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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Oct 01. 2022

아우라와 예술은 공존할 수 없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새로 읽기

벤야민은 자기 시대의 예술을 '아우라가 사라진 예술', 이전 시대의 예술을 '아우라가 있는 예술'이라는 식으로 구분하지만, 사실 그의 분석은 지금의 시점으로 보면 전체에 대한 일부에 대한 이야기 같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아우라가 있는 예술'은 지금의 시점에서 다시 보면 예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나리자>라든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같은 작품을 예술로 대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태도인 것이고, 그 작품이 탄생한 당시 시점에서 그것들은 예술로 자리매김한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 지금의 우리가 그것들을 예술로 자리매김 시켰다.


그러므로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이 "아우라가 사라졌음에도"가 아니라, "아우라가 사라졌기 때문에" 예술일 수 있는 것이다. 아우라가 있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이거나 혹은 다른 어떤 목적과 역할을 수행하는 무언가이다.


그러므로 벤야민이 말하는 '시공간성'을 단순히 물리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해선 안 된다. 그것은 가치 체계라는 맥락 안에서의 의미로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가령, 벤야민은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에는 그 시간 그 장소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식인데, 애초에 그 무언가를 느낀 건 그것들이 예술작품으로서가 아니라 벤야민 본인도 지적했듯 제의적이거나 혹은 다른 목적과 역할 아래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 무언가(=아우라)를 지금의 우리가 루브르에 가거나 시스티나 성당에 간다고 해서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이건 벤야민도 말하고자 했던 지점이다. 아우라를 느끼려면 그 작품과 내가 특정한 관계가 아니면 안 된다.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공동체성에 대한 문제다. 해당 작품과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닌 이상 아우라 따윈 요원하다.


그러므로 벤야민이 말했던 아우라가 사라진 예술(거듭 강조하건대 오직 그것만이 예술이지만)의 정치화란, 타자와의 조우에 대한 가능성으로 새로 읽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그것이 본래 위치지어졌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 추상공간에 걸려졌기에 우리가 그것에 대해 자유롭게 새롭게 생각할 수 있게 된 게 아닐까. 그러므로 이 자리야말로 벤야민의 새로운 출발점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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