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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Sep 28. 2016

지구는 지킬 가치가 있는가

영화 [지구를 지켜라!]가 보여주는 웃음과 폭력 너머의 삶


“유머는 슬픔으로부터 나온다.” [지구를 지켜라!]는 찰스 슐츠의 말이 어울리는 영화다. 지독하게 웃기고 미치도록 재밌는데 그 밑에는 슬픔이라는, 너무 거대해서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기저가 존재한다. 한참 웃다가 영화 마지막 반전에서 경악(또는 분노)하고,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 한없이 가슴 먹먹해진다. 고백하건대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몇몇 장면에서 눈물을 훔치곤 했다.

    

스토리의 기본 골격은 간단하다. 사회 부적응자인 주인공 이병구는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을 납치해서 결국 죽인다. 병구가 사회 부적응자가 된 애초의 이유는 우연한 사고 때문이다. 강원도 광부의 외동 아들로 태어나 화목했던 병구. 어느 날 광산이 무너지는 바람에 아빠의 팔 한 쪽이 잘린다. 그 후 아빠는 삶의 의욕을 잃고 술과 가정 폭력으로 살다가 집안에서 실족하여 사망한다. 가정은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병구는 고등학교 육성회비조차 내지 못해 담임선생님에게 체벌이라는 이름의 폭행과 폭언을 당한다. 생계를 위해 병구 엄마는 길거리에서 나물 장사를 하지만 동네 양아치들에 괴롭힘 당한다. 참다 못한 병구는 그들 중 한 명을 칼로 찔러 죽이고 교도소에 들어간다. 그곳에서도 병구는 교도관에게 폭행당하며 미쳐가고, 출소 후 다니던 유제화학 공장에서도 반장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노조에 참가해 시위하다가 여자친구를 잃는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엄마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4년째 식물인간이다. 이미 세상은 병구 편이 아니었다. 그러니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겠는가.

    

병구는 그 후 담임선생님, 양아치, 교도관 등을 납치하여 살해한다. 영화는 유제화학 사장을 납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개기일식까지 병구와 강 사장의 7일 간 사투를 그린다. 여기까지라면 영화는 사회 부적응자의 복수극에 그친다. 재밌고 잔인하지만 평범한 영화에 머물렀을 것이다.(장준환 감독은 영화 [미저리]에서 범인의 캐릭터나 역사를 제대로 다루지 않고, 단순히 미친 살인범으로만 묘사해서 아쉬웠다며 [지구를 지켜라!]는 [미저리]의 범인 시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영화는 판을 한 번 뒤집는다. 병구는 외계인이 지구를 침범하려 계획 중이라고 믿는다. 자신을 괴롭혀 온 이들이 실은 사람이 아니라 외계인이며, 그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침범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강 사장은 외계인 왕자와 직접 교신할 수 있는 높은 계급의 외계인이라 단정하며 그를 납치하여 고문한다. 영화는 내내 병구의 망상인 듯 그리다가 마지막에 실제로 외계인이 존재하며, 강 사장이 외계인 왕자임을 드러냄으로써 관객들의 얼을 빼버린다. 거기서 더 나아가 지구를 지키라는 제목과 달리 외계인 왕자가 지구를 폭파시키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멘붕의 더플 플레이. 여기까지 오면 영화는 한 사회 부적응자의 복수극이 아닌 스케일이 더 큰 이야기로 확장한다.

  

‘진실’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영화는 상당히 도식적으로 읽힌다. 결국 진실에 접근하는 자는 병구와 순이 그리고 추 형사와 신참 형사다. 병구와 순이는 강 사장이 외계인이라고 믿었고, 추 형사와 신참 형사는 범인이 병구임을 맞혔다. 그들 넷의 특징은 사회 부적응자 혹은 실패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점이다. 병구와 순이는 말할 것도 없고, 추 형사는 반장과의 파워게임에 밀려 책상을 뺏기고 식당에서 근무한다. 신참 형사 또한 처음엔 잘 나가는 듯하다가 추 형사와의 커넥션을 형사반장에게 들킨 이후로 입지를 빼앗기고 추락한다. 영화에서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즉 사회에 잘 적응하여 그럭저럭 일상적인(혹은 성공을 향한) 삶을 사는 이들은 외계인의 존재를 믿지 않으며, 형사반장팀은 병구를 괴롭힌 엉뚱한 청년을 범인이라고 잡아들인다.

    

여기서 상상과 이성이라는 도식이 나오는데, 영화는 마치 이성으로는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객관적 데이터만으로는,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로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한다. 수학적 논리로 복권에 당첨될 확률은 몇 백만분의 일이지만, 추 형사의 직관은 이분의 일이라고 일러준다. 어떤 사람이 범인일 확률은 지극히 낮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추 형사는 마찬가지 이유로 범인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이므로 확률은 이분의 일이라고 역설한다. 얼마나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실에 접근한다. 그리고 신참 형사 또한 마찬가지다. 그 둘만이 병구를 찾는다.

    

병구는 피해망상과 정신착란 덕분에 강 사장이 외계인임을 파헤칠 수 있었다. 순이는 병구를 사랑하고 끝까지 믿었기 때문에 강 사장이 외계인이라는 병구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합리적 판단이 아닌 감정적으로 상상했기 때문에 올바른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 넷은 진실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추 형사는 병구에게 살해당해 강아지 ‘지구’의 밥상에 오르고, 신참 형사는 순이에게 공격당해 병구에게 납치당하고 나중에는 외계인에게 처치되고 만다.

    

병구와 순이도 강 사장이 외계인임을 알고 그를 납치까지 했지만 결국 강 사장에게 살해당한다. 그렇다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성은 틀린 결말로 우리를 이끌고, 감성은 우리를 올바른 결론으로 인도하지만 결국 우리를 실패하게 만든다.(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사회적 낙오자로 찍히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병구는 신참 형사에게 묻는다. “그래. 다 알고 있겠지. 어차피 빤한 얘기니까. 그런데 다 알고 있었다면서 그동안 뭐하고 있었어?” 병구의 아픔을 안다고 말한 신참 형사는 결국 강릉 공장에서 병구를 총으로 쏘아 죽인다. 신참 형사의 이성적 판단의 답은 결국 병구를 살해하는 것이다. 안다는 것에 대해, 지성(=합리=이성)에 대해 영화가 가장 낮게 취급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읽어도 이성과 감성이라는 대립항만으로는 영화를 완벽하게 독해할 수 없다.

    

[지구를 지켜라!]의 핵심 키워드는 단연 ‘폭력’이다. 영화의 등장인물은 모두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병구 아빠는 아내(=병구 엄마)를, 병구 엄마는 (우연히) 남편을, 담임선생님과 교도관 등은 병구를, 형사 반장 및 팀원은 추 형사를, 추 형사와 신참 형사는 병구를, 순이는 강 사장과 신참 형사를, 강 사장은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폭력을 행한다. 그리고 병구는 자신에게 고통을 가했던 이들에게 똑같이 폭력으로 되갚을 뿐만 아니라 엄마와(벤젠을 먹여 죽인다) 순이에게도(사랑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마음의 상처를 준다) 의도치 않게 폭력을 행한다. 영화의 절정에서 강 사장은 거짓 커밍아웃을 한다. 자신이 진짜 외계인이라고. 그리고 (아마도 영화 속 실제 역사로 추정되는) 지구의 역사를 설명한다. 외계인인 자신들이 지구인을 만들었는데 지구인들이 힘의 우위를 갖기 위해 만든 유전자가 스스로를 더욱 폭력적으로 만들었다고. 그래서 자신들이 지금 실험 중이라고 말이다. 인간은 온갖 범죄와 사건사고, 전쟁 등으로 서로를 괴롭히고 죽이는, 우주에서 유일한 생명체라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들이 왔다고 해명한다.

    

하지만 그러한 강 사장이야말로 가장 폭력적인 존재자다. 강 사장은 지구에서 행하는 모든 유전자 재조합 실험을 중단하고 지구를 박살내라고 명한다. 이런 모순이 있을까. 지구인의 폭력성이 싫어서 실험까지 행하던 자가 결국 가장 큰 폭력을 지구에 행사하다니 말이다. 궁극적으로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은, 모든 생명 존재에겐 필연적으로 폭력성이 있다는 게 아닐까.

    

강 사장은 지구인이었을 때도 외계인이었을 때도 가장 폭력적인 인물이다. 영화에서 최종적으로 살아남는 자 또한 강 사장이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은 결국 우주의 이치라는 뜻일까.

    

지구에는, 법과 제도가, 도덕과 윤리가, 관습과 문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폭력과 범죄, 전쟁이 난무한다. 한시라도 사건사고가 끊일 때가 없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법과 윤리는 과연 제 역할을 잘 하고 있는 걸까. 이 질문에 영화는 단연 아니라고 답하며, 나아가 오히려 법과 윤리야말로 인간의 폭력을 합리화하고 유지하게 만드는 사회 체제에 일임한다고 말한다. 법과 윤리는 지배층의 계급 유지를 더욱 공고히 할 뿐이다.

    

병구가 받은 모든 폭력은 사회적 테두리 안에서 일어난 것들이다. 광산 붕괴, 선생님의 체벌, 사법부의 구속, 교도관의 관리, 엄마의 병 등은 모두 시스템 내에서 일어난 것들이며 그다지 사회적으로 문제시되지 않는다. 따라서 병구는 시스템 내에서는, 적어도 현재의 법과 윤리 체계 안에서는 구제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병구가 받은 폭력과 고통은 합법적이며 윤리적이기 때문에 아예 문제조차 되지 않는 걸까. 해결할 필요가 없는 사소한 일상일까. 하지만 그 폭력과 사고는 끝없이 병구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사회 부적응자로 만들어 놓았다. 병구가 자라면서 받은 건 고통뿐인데. 사람들은 그를 병신이라 부른다. 그리고 고통을 가한 자들을 사회는, 건강한 시민라 칭송한다. 고통을 많이 줄수록 사회적으로 성공한 자가 된다. 그렇다면 병구가 구원받을 길은 이제, 개인적인 복수밖에 없다.

    

사회 속 폭력을 예방하거나 해결하기 위해 만든 인간의 가치 체계는, 오히려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가 무너지지 않도록 방어하는 역할을 한다. 사회가 전복되지 않는 이상, 폭력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가치 체계를 모두 부정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합법적이고 윤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실은 이토록 폭력적인 사회를 떠받칠 뿐이라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법을 지키고 착해지려 하는가. 왜 우리는 폭력적인 인간 세상을 지키려고 할까.

    

영화 초반에 병구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내가 이곳에 무슨 미련이 있어서. 지구를 지키려고 하는 걸까. 하지만 결국 사람들은 알게 될 거야. 누가 지구를 구했는지 말이야.” 병구는 영웅이 되고 싶었을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을까. 그 답은 영화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온다. 박살난 지구의 파편들 사이로 TV가 튀어나오고 화면에는 병구의 즐겁고 평화로웠던 지난 시절이 재생된다. 아무런 폭력이 없는 삶. 병구는 외계인을 처단하고 지구를 구하면, 더 이상 고통을 주는 자들이 사라지므로 자신의 삶이 예전처럼 평화로워질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병구는 죽고, 지구는 파괴됨으로써 그의 꿈은 좌절된다. 폭력이 없는 삶은 불가능하다. 아니, 삶이 없으면 폭력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성적으로 폭력적인 인간들의 삶에 어떤 가치가 있을까. 인간은 지구에서 사라져 마땅한 존재일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 질문에 다소 애매하게 답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무리 폭력적이어도. 인간들 사이에 수많은 폭력이 난무하더라도. 그들은 충분히 기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고. 우리 삶에는 분명 행복하고 평화로운 순간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지구는 파괴되었지만, 지구인들의 행복했던 삶은 영원히 TV화면에 비치며 우주를 떠돌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인간의 삶이 완전 무가치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영화는 슬픈 위안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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