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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Dec 30. 2016

시를 쓴다는 것의 의미

먹고 보고 사랑하고 잠드는 것

"여러분은 그동안 사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유치원생 때나 초등 저학년 때 미술학원에서 나뭇잎을 그렸던 적이 있다. 나는 무심코 약간 길쭉한 타원을 하나 그린 후 가운데 선을 긋고, 선을 기준으로 양쪽으로 빗금을 그렸다. 결과는? 당연히 혼났다. 나뭇잎을 제대로 보고 그린 게 맞냐는 거였다. 포도를 그릴 때는 그냥 동그라미만 마구 그렸던 기억도 난다. 나는 관찰하지 않고 내 마음 속의 상을 더듬으며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 속의 상과 실제 사물의 이미지가 일치할까.

 

일상생활에서는 어떤가. 하루 8시간 잠잔다고 치면 적어도 16시간은 깨어있는 셈이다. 오늘 지하철에서 내 앞에 서 있던 남자의 얼굴이 기억나는가. 혹은 버스 외벽에 씌워져 있던 광고 문구는. 내 방 벽지 모양은 그릴 수 있겠는가. 아니, 멀리 갈 것도 없다. 오늘 아침 집을 나서기 전 엄마가 했던 말은 기억하는가. 눈을 떠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항상 귀가 열려 있어도 정확히 듣지 않는다. 영어로 치면 look과 listen이 아닌 see와 hear의 삶이 어느새 내 일상을 게을리 자리하고 있다.

 

영화에 나오는 종욱은 영락없는 우리 삶에 대한 풍자로 보인다. 학교(또는 직장) 갔다 오면 대충 씻고 누워서 과자 먹으며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보다가, 가족이 뭐라고 대꾸하면 응, 응, 하면서 대충 흘려듣고. 졸리면 자고 아침이 되면 일어나 씻고 밥 먹고 또 학교(또는 직장)에 가는 생활. 어쩌면 매일 반복되는 자극이라 새로울 것도 놀라울 것도, 감동적일 것도 없기 때문이리라. 그러면서도 불평투성이다. 매일 쳇바퀴 돌아가는 반복되는 삶이 너무 지겹다고. 이렇게 살다가 죽을 건가, 라고.

 

미자는 60살 넘어 처음으로 시를 쓰려 한다. 시인인 선생님은 사물을 오래 관찰하라거나, 기다리지 말고 열심히 찾아다니면 시심이 내린다고 말해주지만. 미자는 도무지 시가 써지지 않는다. 아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막막하다. 시낭독회를 찾아다니며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해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손자의 범죄 사실을 듣는다. 하지만 정작 손자는, 어마무시한 일을 저질러 놓고 집에서 아무런 티도 안 낸다. 허나 이보다 더 특이한 건, 가해자 학부모와의 모임에서 미자 또한 매번 모임에 집중하지 못하고 딴짓에 열중이라는 점이다. 꽃을 보고 메모하고, 새소리를 듣고 나무를 올려다보는 등 다른 곳에 신경이 집중돼 있다. 합의를 위해서 500만원을 구해야 함에도. 피해자 엄마를 만나 사과 한 마디라도 진정성 있게 전해야 할 때에도. 미자는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었을까.

 

등장인물을 세 유형으로 나누면, 가해자 종욱, 가해 학생들의 아빠들, 그리고 종욱의 할머니 미자로 구분 지을 수 있다. 자신의 일에 전혀 책임감도 느끼지 못하고 책임질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이는 종욱. 자식의 죄를 합의로 매듭 지으려는 가해자의 아빠들. 손자를 제대로 관리하지도 못하고, 가해 학부모들과 어울리지도 못하는 미자. 일상의 눈으로 본다면, 솔직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빠들과 비슷할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사회적 법적 책임을 지고 사건을 마무리하려 한다는 측면에서 보편적인 삶의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그들 또한 윤리적 책임감이 없다는 차원에서는 종욱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다만 돈으로 사태를 수습하고 자식의 범죄가 알려지지 않게 막으려는 생각뿐이다.

 

일상의 눈으로 미자를 보면, 그는 매우 이상하다. 하지만 관객으로서 우리의 눈은 그의 행동이 무척 자연스럽고 절실하며, 그래서 가장 바람직한(?) 인물로 비친다. 오히려 가해 학생의 아빠들이 속물적이고 비양심적으로 느껴진다(그럼에도 분명 영화 밖에서의 나는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일 것이다).

 

미자는 죽은 여학생의 루틴을 매일 조금씩 그대로 따라가 본다. '따라간다'보다 '따라가 본다'가 더 정확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미자는 모든 사물을 '본다'. 학교를 방문하고. 학교 운동장을 천천히 바라보고, 과학실까지 찾아간다. 여학생이 다니는 성당에도 방문하고, 집과 밭에도 들른다. 그리고 여학생이 뛰어내린 강에도 다녀온다. 그 무심한 듯 느린 여정을 통해 미자는 피해 여학생의 삶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려 한다. 미자가 이 사건을 처음 들었을 때 취한 행동이, 손자 종욱에게 여학생의 이름을 묻는 것이었다. 평소에 어떤 아이였는지 미자는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 관심 반 죄의식 반의 마음으로 미자는 여학생의 지난 삶을 조급하지 않고 천천히 둘러본다. 그렇다고 여학생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의 삶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님에도.

 

미자는 처음에 시라는 것은, 아름다운 단어로 아름다운 세상을 노래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듯하다. 미자는 시낭독회에서 음탕한 농담이나 지껄이는 형사를 저질이라 여긴다. 아름답고 성스러워야 할 시낭송회에서 그는 추하고 속된 말만 자꾸 한다. 그런데, 시란 과연 아름다운 것인가. 삶은 어떤가. 미자는 늘 자신의 외모를 예쁘게 치장하고 다니며, 자신이 아름답다는 말을 들으면 어린아이처럼 좋아라 한다. 마치 자신의 일상이, 삶이, 예쁘고 아름답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렇기에 미자가 맨 처음 시를 쓰려고 한 이유는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엄마가 시 쓰는 것과 어울린다는 딸의 통화에 "그래 맞아. 내가 꽃이랑 나비 같은 거 좋아하잖아."라고 미자가 답하는 것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삶은 아름다운 것이란 생각. 늘 아름답게 치장하고 다니는 자신은 그러한 삶에 충실하다는 믿음. 황혼의 삶에 확실한 마무리를 점하는 것이(화룡정점) 시를 쓰는 것이란 발상.

 

하지만 정작 미자가 시를 쓰는 과정은, 삶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 특히 자신의 삶은 더욱 그랬다는 것. 그렇기에 삶을 제대로 살아오지 않았음을 깨닫는 과정이었다. 친근하다 생각했던 딸에게, 정작 고민거리 하나 털어놓을 수 없고(치매와 종욱의 범죄), 잘 키워왔다고 여겼던 손자에 대해서는 하나도 제대로 아는 게 없다. 그래서 미자는 자기 주위를 하나하나 처음부터 차근차근 살펴본다. 시를 쓰겠다는 일념 하에.

 

자신이 그동안 잘못 살아왔다면, 지금이라도 그 삶을 바로 잡는 것, 지난 잘못된 삶을 책임지는 것이 곧 제대로 된 삶임을, 미자는 종욱의 범죄를 천천히 뒤쫓으며 깨닫는다. 피해 학생의 죽음이, 당연히 1차적으로는 가해 학생들의 잘못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보호자인 자신에게도 있음을 말이다.

 

그래서 미자는 자신도 피해 여학생과 똑같은 일을 당함으로써 손자에 대한 책임을 대신하려 한다. 먼저, 아르바이트로 돌보던 중풍 할아버지 강 노인에게 몸을 허락한다. 물론 그 빌미로 합의금 500만원을 얻으려는 계산이었겠지만, 본질은 미자의 속죄가 우선이다. 똑같이 남성 타자에게 자신의 신체가 범해짐으로써만이 그 죗값을 치를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을 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것이 미자가 도달한 정당한 처벌이고 아름다운 삶이었던 듯하다.

 

평소 저질이라 여겼던 형사에게 손자의 범죄를 신고하여 직접 체포하게 하는 지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결국 삶에 대한 정확한 통찰을 지녔던 이는 그 형사였던 셈이다. 삶은 아름답기만 한 것도 아니며, 적당히 추잡하고 저속하다는 걸 그는 자신의 언어로 유쾌하게 표출할 줄 안다. 미자 또한 시 쓰는 과정에서, 종욱의 잘못을 속죄하며 표면적으로 아름다운 삶이 아닌 근본적으로 충실한 삶으로 나아간다.

 

미자는 마지막 시 강좌가 있는 날에 시 한 편을 다 쓰고 피해학생의 뒤를 따른다. 산다는 건 다만 세계를 감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미자는 세상에 직접 다가섬으로써 깨달았다. 보는 것만으로는 대상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세상을 느낀다는 건 단순히 보는 게 아니라 몸으로 직접 부딪혀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시를 쓴다는 건 결국 삶을 살아가는 것과 동일하다.

 

미자는 자신에게 무책임하게 던져진 고통을 보고, 몸으로 맞섬으로써 책임을 져냈다. 산다는 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걸 담담히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책임지는 것. 미자의 마지막 삶이 곧 그녀가 쓴 시 한 편이다. 시 쓰기가 어렵듯 삶도 어렵다. 그래서 윤동주는 말했던 것일까. 시가 쉽게 쓰여지는 게 부끄럽다고. 그 말은 곧 삶을 쉽게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부끄러운 일이라는 말일 테다.

 

종욱도 마지막엔 자신의 체포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할머니 없는 세상에서 이제 그는 온전히 자신의 삶을 부딪혀 낼 수 있을까. 부디 그러길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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