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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May 04. 2016

로봇, 인간의 조건을 말하다

[에이.아이.]의 마지막 장면을 위한 변론


영화 <에이아이>는 개봉 당시 많은 이들의 비판을 받으며 심지어 흥행에도 실패했다. 다행히 몇 년이 지나 조금씩 재평가 받으며 현재는 나름 명작(!)의 반열에 올라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이 지나  데이빗이 엄마를 만나는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만의 의사를 가진 이들이 많은 듯하다.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 그 장면에서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건 지금까지 몇 번을 다시 봐도 마찬가지다. 그 감동의 이유를 추적하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변호하는 것이 글의 목적이다. 물론 이미 이동진을 비롯한 몇몇 평자들이 멋진 옹호를 했지만, 나는 좀 더 영화 자체의 내적 접근을 통해 그 장면이 이야기 구조상 꼭 필요했음을 어필하고 싶다.

    

<에이.아이.>의 스토리와 주제 의식은 상당히 친절할 정도로 단순하다. 초반 세미나 장면에서 여교수가 하비 교수에게 질문을 던진다. 만약 기계가 인간을 조건없이 사랑한다면, 인간은 기계에게 어떤 윤리적 책임을 가져야 하냐고. 그때 하비 교수는, 신도 자신을 사랑할 존재로서 인간을 만든 거라며 일축한다. 이후 주인공인 꼬마 메카 데이빗이 등장하고, 영화는 데이빗의 인간 되기 여정을 그린다.

    

영화는, 기계를 대하는 인간의 윤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보다는, 데이빗이 인간이 될 수 있는가에 대부분의 비중을 할애한다. 엄마 모니카가 데이빗을 버린 것이나 기계를 파괴하는 플래시 페어에 대한 책임 추궁은 영화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그 두 사건은 데이빗의 인간 되기 여정의 시작과 과정을 위한 사건·사고에 불과할 뿐 심각한 의미로 전화하지 못한다. 따라서 감독의 의도는, 인간의 윤리적 책임으로 영화를 봐달라는 것은 아닐 터이다.

    

데이빗의 소원 성취(인간이 되어 엄마의 사랑을 받는 것)가 가능한가 하는 데 초점이 맞줘져 있는 만큼, 영화를 ‘인간의 조건’이라는 키워드로 읽는 것이 보편적인 독법일 것이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데이빗을 인간으로 봐주길 바라는 듯하다. 감정을 느끼고, 욕구를 가졌고, 허구를 상상하며, 자의식까지 지닌 존재인 데이빗을, 하비 박사는 그 자체로 이미 인간이라고 말한다. 여정을 통해 데이빗이 획득한 어떠한 속성들이 인간의 조건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나는 ‘인간의 조건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스필버그의 궁극적인 답변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기계 공학이 발달해 로봇이 일상화된 영화의 시대배경 설명부터 데이빗의 등장, 유기 장면까지가 첫째. 플래시 페어에 납치 당한 후 풀려나고 루즈 시티를 지나 맨하튼까지의 여정을 그린 과정이 둘째. 그리고 논쟁의 대상이기도 한 셋째가 2000여 년 뒤 새로운 기계들에 의해 깨어난 이후의 장면이다.

    

엄마에 대한 데이빗의 사랑은 맹목적이다. 그런데 데이빗은 자신이 엄마를 사랑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자신이 그런 것처럼 엄마도 자신을 사랑해 주기 바란다. 그래서 데이빗은 항상 불안하다. 현재 자신에 대한 엄마의 사랑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째 장면에서 데이빗의 좌충우돌(음식을 먹는 사건, 엄마 머리카락을 자르는 사건, 마틴을 물에 빠뜨리는 사건 등)은 현재 상황에 대한 불만족의 결과이다. 데이빗은 미래가 현재보다 나을 것이라 상상한다. 자신이 어떤 행동이나 노력을 하면 엄마가 분명 자신을 사랑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데이빗은 언젠가 엄마의 사랑을 받는 날을 꿈꾸며 현재를 견딘다. 하지만 꿈의 실현은 매일 지연되며 결국 데이빗은 엄마에게 버림 받는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되기 위한 첫째 조건이다.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결국 좌절된다. 인간의 궁극적인 꿈은 한낱 개인의 노력 따위로 성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꿈이 있지만 그것이 실현되지 않았기에 현재는 늘 불만족스럽고, 따라서 시선은 항상 미래의 어느 시점을 향한다. 그 미래에 대한 신뢰가 불안한 오늘을 견디고 살아가는 동력이 된다.

    

플래시 페어를 탈출하여 루즈 시티에 가고, 다시 맨하튼으로 향하는 여정인 둘째 장면은 꿈을 성취하기 위해 끝없이 달려드는 인생의 본편에 대한 비유쯤 되겠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은, 데이빗의 꿈인 엄마의 사랑은 처음부터 맹목적이었다는 점이다. 데이빗이 꼭 그 꿈을 성취해야 할 합당한 이유는 없다. 다만 그렇게 프로그램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 또한 마찬가지이다. 전 세계 74억의 인구는 그들 각자 삶의 목표가 있겠지만, 그들이 왜 꼭 그 목표에 도달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연유는 부재하다. 우연한 계기에 의해 사람들은 어떠한 꿈에 이끌리게 될 뿐이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인간은 자신의 삶을 다 바쳐 꿈에 매진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데이빗의 맹목적 구애에 감동을 받는 한편, 왜 꼭 저래야 하나 싶은 생각에 안타까움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제3자가 우리의 삶을 통째로 관람한다면 그보다 더 안타깝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그렇게 온 삶을 다 바쳐도 끝내 꿈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생은 항상 불만족스럽고 그렇기 때문에 미래를 기대하지만 꿈은 항상 연기된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하지만 세월이 지나 삶을 마감하는 그 날까지 꿈은 결코 현재의 시점으로 건너오지 않는다. 아무리 간절하고 애절하게 기도하고 염원해도 말이다. 데이빗은 맨하튼 바다의 밑바닥 헬기 안에서 2000년 동안 빌지만,엄마의 사랑은커녕 엄마를 다시 만나지도 못한다.

    

그런데, 많은 평자들의 지적처럼 영화가 여기서 끝났다면, <에이.아이.>는 단순히 삶에 대한 비관으로 끝나고 만다. 삶에 대한 허무주의가 영화의 주제가 될 것이고, 거창하게 말하면 니힐리즘적 세계관쯤 되겠다(그리고 그것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장점이기도 하다). 물론 그 자체로서도 완결된 영화가 됐겠지만, 그렇다면 영화는 인간의 삶에 대한 반쪽짜리 성찰 밖에 되지 않는다. 정말 인간은 삶에서 패배한 채 생을 마감하는가. 물론 현실적으로는 그렇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행복을 맛보지 못한 채 죽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완벽한 삶은 절대 죽기 전에 도래하지 않는다. 우리는 끝없이 현실을 부정하며 미래만을 기다리다,그 기다림의 도중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것이 인간의 삶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라면 인류가 몇 천 년 동안 이루어온, 문명이라는 허구적 상상은 간과된다.

    

영화는 거기서 더 나아간다. 외계인을 닮은 새로운 메카가 데이빗을 구하고, 결국 그의 소원을 하루 동안 들어준다. 그리고 데이빗은 행복 속에서 영원한 잠에 빠져든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우선, 외계인이 아닌 또 다른 로봇이 데이빗을 구원한다는 점이다(다른 하나는 소원이 단 하루만 성취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아래에서 말하겠다). 그 존재가 외계인이었다면 정말 김이 새는 결말이었을 것이다. 완벽한 외부 세계의 제3자가 데이빗의 꿈을 실현시켜 준다는 설정은 데이빗의 노력을 거의 제로(0) 수준으로 무시할 만큼 소극적으로 만든다. 외계인이 아니라 로봇인 이유는,그들을 인류 문명의 미래로 보아 달라는 의도일 것이다. 인류는 비록 멸종했지만 인류의 노력은 그들의 사후에 로봇 사회라는 전혀 새로운 시대를 연다. 그들이 데이빗을 돕는다는 설정은, 개인의 노력으로는 꿈을 실현할 수 없지만, 인류 전체의 노력으로 일군 문명은 간접적으로 개인을 원조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운명’이라는 실체를 실감할 수 있다. 개인의 노력으로는 되지 않지만 역사적·사회적 맥락의 연장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인다. 영화 속 데이빗 또한 마찬가지다. 데이빗은 자신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하게 된다. 인간이란, 개인이 어쩔 수 없는 운명에 휩쓸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둘째 조건일 것이다.

    

굳이 조지프 캠벨의 영웅신화이론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에이아이의 플롯은 기존의 수많은 신화와 동화의 구성을 동어반복하고 있다. 유사하게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접목해도 좋을 것이고 인어공주 이야기로 접근해도 적절하다. 비극적 운명을 살아간 오이디푸스 신화가 아직까지 회자되는 이유와, 인어공주의 원작보다 이후 각색된 인어공주 동화가 더 인기 있는 이유 또한 같은 선상에 있다. 오이디푸스가 간절히 원해도 벗어날 수 없는 삶. 그리고 인어공주가 평생의 고통을 감내하며 애절하게 빌었던 소원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거품으로 사라진 것. 그것이 운명이다. 그 운명이란 역사적·사회적·문화적 산물의 굴레다.

    

그렇다면 왜 이미 몇 천 년 전부터 회자되어온 이야기를, 감독은 영화를 통해 또 하는 것일까. 차이점은 둘이다. 하나는, 주인공이 로봇 기계라는 점.나머지 하나는 주인공이 이번에는 소원성취를 했다는 점이다. 주인공이 로봇인 점은, 자연발생적 존재가 아닌 인공적 존재도 인간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해서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둘째 지점인, 주인공의 소원성취 방식이다.

    

데이빗의 꿈은 실질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들에 의해 단 하루 동안 가상적으로 성취된다. 데이빗의 꿈은 결코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처음부터 데이빗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환상이기 때문이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꿈꾸는 행복은 객관적 실체를 가지고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우리는 행복이 지구 어딘가에 실재할 거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지만 그것은 허구일 뿐이다. 따라서 그 허상의 꿈을 이룰 방법 또한 상상적인 형태일 수밖에 없다. 영화의 결말이 비유하는 것이 그것이다.

    

실제 우주는 하나이지만, 사회 속 우주는 인류의 수만큼 존재한다. 우리는 각자 저마다의 세계와 꿈과 사랑과 행복을 머릿속에 지닌다.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삶 또한 저마다의 길이 된다. 그 길이 각각의 씨줄과 날줄이 되어 사회를 만들고 시간이 지나 역사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운명이 되어 현재를 살아가는 인류와 미래에 태어날 인간들을 둘러싼다. 그 속에서 문명이 이루어지고 가치 체계가 만들어진다. 그러한 인류의 문화 체계에 포섭되는 것이야말로, 감독이 말하는 인간의 마지막 조건일 것이다. 데이빗은 영화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관을 완성했고, 그것은 미래의 인류(얼음에서 녹은 자신을 포함한 새로운 메카들)를 운명의 실타래 속에 묶어내는 역할에 일임한다. 그 혼돈의 실타래 속 실 하나를 만드는 일. 그것이 곧 인간의 삶이다.

    

인간이 태어나 꿈을 꾸고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삶은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지만, 그 개개인의 삶이 만들어낸 부수적 결과물들은 사회적인 차원의 것이 된다. 그 속에서 인간은 각자의 환상 속에서 꿈의 성취를 맛본다. 그러한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우화적으로 보여준 영화가 <에이.아이.>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개인적인 삶이 어떻게 사회와 문명으로 전화하고, 그 속에서 개인은 어떻게 자신의 은밀한 꿈을 성취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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