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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Jun 09. 2016

그 사랑, 동의할 수 없지만 눈시리게 아름답다

영화 [천년학]에 대한 양가적 감정

영화 [천년학]은 솔직히 감독과 그 주제의식에 대해 비판하고 싶은 마음이 더 드는 작품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이 작품에 충분히 감동 받았다. 서편제 아류라거나, 보는 내내 너무 지루해서 졸았다는 대중의 반응에 반해, 나는 전체적으로 인상 깊게 보았고, 몇몇 장면에서는 찔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래서 1차적으로 그 감동의 연원을 따라간 뒤 비판적인 지점을 견지하려 한다.(진정한 사랑은 항상 좋음과 미움이 함께 하는 양가적인 상태라고 믿는다^^) 이 글의 주요 목적은 영화의 감동이 어디서 오는지, 그리고 그 영화적 전략이 유효한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천년학]이 [서편제]와 다른 지점은, 두 남매 사이에 사랑이 끼어든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부수적인 요인이 아니라, 영화를 끝까지 몰고 가는 핵심 변수이자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라는 점이 중요하다. 동호와 송화는 분명 서로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을 상대에게 전혀 표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서로를 남매로 맺어버린 아버지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송화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동호를 남동생으로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이 그녀를 억누른다. 동호 또한 마찬가지다. 누나로서, 소리꾼으로서 송화를 대우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엄명이 그를 막아선다.


아버지의 억압에 대한 반작용 때문일까. 동호는 아버지를 의심한다. 아버지가 송화의 눈을 멀게 한 이유를 실수도, 예술혼을 위한 목적도 아닌, 늙은 남자가 어린 여자를 탐하려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에는 그럴 듯한 증거 장면이 제시되기는 한다. 어린 시절 송화는 밤에 이불 속에서 동호와 발을 비비면서도 얼굴은 아버지를 보고 소짹새 노래를 부른다.(허리 아래는 몸 사랑, 허리 위는 마음 사랑을 뜻하는 것일까) 송화가 성인이 된 후 나이 70 된 백사의 소실이 되어 그의 품에 안겨 똑같이 소쩍새 노래를 부른다. 이것은 1차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송화의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겠지만, 단순히 그것뿐이라고 보기엔 미심쩍게 여겨진다. 하지만 영화는 아버지와 송화의 심적 관계에 관심이 없는지 그 이상의 장면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본격적으로 동호와 송화의 사랑에 주목하자. 이미 자유연애가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영화를 보고 그들의 사랑에 동의하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 동호는 끝없이 송화를 찾아다니면서도, 정작 만나고나면 금세 헤어질까. 어째서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는 걸까. 특히 (결과적으로) 마지막 만남이 된 제주에서 송화가 동호와 같이 살림을 차리고 싶어하는 마음을 은밀하게 비쳤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내일 당장 중동으로 간다고 한 동호의 마음은 무엇에 연유하는가. 지구가 태양을 맴돌듯 다가가지 않고 서성거리기만 하는 동호의 사랑으로부터 이해도 감동도 느낄 수 없다.


만약 이 이야기를 소설의 형태로 읽었다면 감동은커녕 답답증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영화라는 매체로 접했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에서 큰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책이 아닌 영화가 줄 수 있는 것은 소리와 영상미이다. 좋은 영화는 '무엇'을 보여주냐보다 '어떻게' 보여주냐가 관건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무엇'인 동호의 사랑 방식은 결코 동의할 수 없지만, 그 사랑을 보여주는 영화의 연출에는 기꺼이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어설펐던 동호의 북소리와 모양새가 점점 무르익어 가는 장면은 그만큼 더 커져가는 사랑과 그리움의 마음과 맞물린다. 영화가 끝을 향해 달릴수록 동호의 북소리는 점점 능숙해진다. 반면 송화의 경우는 영화 내내 이미 원숙한 소리 솜씨를 들려준다. 동호의 북장단이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즈음 송화가 목소리를 잃는 것은 운명처럼 비켜가는 그들의 사랑과 닮았다.


영화의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는 판소리 장면과 음향은 듣는 이의 귀와 눈을 계속해서 스크린을 향하도록 붙잡아두는 몰입의 역할을 해낸다. 심지어 나는 판소리를 전혀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송화의 소리에서 느껴지는 삶에 대한 짙은 페이소스에 마음이 움직였다. 장흥의 선학동에서 포구의 바다와 섬이 주막 뒤로 모습을 비칠 때. 백사의 집에서 그의 임종 직전, 벚나무와 흩날리는 꽃잎이 방문 바깥을 가득 메울 때. 제주에서 나무와 갈대가 우거진 용눈이오름을 햇살이 눈부시게 비출 때. 그때마다 어우러지는 소리 장면은 음향의 감성을 영상이 그대로 이어받아 삶과 예술에 대한 극대화된 감동을 연출한다.


그런 장면과 시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극 중에서는 송화의 예술적 성취, 마지막 장면에서는 동호의 예술적 성취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개인적 원숙미를 능가하게 만드는 동인으로서의 사랑을, 어떻게 수긍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나는 그런 사랑을 할 마음도 엄두도 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그 사랑을 행하고, 사랑의 끝에서 뛰어난 예술적 성취를 보인다면, 곁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즐거움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물론 그 즐거움은 잔인한 감정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년학]이 못내 아쉬운 이유는, 동호의 사랑과 예술적 성취의 이면에 아버지의 명령이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동호는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한다. 동호가 단 한 번도 송화에게 사랑을 말하지 않은 이유. 마지막에 아버지의 유품인 북을 건내받은 이유도 결국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송화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가 소리를 하는 이유도 아버지의 뜻 때문이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그 돈으로 아버지 묫자리를 쓰는 것이 목표였던 송화다. 그리고 목소리를 잃고 결국 소식을 감춘 그녀다. 동호와 송화의 삶과 예술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아버지를 위한, 또는 아버지에 향한 것이다. 유봉은 죽어서도 자식들의 삶과 예술을 관장한다.


그러한 아버지의 속성을 우리 세대는 '꼰대'라고 한다. 그리고 그 꼰대적 기질을 임권택 감독 또한 어느 정도 지니고 있는 듯 보인다. 영화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영화를 통해 관객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미묘하게 그 성격이 느껴진다. [천년학]을 이해 못하는 대중들에 대해 그가 토로하는 안타까움의 감정. 하지만 관객은 이제 꼰대로부터 벗어나려 하거나 이미 벗어나 있다. 임권택 감독이, 자식들의 자유로운 사랑과 삶을 인정하는 품이 넓은 아버지 마음이 되지 않는 이상, 그의 영화와 관객 사이는 계속 불통으로 남을지 모를 일이다. 동호와 송화의 엇갈린 사랑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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