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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Mar 22. 2019

01. 고대 중국 철학 1

제자백가의 등장

본격적으로 중국 고대 사상가들을 살펴보기 전에, 일단 그들의 활동 시대부터 알아보자. 통칭 제자백가라고 불리는 그들의 활동 시기는 춘추전국시대다. 주나라의 제후들이 독립을 외치며 약 700개의 나라로 쪼개진 시점이 춘추시대의 시작점이다. 그때가 b.c.770년이다. 전국시대는 진晉나라가 한 위 조로 분할된 b.c.403년부터 진秦나라가 통일한 b.c.221년까지다.


춘추전국시대의 특징을 알려면 다른 시대와 차이점을 비교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그전 시대를 살펴보자. 춘추시대 전에는 차례로 상나라-주나라가 중원을 다스렸다. 참고로 상나라를 은나라라고 통상적으로 부르는데 은이라는 명칭은 상나라를 비하하기 위해 후대에 부른 것이다. 따라서 상나라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


상나라와 주나라의 특징은 제정일치 사회라는 점이다. 동시대 한반도를 다스렸던 고조선 또한 제정일치 사회였다. 그것은 단군왕검이라는 명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단군=제사장, 왕검=왕이라는 의미인데 그 둘이 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농경사회의 기본적인 특징이기도 하고 동양이 아닌 서양이나 다른 문명에서도 초창기에는 제사를 맡는 측이 지배층이었다.


상/주나라도 마찬가지였는데 당시 왕의 개인적 고민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까지 점을 통해 해결했다. 그것을 우리는 갑골문과 [역경] 등의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갑골문은 20세기 초와 후반, 크게 두 차례 대량으로 발견된 바 있다. 한자의 조상으로 추정되며 상/주나라의 지배층이 점을 칠 때  문자로 생각된다.


[역경]([주역]이라고도 칭한다)은 그러한 점과 관련된 이론적인 토대와 사례를 모아놓은 책이다. 문제상황이 있으면 점을 치고 점괘의 결과에 따라 어떤 해법을 시행하고 그 후의 결과를 정리했다. 그런 사례들이 무수히 많이 모이면 통계 자료처럼 일반화할 수 있다.


반면 춘추시대는 제정분리 사회였다. 우리는 그것을 춘추시대 역사서 [춘추좌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유명한 점술사에게 점을 보러 왔다. 점술사는 점괘를 봐주고 왕이 떠난 다음 혼자 중얼거렸다. "아직도 하늘의 도와 땅의 도가 같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니." 이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닌 점술 전문가가 했다는 게 특히 더 크리티컬하다. 그는 천체의 법칙과 인간사회의 법칙이 다르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비슷한 시기 고조선에서도 볼 수 있다. 공무도하가에 얽힌 설화에서인데, 백수광부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사건은, 제사장(=샤먼)의 죽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기록에 남을 만큼 그 남성이 높은 신분이었다는 점, 백발에 헝크러진 머리와 술병이라는 묘사는 그가 종교와 관련된 인물로 볼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실제 고조선도 시간이 지나며 제정분리되는 모습을 보인다.


아마 그러한 제정분리 사회로의 이행이 제자백가의 탄생을 촉진한 직접적인 이유일 것이다. 상/주나라 때는 왕이 점술사에게 자문을 구했기 때문에 왕 1인 체제였다. 그것을 동同이라 불렀다([춘추좌전] 나와 있다). 허나 점이 더 이상 인간 사회를 예측하거나 해결할 수 없음을 알게 된 후, 왕은 국정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당연히 왕에게 옆에서 조언할 신하들의 입지가 중요해졌다. 이것이 군신 상호 견제 체제인데 이를 화和라 칭했다(역시 [춘추좌전]에 나온다).


[논어]에서 공자가 "동은 소인의 도이고, 화는 군자의 도"라고 한 말은 위와 같은 의미를 지시한 것이다.


또 하나는 주나라까지만 해도 지식이란 지배계층 사이의 예절과 규칙 등을 일컬었고 그것을 전수하는 이들은 관료의 신분을 지녔었다. 허나 공자가 제자백가 사상의 시초라 불리는 이유는, 관료 신분이 아닌 개 신분으로 지배층의 질서와 법도를 제자들에게 독자적으로 가르치고 다녔기 때문이다. 공자의 그러한 행보는 고대 아테네의 소크라테스와 비견될 만하다.


그렇다면 왜 제자'백'가라고 불릴 만큼 무수히 많은 사상가들이 당대에 출몰했을까. 일단 춘추시대를 혼란기로 본 것은 보편적인 시각이었다. 왜 안 그랬겠는가. 역사적으로 쭉 하나의 단일한 국가였던 중원이 700개의 작은 나라들로 쪼개져 아웅거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허나 문제는 하나일지라도, 그 문제의 원인 분석에 대한 의견은 저마다 달랐다. 원인 분석이 다르니 해법 또한 달랐다. 그래서 저마다의 의견을 들고 나온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주나라로 하여금 분열하게 만들었을까(참고로 주나라는 춘추시대 시작인 b.c.770년에 망한 게 아니다. b.c.770년에 건륭의 침입으로 도읍을 동쪽으로 옮겨 오랫동안 제후국들과 병존하다가 b.c.256년에 망한다). 그에 대해선 현재도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여기서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를 소개하겠다.


주나라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특징은 봉건제도다. 여기서 중요한 주나라 봉건제의 특징은, 왕과 제후가 친족 관계라는 점이다. 주나라 최상의 지배층이 모두 같은 성씨를 쓰는 대가족이라는 뜻이다. 중심은 왕이 다스리고 지방은 제후가 다스린다. 왕이 죽으면 왕은 자신의 아들에게, 제후가 죽으면 제후의 아들에게 각각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것이다. 이때 세대가 지날수록 왕과 제후의 촌수는 멀어진다. 10세대만 지나도 왕과 제후는 20촌이 훌쩍 넘는다. 남이 된다는 말이다. 게다가 제후의 아들들이 영토를 나눠 지배하는 경우도 간혹 생겨 지방은 더욱 잘게 쪼개진다. 그것이 주나라의 분열을 초래했다는 게 주요한 해석이다.


그렇다면 공자의 원인 분석과 해법은 무엇이었을까. 이를 알아보기 전에 간략하게 공자의 사상을 보기로 하자. 그를 이해할 때 반드시 필요한 개념은 서恕 인仁 예禮이다. 서恕란 같다는 뜻인데, 공자는 서恕를 설명하며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권하지 말라"고 말한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도 싫어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사람은 보편적으로 유사한 특징을 지닌다는 생각을 전제한 사고방식이다. 공자는 인간의 보편성을 바탕에 두고 자신의 생각을 펼친 셈이다.


헌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인人의 의미다. 공자는 분명히 말했다. 인人은 예로 다스리고 민民은 형벌로 다스리라고 말이다. 이 말은 인과 민이 서로 다른 대상을 지칭한다는 걸 뜻한다. 민의 갑골문을 보면 눈동자 없는 눈과 창의 결합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창으로 눈알을 찔러 뺐다는 말이다. 무슨 뜻일까. 당시는 전쟁에서 진 국가의 백성을 이긴 국가의 노예로 데려오는 것이 관례였다. 이때 노예의 도주를 우려하여 표식을 위해 신체에 일정한 손상을 가했다. 대표적인 것이 한 쪽 눈을 없애는 것이었다. 민民은 처음에는 노예를 뜻했고 그것이 확장되어 피지배층 전반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그러므로 민民은 형벌로 다스리라는 것이다.


반면 인人을 알기 위해서는 인仁을 설명하는 공자의 말을 빌려올 필요가 있다. 공자는 인仁을 애인愛人="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이때 사랑의 대상이자 예로 다스리는 대상은 누구일까. 그는 바로 지배층이다. 인仁이란 지배층 사이의 마음과 관계 전반을 일컫는 말이다. 예禮를 뜯어보면 제단과 음식과 제기의 형상자로 구성됐다. 차례를 뜻하는 글자다. 차례는 주나라 지배층이 조상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행하는 의례를 말한다. 지금은 대한민국 온 국민 지내는 풍습으로 변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차례는 왜 중요한가. 당시는 농경사회였으며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토지다. 그러므로 토지를 소유한 자가 곧 지배층이고 토지가 없어 토지를 빌려 일하는 자가 곧 피지배층이다. 토지는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자연물이다. 따라서 그것을 획득하는 방법은 부모에게 물려받거나 빼앗는 것뿐이다. 실제 춘추시대 때는 토지를 잃고 피지배층으로 전락하는 지배층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주나라까지만 해도 그러한 일은 매우 희귀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토지를 얻는 일반적인 방법은 부모에게 물려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님은 누구에게 땅을 얻나. 그들의 부모다. 그러므로 내가 지배층으로서 토지를 소유하고 잘 살 수 있는 건 조상 덕이라는 말이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자식은 차례를 지내는 것이 관례였다. 그 말의 뜻이 확장되어 지배층 사이에 행하는 형식적 의례 전반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따라서 인仁도 예禮도 지배층에 한정된 개념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쯤 되면 공자의 원인 분석은 쉽게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지금과 같은 혼란이 발생한 이유를, 지배층의 질서 파괴로 보았다. 왕은 왕답게 제후는 제후답게 행해야 하는데 지금 상황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입지와 본분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게 공자의 해법이다. 그래서 공자는 인을 통해 지배층이 가져야 할 올바른 마음가짐과 관계를 주장하고, 그것을 형식화하는 적합한 예를 설파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가족을 중시한 것은 비유가 아니라 직유다. 주나라의 지배층은 진짜 가족 관계였으니 그들 가족이 화목하면 온 나라가 화목할 거라는 진단은 수긍할 만하다. 여기서 잠깐 논어의 한 대목을 보자. 한 관리가, 자기 마을에는 아버지를 고발한 아들이 있을 정도로 질서가 바로 잡혀 있다고 자랑하자, 공자가 이렇게 답했다. 우리 마을은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아들이 꽁꽁 숨겨준다고 말이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굉장히 가족 이기주의적 발언처럼 들리지만, 공자가 저렇게 말한 이유는 분명하다. 인간이 태어나 맨 처음 맺는 관계는 부모-자식 관계다. 그런데 그 관계조차 신뢰롭게 맺지 못한다면 다른 관계 또한 원활하게 맺지 못한다는 게 공자의 관점이다. 공자는 가족-->고을-->국가와 같이 사회란 개인적인 관계의 확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남의 아버지보다 우선 나의 아버지를 먼저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인의 시작이다.


그에 전면적으로 반대한 사람이 묵자다. 묵자의 생몰연대는 현재까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논의로 보건대 묵자는 피지배계층 중에서도 장인이나 기술자 정도이며 전과자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이유는 묵墨이라는 이름 때문인데 그것이 묵형이라는 형벌에서 유래했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다(묵형이란 먹을 뜻하는 묵이라는 글자에서 유추할 수 있듯 죄인의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벌을 뜻한다).


묵자는 애초에 공자가 말한 사랑이 지배층에 한정된 사랑임을 간파했다. 그러므로 묵자가 보기에 공자의 사랑은 편애다. 묵자는 그게 반하여 겸애를 주장했다.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공평하게 사랑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 묵자의 원인 분석은 바로 주나라의 봉건제 자체에 있다. 지금의 혼란은 봉건제를 실시한 주나라의 필연이며 이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선 더 이상 지배층/피지배층의 구분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허나 묵자가 겸애를 외친다고 온 나라의 사람들이 옳다구나 하며 평등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 그래서 묵자는 두 가지 규제 장치를 둔다. 하나는 종교적 장치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장치다. 전자는 하늘이 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묵자는 귀신의 존재를 믿었다. 사람들이 겸애를 실천하는지 안 하는지 귀신이 지켜보고 있다고 묵자는 생각했다. 그래서 겸애를 실천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고 말이다. 여기서도 묵자는 공자와 반대된다. 공자는 차례는 중시했지만 귀신은 믿지 않았다. 반면 실용성과 효용을 중시한 묵자는 차례를 싫어했지만 귀신은 믿었다. 둘의 양상은 마치 거울상처럼 대조적이다.


그렇지만 하늘과 귀신의 존재만으로 사람들에게 겸애를 실천하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묵자는 강력한 군주의 존재를 역설한다. 지적이고 권위 있는 군주가, 누가 겸애를 행하고 안 하는지 파악하여 그에 적합한 상벌을 줘야 한다고 말이다. 이 지점이 묵자의 모순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 대한 평등한 사랑을 주장하면서도 그들 위에 군림하는 강력한 통치자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한계는 그 통치자를 감시할 상위 단위가 없다는 점이다. 결국 통치자는 스스로를 감시할 수 있을 정도로 덕을 쌓은 인물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공자의 사상과 비슷한 결론으로 귀결된다.


여기까지 공자와 묵자의 혼란기에 대한 문제 분석과 해법을 통해 그들 사상의 기본적인 발상과 특징을 알아보았다. 당시에는 공자와 묵자가 반대되는 것처럼 느껴졌을지 몰라도 후대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공자와 묵자의 공통점이 더 두드러지게 보인다. 우선 둘 다 해법으로 개인의 수양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공자는 인과 예의 실천을, 묵자는 겸애를 설파했다. 둘째로 둘 다 국가의 필요성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셋째는 지성과 인성을 겸비한 강력한 군주를 옹호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공자와 묵자는 자신의 사상을 인간의 동일성/보편성에 기반하여 정립했다는 점이다. 공자는 지배층에 한정해서 사람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공통적이라 보았고, 묵자는 신분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말했다.


이는 곧 이어 나올 사상가들과는 대조되는 지점이기에 짚고 넘어갈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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