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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Jan 13. 2017

하늘과 별과 바람과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보드리야르의 세상에 고독한 현대인을 치유하는 라캉 의사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길>, 윤동주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아니, 고쳐 쓰자. 종종 그럴 때가 있다. 꽉 찬 것만 같던 삶이 뭔가 비어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다 조립한 레고 완성품에 블록 하나가 빠진 것처럼. 직소 퍼즐을 다 맞췄는데 딱 한 조각이 없는 허전함. 어디 있지. 어디서 잃어버렸지. 이상하다. 분명히 다 정리해 놓았는데. 어디에서 빠뜨릴 턱이 없는데. 그런데 그런 결핍감은 나만 느끼는 게 아니었다. 100년 전 윤동주 시인도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잃어버렸는데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른다. 무엇인지 모르니 당연히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도 알 길이 없다. 그래서 계속 그걸 찾아다닌다. 그 찾음의 연속이 곧 삶이라고, 윤동주는 말한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花壇)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ㅡ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 <병원>, 윤동주



이번엔 한술 더 뜬다. 무엇을 잃은 정도가 아니라, 병에 걸렸다. 아프긴 한데 어디가 아픈지도 모른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내게 병이 없단다. 그럼에도 나는 분명 병기(病氣)를 느낀다. 그래서 오히려 확실한 병을 진단받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그녀를 부러워한다. 나는 분명히 아픈데, 나를 비롯한 그 누구도 그 아픔의 정체를, 그래서 그 원인을 알지 못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개인이 느끼는 이유 모를 고독함과 외로움, 아픔과 고통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개인이라는 관념이 형성되면서부터, 개인의 자유와 책임이라는 개념이 생기면서부터,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독립된 '나‘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 독립적인 나는, 세상 누구와도 다른, 독특하고 고유한 유일한 존재임을 인식한다. 동시에 섬처럼 외떨어진 고립감도 함께 앓는다. 아마도 한국의 역사에서 윤동주 이전 세대는 위와 같은 감상을 명확하게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윤동주 세대는 역사적으로 거의 처음으로 세상에 의지할 수 없는 철저한 고독을 맛본 1세대일 것이다. 그 감각은 세월이 흘러 우리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우리들 또한 그 고독감의 정체와 근원을 알 길이 없다는 점에서는 한치 앞도 나아지지 못했다.


한국과 가까운 나라 일본의 21세기에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아다니는 애니메이션 감독이 있다. 신카이 마코토. 그는 이미 [초속 5센티미터]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무원의 고독감을 아주 낭만적이지만 서늘하고 현실적으로 그린 바 있다. [초속 5센티미터]는 현대인이 느끼는 고독의 원인을 첫사랑의 상실에서 찾는다.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첫사랑의 기억이, 당신에게 사랑과 이별의 감수성을 심어놓았다고. 그 감성의 씨앗이 자라나 근원 모를 센티멘털을 앓게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 답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듯하다. 적어도 나에게는 딱히 첫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아련한 사랑 따윈 아예 없었고, 학창 시절 내내 나는 솔로였다. 첫 연애는 대학시절에 있었고, 그 연애는 나에게 딱히 아쉬움이나 그리움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렇다면 첫사랑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내 고독의 정체는 무엇인가?


신카이 마코토는 9년 만에 [너의 이름은]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답을 내놓는다. 실은 우리는 누군가의 영혼과 인연의 끈을 맺고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건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의 인연이 아니다. 꿈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인연일 수도 있고, 시대가 어긋나 시간여행을 해야 만날 수 있는 인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의 인연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럴싸한가? 아니,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너무 판타지라고? 누군가는 그의 세계관이 너무 허황된 망상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두 부류다. 아직까지 끝 모를 고독감을 느껴보지 못한 애송이거나, 혹은 문제의 원인을 반드시 현실에서 찾아야 하는 합리론자이거나. 그런 이들에게 [너의 이름은]은 감동을 줄 수 없다, 오히려 인물들의 대사가 오글거리고, 영화 중간중간 뮤지컬처럼 등장하는 사운드트랙이 쌩뚱맞고 웃기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 중 전자의 부류에게는 이 글 또한 의미를 줄 수 없다.


20세기 중후반에 활약한 장 보드리야르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있다. 그는 세상모두 허상이라고 말한다. 소비의 사회에서 우리가 구입하는 것은 실은 모두 이미지란다. 가령, 우리는 병원과 건강식품에서, 각종 유기농 및 천연 제품에서 건강을 약속받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건강’이라는 기호를 구입할 뿐이다. 온갖 맛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사먹는 게 아니라 ‘맛있음’이라는 표식을 구매한다. 실제로 그것이 맛있는지 어떤지는 더 이상 판단할 수도 없을뿐더러, 기실 중요하지도 않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실제 그것이 어떠한가가 아니라, 남들이 보기에 어떠한가이다. 우리의 삶과 가치판단은 온갖 SNS를 통해 전시된다. 그것은 점점 실제 우리의 삶이 되고 더 이상 가상과 본질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그럼에도 보드리야르는 이미지로 떡칠한 우리 삶과 이 사회에 대해 좋다 혹은 나쁘다고 단적으로 진단하지 않는다. 판단은 끝없이 유보되고, 이제는 옳고 그르다는 평가 자체도 허상에 뒤덮여 무가치해졌다. ‘가치’라는 것도 더 이상 본질의 영역이 아니라 ‘허구’에 속한 담론이 되었다.


[너의 이름은]이 제시하는 세계는 당연히 허구의 세계다. 그것은 증명할 수도 없고, 혹은 그게 사실이라 해도 꿈 속의 혹은 다른 시간 속의 인연을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신카이 마코토의 제안은 우리에게 아무런 실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내가 수많은 낮과 밤에 느낀 깊이 없는 공허함의 이유가 말도 안 되는 그런 망상의 연인 때문이라고? 그게 맞다고 쳐도 이 소외를 극복할 답이 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신카이 마코토의 답은 그저 재밌는 망상의 하나로 치부되어도 좋을까?


라캉은 사람이 정신병에 걸리는 이유 중 하나가, 그가 상상계를 통과한 후 상징계에 진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세계관 속에서 살아간다. 내가 인식하고 살아가는 세계는, 당신의 세계와 비슷할 수는 있지만 결코 같지 않다. 그리고 각자의 세상은 실제 세상과 조금씩 다르다(실제 세상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는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내 안의 가치 체계와 질서 등은 당신의 그것과 많이 다를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는 사실 저마다의 우주에 살고 있으며, 그 우주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를 통해 서로의 우주는 소통 가능하다. 물론 종종 오해도 발생한다. [초속 5센티미터]에서 다카키와 아카리, 카나에는 각자의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며 서로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다. [너의 이름은]의 타키와 미츠하 또한 자신만의 우주를 만들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법과 질서를 만들며 살아간다. 그들 각자의 우주는 애니메이션에서 그들이 바라보는 하늘과 별로 표현된다. 그러한 자신만의 공고한 언어의 우주를 완성하지 못한 자가 정신병에 걸린다는 것이 라캉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처방은? 그들에게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 체계를 갖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과 다르더라도 상관없다. 그 자체로 내적 정합성만 있다면 그것으로 치료는 끝이다. 그는 자신만의 완결된 세계 속에서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경험과 교육 등의 사회화(문명화) 과정을 통해 저마다의 가치 체계를 완성해 간다. 그것을 어떤 이는 ‘철학’이라 부르기도 하고, ‘세계관’이 부르기도 한다. 뭐라 부르든 상관없다. 성인이 된 나는 이미 나만의 단단한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그 세계는 언어로 구성된 사후적·인위적 구조물이기에, 신이 만든 이 우주처럼 천의무봉하지 않다. 어딘가에 바느질의 흔적이 남아있고, 얼기설기 된 부분도 있고, 아예 구멍난 곳도 없지 않다. 완벽한 하나의 세계를 만들지 못해 때로 우리는 자신의 인식 속에서 모순을 만나기도 하고, 해결되지 않는 난제를 마주치기도 한다. [너의 이름은]에서 아름답기만 하다 생각했던 혜성이 둘로 쪼개져 마을을 폭파시킨 것처럼 말이다. 적어도 미츠하를 비롯한 같은 마을주민들의 세계관 속에서 혜성이 침공하는 경우는 부재한다. 혜성이 덮치는 때가 내 우주의 구멍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그때 나에게 공포가 엄습한다. 꼭 그런 경우가 아니어도, 그 빈틈을 통해 들어오는 외부의 서늘한 바람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을 우리는 고독 또는 외로움이라 부르는 것이리라.


신카이 마코토는 현실 속 자신이 만든 본인의 세계관이 완벽하지 않고 결핍되고 부족한 부분이 있음을 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상상을 통해 그 틈을 메운다. 환상 속 사랑과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허나 그건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냐고? 앞서 말했듯 내가 현실에서 만든 나의 세계도 기실은 나만의 개인적 언어로 만든 공상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과 일치하는지 여부도 알 수 없으며 중요하지도 않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완결성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부처나 예수와 같은 성인이 아니고서야 완전무결한 세계관을 만들 수는 없다(아니 어쩌면 그들도?). 어떤 질서를 만들더라도 그것에는 반드시 결함이 존재한다. 예술은 이때 두 가지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다. 하나는 구멍을 메울 부가적인 보충물의 역할을 하거나, 다른 하나는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세계를 좍좍 찢은 후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거나. [너의 이름은]은 전자의 역할을 한다. 그 구멍을 따뜻하고 슬프게 덮어준다. 그래서 적어도 애니메이션을 보는 2시간 동안은, 혹은 아주 가끔 이 만화를 떠올리는 짧은 순간 동안만, 나의 끝 모를 고독감이 공감받고 채워지는 듯한 포근함을 느낄 수 있다. 비록 그것이 현실의 고독과 무관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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