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은 행복의 이면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로 읽는 인간 마음의 구조
1. 타테마에와 혼네
고레에다 감독의 <괴물>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인간은 속마음을 솔직히 표현하지 못할까? 왜 무기노 미나토는 엄마에게조차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말하지 못할까? 막상 털어놓으면 별 거 아닌 일일 수도 있는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들을 혼자 속앓이 하다가 훗날 후회하나? 이에 대한 답은 각자들 알고 있을 것이기에 여기서 더 논의를 이어가진 않겠다.
오히려 위 질문들에는 다음과 같은 편견이 있는 거라고 지적하고 싶다. 숨기는 것은 진실이고, 겉으로 표현하는 것은 거짓이라는 고정관념. 하지만 이는 이분법적 편향이며 흑백논리다. 무기노 미나토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미나토가 반 아이들 앞에서 호시카와 요리를 괴롭히는 건, 아이들에게 놀림 당하고 따돌려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반면 요리와 단둘이 있을 때는 그에 대한 호감을 충분히 표현한다. 여기서 요리에게 하는 게 진실이고, 반 아이들에게 하는 건 거짓이라는 딱지는 한 면만을 본 해석이다.
미나토가 엄마에게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 또한 거짓이 아니다. 미나토는 엄마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다. 엄마에 대한 진심과 요리에 대하 진심이 다를 뿐이다. 영화 후반부, 교장의 말은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건 행복이라 부르지 않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걸 행복이라 부르는 거야." 미나토는 자신도 엄마도 요리도 반 친구들도 담임선생님도, 모두 행복한 선택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는 미나토만의 문제가 아니다. 요리도, 담임도, 교장도 그렇듯, 삶을 사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누군가 웃으면, 누군가는 운다. 모두가 웃을 수는 없을까.
2. 행복은 괴물의 이면
인간의 마음은 한 겹이 아니다. 무수한 겹의 중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패스트리 파이처럼. 왜냐하면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어떤 상황에 처할 때마다, 그에 맞는 마음으로 임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 그 마음들은 서로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 충돌점에서 우리는 각자 '괴물'이 된다. 미나토는 반 아이들과 엄마, 담임, 그리고 요리 사이에서. 교장은 가족과 학교 사이에서. 담임은 교실과 학교 사이에서, 그리고 학교와 학부모 사이에서. 누구에게는 '인간의 몸'을 보여주지만, 다른 누구에게는 '돼지의 뇌'를 보여줘야 한다. 그 지점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담임은 걸스바에 갔다는 오해를 사고, 죽은 손녀는 과자도둑이 되고, 요리는 이상한 병에 걸린 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 교장의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걸 행복이라 부르는 거야"라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모두가 다 같은 마음이면 된다는 걸까. 온 마을 사람이, 온 시민들이 하나의 마음으로 서로를 대한다면, 충돌하는 일 없이 모두가 행복할 수 있을까. 당연히 현실적으로 그럴 수가 없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그런 사회는 행복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의미와 가치 또한 그 교차점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같은 마음이 된다는 건, 온 세상이 100% 루틴화된다는 것이다. 완벽한 루틴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 가치를 주는 건 창발이고, 그 창발은 반드시 모종의 괴리와 우연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마음이 달라야만 우리는 거기서 새로움과 행복 또한 얻을 수 있다.
그러니 교장의 말은, 각자에겐 각자의 행복이 저마다 있으니 그 행복을 마음껏 누리라는 뜻일 테다. 그로부터 발생하는 갈등과 모순은 잠시 내버려두고 말이다. 그것이, 교장이 미나토에게 "그래, 거짓말을 한 거였구나" 하고 되뇐 이유이기도 하다.
3. 상대주의를 넘어
<괴물>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영화 <라쇼몽>이 떠오른다. 플롯이 흡사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건/사태를 3명의 관점으로 차례로 보여준다. 공통점만큼 차이점도 명확하다. <라쇼몽>은 끝까지 진실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세 사람의 관점이 수평적인 반면, <괴물>에서 세 사람의 관점은 수직상승적이다. 관점이 옮겨질수록 관객은 더 많은 진실을 알게 된다.
<라쇼몽>의 철학은 상대주의다. 그 끝은 회의주의다. 너도 옳고 나도 옳고 모두가 옳다는 말은, 모두가 틀렸다는 말과도 같다. 그때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야 할까. 너의 쪽으로? 나의 쪽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결말은 부정신학이었음을 우리는 이미 겪었다.
<괴물>은 거기서 더 나아간다. 어느 방향이든 상관 없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라고.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빗속일 수도, 또 빛 속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망설이지 않기를. 영화는 주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