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의 선택이 윤리의 기원이라면
20세기에 본인 철학책 제목에 ‘사랑’을 집어 넣어서 뭇 독자들을 고통에 빠뜨린 대죄인이 2명 있다. 한 명은 [사랑의 단상]을 쓴 롤랑 바르트. 다른 한 명은 오늘의 주인공인 [사랑의 기술]의 저자 에리히 프롬이다. 두 책 모두 사실은 철학책이며 흔히 생각하는 연인 간의 사랑을 주제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함정이 있다. 그나마 바르트 쪽은 에세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는 외계서이고, 프롬 쪽은 완연한 철학서이긴 하지만 읽히긴 한다는 데서 위안을 삼을 만하다.
[사랑의 기술]은 흔히 ‘사랑’ 하면 생각하는 그 남녀 간의 연애 감정을 부정적으로 본다. 그것이 저자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사랑, 즉 전 인류에 대한 보편적이고 평등한 사랑에 반대되는 성향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게 역사적으로는 근대 사회가 성장하면서 결혼 제도가 바뀌어 생긴 최근의 독특한 문화이기 때문이다. 프롬은 근대 사회를 병든 사회라고 생각하며 이 사회를 극복할 대안과 방향을 찾아 제시해 온 철학자다. 연인 간의 사랑은 그런 병든 사회가 빚어낸 부산물 정도이니 프롬이 그 사랑을 비판하는 건 일맥상통하는 논리다.
“본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는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다.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프롬은 책에서 사랑을 위와 같이 정의한다. 독자인 나는 저 정의를 ‘기만’이라 말하고 싶지만, 저자는 아마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잘못된’ 사랑의 정의를 ‘올바르게’ 정정하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어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저 정의에 어울리는 개념어는 ‘사랑’이 아니라 ‘윤리’라고 주장하겠다.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는 정확히 윤리의 정의에 부합한다. 책 전체를 통해 주구장창 제안하는 저자의 사랑이라는 개념도 실은 윤리에 거의 가깝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도 ‘사랑의 기술’이 아니라 ‘윤리의 기술’인 편이 더 적합하다.
'세상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를 사랑이라 부르든 윤리라 부르든 그 문제는 차치하고, 어쨌든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주장하는 사랑이란, 전 인류에 대한 희생적인 사랑이다. 물론 이때의 희생이란,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는 희생은 아니다. 프롬은 오히려 자신에 대한 사랑이 충만할 때 생산적인 희생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책에서 자기애, 형제애, 모성에, 신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며 자신의 메시지를 빌드업 한다. 그렇게 빌드업된 사랑의 형태는,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것이며,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것이고, 정체성으로서의 상태가 아니라 수행적인 '실천'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랑에는 끝없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며, 그것이 곧 사랑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사랑의 기술'이란, 연인 간의 로맨스를 매끄럽게 하기 위한 기술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는 모종의 문제점이 있으며,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프롬의 주장은 아름답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듣기 좋은 아름다운 교훈이 현실 가능한 경우는 드물다. 왜냐하면 프롬의 메시지는 특수한 개인들, 성직자나 윤리 의식이 뛰어난 일부 사람들을 향하는 게 아니라, 전 세계 인류를 향하기 때문이다. 현실에는 프롬의 사랑을 실천 중인 위대한 위인들이 분명 있다. 하지만 그들은 소수다. 절대다수의 사람은 프롬의 사랑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프롬의 사랑은 평범한 개인이 실천하기에는 고난도다.
프롬의 메시지는 당시로서는 철학자들의 패시브였던, 20세기 초 문화인류학의 이론을 토대로 한다. 대표적으로는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이 있다. 당시 학자들은 자본주의의 폭주를 막기 위해 다양한 방법론을 진지하게 모색했는데 그 중 많은 호응을 얻은 것이, 아직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원시 부족 사회의 특징을 찾아 그것을 유럽 사회에도 널리 퍼뜨리자는 것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호혜'적 관계였다. 자본주의 사회는 '교환'을 중심으로 성립된 사회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바로 '호혜'였던 것. 그 학제적 맥락에서 프롬 또한 받고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그저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 '호혜'를 통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을까.
[사랑의 기술]이 나온 1956년부터 지금까지, 프롬이 주장하는 사랑의 방법론은 현실에서 구현될 수 없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호혜는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본인의 자식만 사랑하지 다른 이의 자식들은 사랑하지 못한다. 모성애는 전 인류에 스프레드될 수 없다.
사랑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최고 레벨이 모성애라고 말하는 프롬의 포인트가 재밌다. 그 포인트란, 다른 모든 사랑이 합일을 지향할 때, 모성애만은 분리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어머니 사랑의 목표는 아이의 성장과 독립이다. 궁극적으로는 아이를 자신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해 전적으로 사랑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아이러니. 오직 주는 것만을 업으로 하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끝판왕이라는 것이다.
분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최고의 사랑이라면, 나는 그 대표적인 예로 애니메이션 <돌아가는 펭귄드럼>의 사랑을 꼽고 싶다. 매우 복잡한 작품이지만 꼭 필요한 내용만 간단 요약하자면 이렇다. 3남매 중 막내 동생이 죽을 병에 걸렸다. 그를 살리려면 일종의 마법을 써야 한다. 그 마법이란, "운명의 사과를 같이 나눠 먹"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마법을 쓰면 2개의 우주로 나뉘게 된다. 막내 동생만 있는 우주와 나머지 두 오빠만 있는 우주로(다른 변수는 모두 동일). 결국 마법을 실행하여 2개의 평행 우주로 나뉜다. 두 오빠는 막내의 존재를, 역시 막내는 두 오빠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채 각각의 우주에서 살게 되는 것으로 끝난다.
막내 동생을 아예 다른 우주로 분리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모성애보다도 더 가혹한 사랑이다. 이를 통해 두 오빠가 얻게 되는 것은 막내 동생의 목숨 말고는 없다. 그마저도 분리 시점 이후로는 인지조차 없어진다. 그걸 알면서도 오직 동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두 오빠는 결단을 내린다. 그렇다면 이 사랑이야말로 궁극적인 사랑의 형태 아닐까.
만약 두 오빠가 막내 동생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와 같은 사랑을 실천한다면, 에리히 프롬은 쌍따봉을 들어올리며 최고라고 치켜세울 것이다. 하지만 막내 동생을 살리기 위한 노력만으로도 두 오빠는 하루하루 필사적이다. 역시 그러한 사랑의 대상을 모든 이에게 확장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모성애와 비슷한 결의 또다른 사랑을 꼽자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아닐까. 나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하와와 아담이 사과를 먹을 줄 알았다고 생각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에게 생명뿐 아니라 삶까지 주려고 했던 거라고 말이다. 에덴에서 신과 함께 살아간다면 영원히 목숨은 부지할 수 있지만 제대로 된 삶은 영위할 수 없다. 그저 신의 인형으로서 존재할 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 그들 스스로 독립적인 삶의 영역을 꾸리도록 했던 것이라 믿고 싶다. 전지전능하다면 모를 수 없기에. 어떤 비극이든 어떤 희극이든 모두 아담과 하와의 몫으로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에 대해 아담과 하와 또한 하나님에게 사랑으로 보답하면 베스트겠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든 안 하든 그것조차도 하나님은 그들 각자 자유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신은 아담과 하와뿐 아니라 모든 인류를 그렇게 대한다. 그것이 바로 신의 사랑이자, 신의 윤리다. 그런데 역으로 생각하면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은 인간의 사랑일 수 없다. 분리를 지향하는 사랑은 인간의 레벨이 아니다.
다시 중간 정리를 하자면, <돌아가는 펭귄드럼>과 하나님의 사과를 통해 말하고 싶은 점은, 에리히 프롬이 최고라고 말한, 분리를 지향하는 사랑(=보답을 전혀 바라지 않는 사랑)은 분명 아름답고 숭고하지만, 그것을 현실의 인간이 실천하기에는 너무 레벨이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롬의 주장은 의미 있는 제안이기는 하지만, 비현실적인 캠페인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세상의 문제를 파악하고 그것의 해결책을 모색하고 시도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 대한 사랑이고, 그것이 곧 윤리적인 태도라는 에리히 프롬의 사랑관과 윤리관에는 동의한다. 다만 나는 그 방법론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하기 싫은 것, 하기 힘든 것, 할 수 없는 것, 해야만 하는 것을 모든 인류에게 강요하는 윤리관이야말로 사디스틱한 것 아닐까. 나는 탁상공론이 아닌, 진짜 현실의 인간들이 실천할 수 있는 윤리를 모색하고 싶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인간의 윤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신이 아니라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걸까. 내가 기독교인이라면 오히려 아담과 하와에게 큰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들이 사과를 나눠먹었기에 나는 이 지구에서 내 삶을 영위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듣고 지금까지도 사과를 먹지 않았다면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혹은 어찌어찌 태어났더라도 에덴에서 하나님의 인형으로 살았을 터. 그러므로 나에게 생과 삶을 준 것은 신의 숨결이 아니라 그들의 원죄다. 그 둘은 사과를 나눠 먹음으로써 에덴이 아닌 지구라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 것이다.
'사과를 먹지 말라'는 것은 금기다. 그럼에도 금기를 깨고 그 사과를 먹고 싶어 하는 것은 욕망이다. 욕망을 억제하고 금기를 지키기는 어렵지만, 금기를 깨고 욕망을 충족하기는 쉽다. 아담과 하와가 어렵게 금기를 지켰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 잘 듣는 펫으로서 에덴에서의 삶을 누릴 수 있었겠지만, 반대로 욕망에 충실했기에 새 삶을 얻고 그 후손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삶을 선사할 수 있었다.
현 상태를 극복하려면 현재와 달라져야 한다. 변화는 필수다. 시도가 변화를 불러일으키려면 기존의 시스템을 벗어나야 한다. 즉, 금기를 어겨야 한다. 금기를 어긴다는 것은 기존의 규범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며 곧 일탈을 의미한다. 그 사회의 시스템에 포섭되지 않는 하나의 지점을 새롭게 점유한다는 뜻이다. 물론 대부분은 실패하고 그 일탈은 평판과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처벌받을 것이다. 하지만 간혹 성공한다면, 그 지점을 포섭하는 형태로 사회 구조는 변할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듯이, 각자가 하고 싶은 것, 하기 쉬운 것, 할 수 있는 것을 윤리의 또다른 방법론으로 제안한다면 어떨까. 심지어 그 욕망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라면.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하려면 지금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기에. 변화에 대한 시도야말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첫 번째 열쇠일 것이다.
다만, 그 시도가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예단할 수 없다. 다만 시도하는 것밖에는. 시도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게다가 그 시도가 각자의 욕망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그 시도는 몇 번이고 반복 가능할 것이다. 억지로 해내야 하는 실천이라면 금방 포기하게 될 테지만, 하고 싶은 행동이라면 얼마든지 할 테니까. 그러다 실패하면 개인은 그에 따른 책임을, 사회는 그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면 된다.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한 적어도 우리 사회가 고인물이 되지는 않을 터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아담과 하와의 선택이야말로 인간 사랑(=윤리)의 기원이 아닐까. 하와는 사과 먹기가 '금기'임을 알았음에도 아담에게 권했다. 아담 또한 금기임을 알았음에도 하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둘은 함께 '운명의 사과를 같이 나눠 먹'은 것이다. 그로써 인간 세상이 시작됐으니, 금기된 무언가를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윤리의 기원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나는 지금 이 세상이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그래서 대단한 건 아니지만, 아주 작은 실천부터 해보려 해. 그런데 그 실천은 우리 사회가 문화적으로 금기시하는 것이야. 그럼에도 나와 함께 그 금기를 어겨 보지 않을래?'
금기된 사과를 함께 나눠 먹는 것. 그 운명을 함께 하는 것. 그것을 앞으로 우리들이 나아갈 사랑으로 제안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