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맨 처음으로
[혁명의 거리에서 들뢰즈를 읽자]에서 찾은, 잘못 끼워졌던 첫 단추
1.
우주를 움직이는 동력은 우주 안에 있을까 우주 바깥에 있을까? 이를 인간 사회에 적용해 보자.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은 해당 사회 안에 있을까 밖에 있을까? 저 질문을 철학사에 적용하면, 전자는 유물론, 후자는 관념론이 된다. 이론의 정합성과 완성도를 따진다면 유물론이 낫다. 반면, 이론의 확장성과 창의성을 중시한다면 관념론이 매력적이다. 사실 마음 편한 건 관념론이기도 하다. 우주가 스스로 탄생하고 소멸한다는 가설보다는, 우주 바깥에 있는 우주보다 훨씬 어마무시한 존재가 우주를 탄생시키고 소멸시킨다는 설이 더 와닿는다. 다만 아쉽게도, 흥미롭고 그럴 듯한 이야기지만, 그것은 검증될 수 없는 그저 썰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이야기일 순 있지만, 이론이 될 순 없다.
다소 무분별할 수 있지만, 여기서 ‘오컴의 면도날’을 대보자면, 우주나 사회 그 자체로 설명할 수 있는 유물론이 가장 깔끔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그 편이 실용적이고 효과적이다. 우주 변화의 원인이 우주 바깥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우주에 개입할 여지는 없다. 사회 또한 마찬가지다. 문제를 해결하거나 사회를 성장시키는 요인이 애초에 사회 바깥에 있다면 구성원들이 노력할 이유도 필요도 없어져 버린다. 그러므로 건설적인 사상가라면 관념론으로 기울고픈 유혹을 뿌리치고, 고달프더라도 유물론을 택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2.
현 사회에서 유물론의 대가라 하면 마르크스가 떠오를 것이다. 마르크스는 차치하고라도, 그동안의 맑스주의는 철저히 유물론적이었던가. 회의적인 부분이다.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1960년대 유럽은 사상의 굴곡점이었다. 맑스주의가 쇠한 게 보통 1990년 전후라고들 생각하지만, 동독과 소련의 붕괴는 사실상 맑스주의가 쇠퇴한 마지막 결과물일 뿐이다. 60년대에 이미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맑스주의는 지워지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68혁명의 실패로 그 정점을 찍었고, 일본에서도 같은 해에 전공투의 실패와 72년 아사마 산장 사건에서 그 마침표를 찍은 셈이다.
맑스주의가 무너진 허전한 마음에 깃든 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었다. 이제 프로이트라는 유령이 유럽의 온 거리를 배회하고 다녔다. 전쟁을 왜 해? 왜 범죄가 끊이질 않아? 사람들은 왜 서로를 미워해? 왜 가난은 반복돼?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인간의 무의식이었다. 이보다 더한 치트키는 없었다.
그런데 인간의 정신이 단지 인간이라는 육체 안에만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가령, 어떤 기술이나 제도, 풍습이나 도덕 같은 것도 결국은 인간 정신이 발현된 결과물이지 않은가. 그러므로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비물질적/물질적 요소들도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정신이 구체화된 것이라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라는 것의 심층에는 인간의 무의식이 전제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무의식을 단지 인간이라는 신체로서의 뇌나 신경세포에 국한된 원자적인 단위로 볼 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만연한 그물망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냐는 반문이 가능하다.
사회 전체를 무의식의 확장으로 본다면, 인간의 행동과 문제들은 단순히 개개인의 무의식 탓이 아니라 그 무의식의 그물망인 사회 구조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나아가 그러한 사회 구조를 구성한 인간 정신의 동기와 욕망까지 가 닿을 수 있다. 인간들은 어떤 동기에서 어떤 욕망을 품고 지금과 같은 사회 체제를 만들었을까. 질문의 시작은 일단 여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