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태이 Jan 27. 2017

이념이라는 바람 속에서 미야자키 하야오 구출하기

[바람이 분다]에 대한 이분법적 잣대를 넘어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작 [바람이 분다]는 일본 입장에서는 우익·보수를, 한국 입장에서는 친일을 표방하는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다소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일본의 우익·보수도, 반일·반전을 외치는 좌파도 아니고, 한국의 친일이나 반일을 대변하지도 않는다. 어느 쪽과도 전혀 무관하며, 감독은 작품 속에서 끝없이, 좌우의 논리를 초월하여 감상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럼에도 영화를 본 관객과 평자들은 끝없이 한/일 관계로 작품을 읽어내고 있다.


  애초에 [바람이 분다]를 한/일 프레임으로 읽는 자는 현재 우리 사회에 공기처럼 만연한 내셔널리즘적 시각을 자연발생적이고 당연하다 생각하거나,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작품을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바람이 분다]는 내셔널리즘 너머에 있다. 이 작품은 일본을 옹호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으며, 전쟁을 찬양하지도 않는다. 애초에 그러한 논의의 층위에 있지 않다.


  내셔널리즘이란 ‘국가’를 단위로 생각하는 사고의 틀을 말한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다. 국가를 빼놓고 어떻게 우리 삶을 논할 수 있겠는가. 외국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에게 정감을 느끼고, 올림픽이나 월드컵 경기에서 모르는 사람과 함께 웃고 울고, 이름도 모르는 시골 마을의 주민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것 등은 모두 내셔널리즘의 작용이다.


  내셔널리즘의 기원은 지역마다 다르다. 유럽의 경우는 제국주의가 심화되면서 자연스럽게 혹은 의도적으로 형성되었다. 영국이 최강이야, 프랑스가 짱이라구! 같은 생각은 식민 지배를 통해 만들어진 관념이다. 아시아나 기타 피지배 국가(식민국가)의 경우는, 제국에 대항하는 차원에서 형성되었다. 가령, 백제나 신라 시대 유민들이 모두 같은 국가라는 생각을 가졌을까. 고려 때는 어땠을까. 지금의 우리는 단일한 한국인이라는 의식과 개념이 머릿속에 디폴트로 박혀 있지만, 조선까지만 해도 그런 관념은 형성되지 않았다. 조선은 애초에 왕과 선비들만의 나라였고, 백성들은 한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압록강 국경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같은 조선의 백성 경상도 사람보다 오히려 청나라 사람인 압록강 이북의 사람들과 더 친밀함을 느꼈다.


  한국과 일본에 한정한다면 내셔널리즘은 길어야 100년 남짓 동안 만들어진 인위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마치 자연 법칙처럼 당연히 여기는 사고관은 편향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그가 속한 국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상당한 왜곡과 허위를 낳는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호리코시 지로를 찬양하는 것이, 결국은 그가 속한 일본을 함께 찬양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내셔널리즘 내에서만 통용되는 논리이며 따라서 명확한 확증편향이다. 미야쟈카 하야오는 내셔널리스트(국가주의자)가 아니며, 따라서 그의 세계관 속에서 재구성된 호리코시 지로를 우리는 감독의 논리에 입각하여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온전한 작품 해석이 될 것이다.


  물론 호리코시 지로는 당연히 내셔널리스트였을 것이다. 그는 일본인으로서의 자각이 있었고, 자신의 비행기가 전쟁에 쓰이며, 미군을 공격할 것이라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 우리는 자국을 위하는 호리코시 지로의 염원을 쉽게 비난할 수 있을까. 당시 일본은 연합국으로부터 고립된 상태였고, 동맹국은 일본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일본의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미국에 항복하거나 최후의 반격을 치르거나. 만약 지금의 우리가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같은 판단을 당시 조선에 적용시켜 보자. 일제의 침략 하에 놓인 조선이, 끝내 일본에 굴복하거나 혹은 죽을 때까지 투쟁해야 한다면. 우리는 후자에 숭고한 평가를 내린다. 전자는 친일파라는 오명을 쓸 뿐이다. 그렇다면, 왜 똑같은 논리를 한국인과 일본인에게 그토록 다르게, 완전히 정반대로 적용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한국=피해국/일본=가해국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 논의는 이미 기존 비평에서 수없이 반복된 논의이므로 여기서 또 다루지 않겠다. 둘째는, 일본은 패전국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이 우리가 쉽게 인지하지 못하는 지점이지만, 상당히 중요한 대목이다. 일반적으로 미국에 피해 보상을 외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미국은 승전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의 책임이 오직 승패로 떠넘겨지는 것은 정당한가. 전쟁에서 패자가 모든 전쟁의 경제적·사회적·도의적 책임을 지는 것은 서구가 만든 제도이다. 그것은 제국주의 논리 내에 포섭된 규칙이란 말이다. 하지만 승패를 떠나 생각해보면, 양으로 보나 질로 보나 일본보다는 미국의 책임이 훨씬 크다.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2번 터뜨렸고, 그에 따른 피해는 계산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제로센이라는 자폭기를 만든 호리코시 지로의 책임보다 원자폭탄을 만든 오펜하이머에게, 그리고 애초에 미국 대통령에게 원폭 제조를 권유한 아인슈타인에게 몇 십 몇 백 배는 더 큰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지금의 우리는 오펜하이머를, 아인슈타인을 20세기의 위대한 과학자로 칭송할 뿐이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건 없지만, 그때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다면(정말 거의 불가능했을 가정이지만) 반대로 호리코시 지로는 일본의 영웅으로 평가받았을 것이다. 반대로 미국이야말로 지금의 일본처럼 모든 악과 폭력의 근원으로 지목받고 고통받지 않을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금의 세계가 100% 현실 세계이지만, 1941년을 살아가는 일본인에게 21세기는 여러 시나리오로 나뉘는 확률적 가능 세계였을 것이다. 현재의 결정론적 시각에서 과거의 가능론적 세계관을 평가하는 것은 얼마나 가혹하고 폭력적인가.


  위의 논의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한 개인을 평가하는 주요 요인은,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보다 해당 사회가 공유하는 사유의 틀이다. 그것은 역사와 시대의 선택이라는 사후적 결과물이다.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한 개인이 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똑같이 군수사업을 벌이고, 민간인을 학살하고, 위안부를 설치하고, 잔혹한 폭력과 살인을 저질렀어도, 승자인 미국은 일말의 책임도 사과도 질 필요가 없다. 반대로 일본은 그 모든 피해보상과 책임을 져야 한다. 연합국이 패했다면 당연히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이 분다]가 취한 이미지 전략은 1941년이라는 당시 역사적·사회적 배경을 지우는 것이다. 작화는 최대한 하늘하늘한, 높은 채도와 명도의 파스텔톤을 고집한다. 그와 동시에 동화적이고 낭만적인 음악이 영화를 보는 내내 울려퍼진다. 도저히 전쟁 중이라 느낄 수 없는 연출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시대를 상관하지 말고 오로지 호리코시 지로라는 개인을 봐달라는 것이다. 지로의 삶이, 그 사람의 선택이, 그의 노력이 비록 실패와 패배와 폭력을 안겨 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리코시 지로라는 개인을 온전히 봐 달라는 것이다. 역사와 시대라는 말놀이판에서 똑 떼어내면 그의 삶이 어때 보이냐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묻는다.


  물론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어떻게 1941년을 배경으로 이야기하면서 2차 세계대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있냐고. 그럼 앞으로 모든 문화와 예술 작품이 1940년대를 소재로 할 때는 항상 2차 세계대전을 포함해야 하는가. 1960년대가 배경이면 늘 베트남 전쟁을 말하고, 1990년이 시대상황이면 꼭 걸프전쟁을 언급하고, 2003년이라면 어김없이 이라크 전쟁을 다뤄야 하는가. 194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전쟁’이라는 프레임으로 읽어내려는 시선이야말로 그들의 삶을 평가절하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각자의 사랑과 낭만과 꿈과 좌절과 슬픔과 그리움이 있었다. 전쟁과 식민지배라는 역사적 관점 밑에 가려진 그 삶들을 다시 들춰내는 것이 예술의 역할 중 하나이며, 이 영화의 취지이기도 하다.


  예술은 역사 아래에 있지 않다. 역사는 예술을 물귀신마냥 붙잡고 늘어져선 안 된다. 예술은 자신 안에 독자적인 세계를 그린다. 그것은 현실과 관련이 없진 않지만, 실제 현실과는 다른 독립적인 세계인 것만은 분명하다. 우선 그 세계관을 최대한 배려하는 것이 좋은 감상자로서의 태도라고 믿는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호리코시 지로 또한 각자의 세계관 속에 살고 있다. 그들의 세계를 지금의 ‘한국’이라는 태그로, 혹은 ‘21세기’라는 꼬리표로 획일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얼마나 허망하고 폭력적인가. 1940년대를 살았던 일본의 국민을 오직 '전범국의 가해자'라는 딱지로 바라보는 시선은, 당시의 한국인을 식민지 백성으로만 대하는 시각은, 지금의 우리에게 얼마큼의 가치를 안겨주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하늘과 별과 바람과 애니메이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