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신 03.
그때는 그랬다.
한때는 신에 대한 나의 갈망이 부끄러웠다. 그 내용에 대하여 선뜻 입 밖으로 내놓는 것이 두려웠다. 교회를 다녔기 때문인지, 당시 시대가 그랬는지, 내 그릇이 작아서인지 아마도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중 교회에 다녔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가장 컸는데, 교회에서는 교회에서 정해놓은 하나님 아버지상이 있었고, 그보다 더 크거나 작게 생각한다면, 의문을 가진다면 안된다는 식으로 억압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입밖으로는 교회 안에서 정해준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속으로는 그 이름 아래 숨겨진 더 큰 신, 더 넓은 신, 우주를 아우르고, 천사와 악마, 선과 악, 빛과 어둠 그 모두를 본질적으로 사랑하는 신에 대해 항상 어렴풋 느끼며 갈망하고 또 사랑해 왔다.
그래서 그랬을까.
처음에 난 그 갈망 때문에 신을 찾았다. 나의 내적 느낌과 드러난 현실은 너무도 다른 것 같아서. 믿음 안에는 분명 활짝 열린 사랑의 신이 존재하는데, 현실에선 두려움에 쌓인 억압의 신만 알려주는 것 같아서. 도대체 신이 정말 그런지 의뭉스러워서, 나는 지독히도 신의 그림자를 쫓았다.
교회 안에서도, 성경 속에서도, 어른들의 말속에서도 신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건 때로는 조심스러웠고, 때로는 은유적이었으며 때로는 새장 안에 갇힌 언어로 내게 신을 말해왔다. 나는 그곳에서 내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는 신을 만날 수가 없었다. 단지 기계적으로 "아버지, 이거 저거 해주세요."라고 입으로 되뇔 뿐이었다.
아무리 겉으로 불러보아도 내면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답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다. 싯다르타가 왕자의 부유한 삶과 어여쁜 부인과 갓 태어날 아들을 두고 떠나간 것처럼. 그처럼 모든 것을 벗어던질 만큼 용기 있는 여정은 아니었지만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내면으로부터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하여 나는 계속 "왜?"라는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교회라는 소속체를 떠나보내고, 홀로 맞은 길에서 오히려 어렴풋 신을 만난 것 같았다. 오롯한 내 느낌에 기댈 수밖에 없었지만 그 느낌은 오히려 더 정확한 길을 나에게 제시했다. 크고 뚜렷한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삶의 흐름 안에 자연스레 새겨진 부드러운 곡선의 하늘 같은 만남으로 난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이게 내가 갈망해 온 신이야.'
그다음엔 열망이 따랐다. 갈수록 신처럼 되고 싶다는 열망이 강해졌다. 그건 전 시공간을 아우르는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보석을 다섯 개는 모은 타노스의 바람과 같은 신의 형상이 아니었다. 그건 내가 느끼는 신과 같은 존재, 오로지 사랑으로 창조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뜻이었다. 나는 사랑으로 말하고, 사랑으로 행동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그리고 내 몸을 성전으로 보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내가 나에게 알려준 신은 그런 모습을 좋아했다.
그다음엔 신의 말을 전하고 싶다는 바람이 나에게 왔다. 아주 아주 오래전에 도착한 마음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없었다. 아무런 지혜도, 명예도, 나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신의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 누가 듣기는 할까 하는 생각으로 영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항상 기도했다. 만약 할 수 있다면, 언젠가는 신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내가 왜 신을 찾았냐면, 내 사랑을 내가 증명하고 싶어서 신을 찾았다. 신이 항상 거기에 서서 말해줄 것이라 믿어서 신을 찾았다. 그러니 정말 신이 말했다.
네가 나를 초대하면 나는 네게 갈 것이다. 그러면 내가 언제나 always 그 자리에 있다는 걸 네게 보여주리라. 모든 방법으로 all ways.
《신과 나눈 이야기》
그리고 이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되었다.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금 당신 안에선 어떤 부름이 느껴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