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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Apr 15. 2017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사랑, 그리스]가 말하는 사랑

영화를 보기 전 [나의 사랑, 그리스]라는 제목만 보고는 달달한 멜로 영화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옴니버스 영화라기에 예전 [아이 러브 파리]나 [아이 러브 뉴욕]의 그리스 버전인가 싶었다. 영화를 보는 중에도, 총 3편의 옴니버스 중 2편인 <부메랑>과 <로세프트 50mg>을 볼 때까지만 해도 나의 기대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 마지막 에피소드 <세컨드 찬스>를 보면서 서서히 기대가 깨져갔다.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다.

 

배경은 2013년쯤의 그리스. 높은 실업률, 오랜 경기침체, 밀려오는 난민, 타민족에 대한 배타주의 등이 만연한 그리스 사회는 그냥 그대로 한국과 다를 바 없다. 위에서 '난민'을 '외국인 노동자'로 대체하면 완연히 한국이다. 그리스라는 국가에 대한 정보가 없어 그동안 너무 먼 나라 낯선 사회라 생각했는데 정말이지 이미 내가 모르는 사이 세계는 거의 하나였다.(‘World apart’라는 영어 제목도 역설적으로 그러한 세계화의 양면성을 암시한다)

 

각 에피소드에는 사랑이야기가 하나씩 등장한다. 다프네(20대 학생)와 파리스(시리아 난민 청년)의 싱그러운 사랑. 지오르고(30대 후반 애아빠이자 별거남)와 엘리제(스위스에서 그리스로 출장 온, 알고 보니 지오르고의 상사)의 뜨겁고 끈적이는 성애. 마리아(다프네와 지오르고의 엄마로 60세)와 세바스찬(독일에서 역사학자였다가 은퇴하고 그리스에서 사서로 일하는 65세 독신남)의 정겨운 사랑. 하지만 이 세 가지 사랑이야기는 로맨스 영화의 전형으로, 본 영화에서는 본질적인 갈등을 가리는 클리셰로 작용한다. 겉보기에는 적당히 웃기고 화사한 로맨틱 코미디이지만, 그 껍데기를 걷어내면 전혀 로맨스가 아니다. [나의 사랑, 그리스]는 철저히 사회적 갈등에 대한 영화다.

 

첫 에피소드에서 20대의 사랑이 가리는 갈등의 본질은 타민족 배타주의다. 그것은 아버지의 난민혐오부터 테러에 이르기까지 구체화되어 표현된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장년의 불륜 이면에는 신자유주의 세계의 경제 위기가 도사린다. 구조조정과 만성실업은 유능력자 대 무능력자 혹은 자본가와 무산자 간 갈등의 한 표출이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노년의 사랑이 숨기는 것은 현재 가능한 거의 모든 세계관 사이의 갈등이다. 그것은 그리스와 독일 사이의 역사적 갈등일 수 있고, 중산층과 서민층의 갈등일 수도 있으며,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갈등이기도 하다.

 

각 에피소드에서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개별적인 사랑들은 전부 무력하다. 파리스의 사랑은 끝내 다프네를 지키지 못하고, 지오르고의 사랑은 자신의 동료를 구하지 못하고, 세바스찬의 사랑은 마리아의 가족도 그녀의 삶도 세바스찬 자신도 구제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 나약하고 쓸모없는 사랑을 찬양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한국어 제목이 그렇고, 각 커플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의 묘사가 그러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고약한 반어법일까, 아니면 그럼에도 직설법일까.

 

사랑은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존재하는 모든 갈등과 폭력, 전쟁과 범죄의 씨앗이다. 아버지의 난민혐오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자국에 대한 애착에서 생긴 감정이다. 구조조정과 실업, 경기침체 또한 자유에 대한 존중과 자본에 대한 경외에서 생겨난다.(무엇보다 큰 건 자신과 내집단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시리아의 내전도 마찬가지고 빈부격차나 지식의 차이도 모두 누군가에 대한 혹은 무언가에 대한 사랑의 결과다. [나의 사랑, 그리스]는 사랑과 갈등이 전혀 다른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 같은 것임을, 복잡하지만 섬세하게 그려낸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사랑이 없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그랬다면 다프네는 죽지 않았을 것이고 파리스는 국가에 버림받지 않았을 것이며, 아버지는 난민으로부터 재산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경기침체도 실업도 이혼도 없는 세계 속에 모두가 살고 있을 텐데 말이다. 문제만 일으키고 그 문제를 제대로 해결조차 못하는 사랑을 왜 인간들은 그토록 절대적으로 떠받드는가.

 

그런데 사랑이 없었다면 다프네와 파리스의 만남도 없었을 것이다. 결혼이라는 것도 없고 가족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사랑이 없다면 회사도 국가도 그 어떤 공동체도, 현재 우리를 둘러싼 모든 물질적/무형적 시스템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었다가 슬픔을 주었다가 또 기쁨 주기를 반복한다.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세계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중 어느 쪽이 나은가. 물론 이런 이분법은 유치한데다 위험하기까지 하다. 확실한 것은 애초에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들판을 뛰어다니는 자연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을 거라는 점.

 

그렇기에 이 영화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개별적인 사랑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 마지막에 내레이션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인들은 사랑 그 자체를 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이 순간 연인에 대한 애타는 나의 사랑은 사소하고 가치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랑이 모여 인간을 움직이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된다.

 

다프네의 사랑은 아버지의 난민혐오를 멈추었다. 지오르고의 사랑은 엘리제의 신자유주의적 세계관에 금을 그어놓았다. 세바스찬의 사랑은 마리아와 그의 가족에게 새로운 전환을 가져다 주었다. 지금의 내 사랑이 당장 사회를 바꾸기는커녕 내 삶의 문제 하나 해결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사랑은 몇 십 년 혹은 몇 백 년 후에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고 만다.

 

[나의 사랑, 그리스]가 말하는 사랑은, 지금의 이 가혹한 인간 사회를 만들어낸, 근본적인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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