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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Nov 04. 2022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본 사람의 최후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리뷰

내가 철학을 제대로 대중화하고 싶다고 마음 먹은 이유. 우리는 우리 시대가 보편이고 표준이라 생각한다. 우리의 생각·관습·윤리·제도·가치 등이 인간 본성이라 여긴다. 그러한 렌즈를 끼고 다른 사회와 과거 사회를 해석하고 평가한다. 그런데 실은 우리가 지금처럼 생활하고 생각한 것이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 우리의 모습은 대단히 일시적이고 특수하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의 포용력과 이해력이 넓어지고 관용과 다원화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보편이 아니라, 이 시대가 표준이 아니라, 수많은 것들 중에 원 오브 뎀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진짜 대화를 할 수 있다.


문제는 내가 그 생각의 극단에서 길을 잃은 지 10년쯤 됐다는 거다. 니체 식으로 말한다면 니힐리즘이지만, 사실 니힐리즘과는 결이 다르다. 니힐리즘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뒷걸음, 새로움을 창조하기 위한 파괴라면, 나는 그저 뒷걸음만 치고 파괴만 해버렸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무엇을 제시할지도 모른 채로. 이것은 나만의 문제는 아니고,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사상가들의 공통된 징후이기도 하다. 그것을 사상가들은 ‘부정신학’이라 부른다. 모든 것을 다 인정할 수 있기에 결국 아무 것도 인정하지 못하는 상태. 나는 그렇게 부정신학자가 되어 버렸다.


나는 진즉에 영화 속 조이처럼 돼 있었던 셈이다. 폭행이 범죄야? 그런데 폭행이 범죄가 아닌 사회도 있을 거야. 학력으로 인력을 채용해? 학력이 하나도 안 중요한 사회도 있을 거야. 걔가 바람 피웠다고? 근데 오히려 일부일처제가 이상한 세상도 있을 거야.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좋고 나쁜지, 어떤 게 우아하고 역겨운지에 대한 판단을 미묘하게 한 발짝 물러나 하게 된다. 모든 게 다 저마다 가치 있고 의미 있다고 겉으론 허허 웃으며 받아들이지만, 그 표정의 이면에서 나는 허무함을 느끼곤 했다. 이제 나는 무엇을 따르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왜 나는 여기 있나. 왜 나는 이렇게 사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나.


이제는 그만 부정신학을 극복하고 나만의 세계관을 정립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세계관이 남들도 납득할 수 있는 형태이고 싶었다. 영화 결말에서 에블린은 그런 나에게 소중한 답을 주었다. 조이가 묻는다. 엄마는 왜 엄마가 원하는 조이를 찾아 다른 세계로 가지 않고 계속 여기 남아서 나한테 잔소리나 하냐고. 엄마는 답한다. 엄마는 엄마가 원하는 ‘그런’ 조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바로 ‘너’를 사랑하는 거라고.


나는 이 대목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고유명’을 다시 떠올렸다. 공동체의 질서를 따르는 것은 가짜 윤리라던 칸트도 떠올랐다. 공동체를 벗어나 다른 공동체들 사이를 떠돌 때 진정한 윤리가 가능하다. 동일한 가치 체계 안에서, 다원화니 다문화주의니 하는 건 진정한 포용이 아니다. 다원화도 다문화주의도 공동체 내에서나 성립하는 이념이다. 다원화가 허무주의로 빠진다는 건 역시 다원화라는 생각이 공동체적인 발상임을 방증한다. 진정으로 공동체를 벗어나 본 자는 ‘다원화↔허무주의’라는 이항대립에 갇히지 않는다. 그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이다. 그가 바로 에블린이다.


모든 사회를 다 경험한 조이가 허무주의로 빠졌다는 건, 여전히 조이의 마음이 자기 시대를 향해 있었다는 방증이다. 돌과 같은 마음이 된 조이가 왜 자기 시대의 엄마에게 그토록 인정 받길 원했는지 생각해 본다면 이해될 것이다. 반면 똑같이 모든 사회를 다 겪어본 에블린이 눈앞의 조이를 사랑한다는 건, 에블린이 세상 그 어떤 가치 체계에도 구속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모든 세상을 다 경험해 봤으니 에블린에게는 이 세계나 저 세계나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에블린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모든 순간’이고 ‘지금 이곳’이 ‘모든 곳’이다.


현대 사상가들이 다원화와 부정신학 사이에서 길을 잃은 건, 그들이 여전히 ‘특수↔보편’이라는 이분법 속에서 사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2500년 서양철학의 역사였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철학이 아니다. 왜냐하면 특수와 보편이라는 개념틀은 공동체적 질서 내에 국한된 발상이기 때문이다. 공동체 밖으로 나가 전혀 다른 공동체들을 만난다면, 특수나 보편 같은 개념 무용지물이 돼버린다. 가령 지구인과 외계인을 아우르는 ‘보편’이 성립할까? 우리 우주와 다른 우주를 아우르는 ‘보편’은 어떤가? 인정한다 인정 못한다는 이분법도, 의미 있다 의미 없다라든가 가치 있다/없다 같은 이항대립도 공동체에 갇힌 사고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 또한 입으로는 다원화를 외치면서도 생각은 이 사회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조이가 에블린이 되려면 ‘목숨을 건 도약’을 해야 한다. 나는 도약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아니, 나는 목숨을 걸 준비가 돼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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