌다. 수능 시험 하나로 대학 갔던 과거에 비해 이제는 수시 정시 모두를 케어하도록 바뀐 대입제도의 탓도 크다. 요즘 초중고생의 루틴은 대부분 집-학교-학원-독서실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러니 현실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값 자체가 단조롭고 다양하지 않다.
자연히 해법은 원인의 반대편에 있다. 하나는 스마트폰 사용 시간과 온라인 접속 시간을 줄이는 것. 줌 회의 대신 오프라인 만남을, 인강 대신 학원 직강을 택하는 것을 권한다. 남주혁의 조명 온도 습도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실제로 인간은 거기서부터도 미세한 정보값을 축적한다.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한 말이 있잖은가. 실제 시험 보는 장소에서 공부해 보라고.
다른 하나는 다양한 장소, 다양한 사람, 다양한 환경과 상황을 마주하는 것이다. 도전, 여행, 모험 이런 것들의 소중함은 빤한 클리셰가 아니다. 새로움에서 인간은 자신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고, 스스로의 정신을 단단하게 다질 수 있다.
이 긴 글의 내용을, 딱 100년 전의 비트겐슈타인은 딱 한 문장으로 말했다. 가히 천재다. 그 말은 다음과 같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