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신 02.
왜일까?
항상 신이 궁금했다. 그냥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인지, 살기 위한 몸부림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사는 게 힘이 들 때마다 가슴 안에 묻어둔 신을 향한 몸부림을 꺼내 보았고, 기도했고, 궁금함을 쏟아냈다.
알고자 할수록 알기가 어려웠다. 교회에서 배워 온, 긴 로브를 입고 인자한 웃음을 짓고,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아버지 상으로 머물러 있기에는 신에 대한 내 갈망은 갈수록 더 커지기만 했다.
나는 유독 《신과 나눈 이야기》라는 책에 끌렸다. 그 외에도 신과 또는 영혼에 관한 내용이라면, 다양하게 책을 찾아 읽었다. 책을 읽다 보면, 어떤 은혜로운 느낌에 사로 잡힌 날들이 많았다. 종종 감정이 격해지고, 그 감정이 밖으로 표출되기 위해 눈물이 되어 흐르기도 했다. 또 오롯한 감사가 마음 깊은 저변에서 순수하게 흘러나오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궁금했다. 신은 어디에 계실까? 그 어디에나 있다고 “나는 알파이자 오메가요”라고 하는 말이 이해될 듯하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 삶에 추위만 가득한 겨울이 왔을 때는 신에 대한 갈망이 더 심해졌다. 그건 아마도 온기를 너무도 갈망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떤 온기든 붙잡고 싶었으니까.
어느 날부터는 새벽 3-4시가 되면 꼭 잠에서 깼다. 나는 온전한 고요 안에 머물렀다. 그러나 때때로 머리를 지배하는 혼란스러운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나다울 수 있는 시간이 그 시간이라는 걸 알았다. 내 안에 느껴지는 감정을 외부의 소음 없이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고요 속 많은 날 외로웠고, 불안했고... 평온했다.
하지만 어떤 새벽의 나는 조금 달랐다. 현실에 대한 불안이 가슴 안에 떠올랐지만, 이번에는 그 감정을 통해 다른 생각으로 생각 전환이 가능했다. ‘비록 지금 감정은 불안하지만 난 다시 선택할 수 있어. 평온, 혹은 기쁨에 머무르자.’
오후 한 시쯤 강아지들을 데리고 산책을 갔다. 걷다가 문득 어떤 확신이 든 느낌이 들었다. ‘이건 신의 길이야. 나는 시간이라는 느리고 거친 흐름 속에서 창조하는 법을 연습 중이야. 만약 내가 이 과정 위에 서있지 않았다면, 섣부른 창조에 난 쉽게 길을 잃었을지도 몰라. 어두운 생각 하나에 금방 잡아 먹혀버렸을지도.’
그때 만약 나에게 신이 말을 걸었다면 이렇게 말해줬을 것 같았다. “아주 잘했구나.”
어디에서 신을 찾을까?
산책 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은 틀렸을지도 모르겠다고. “어디에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어딘가에는 없다’라는 뜻도 들어 있으니까.
하지만, 신이 어딘가에 없을 수 있을까.
그래서 신은 삶의 또는 그 너머의 모든 흐름 속에
보물을 숨겨 놓은 건 아닐까.
원한다면 언제든 우리가 그를 찾아낼 수 있도록.
중요한 건 신이 어디 있는지가 아니라
예수님의 기도처럼,
내가 진심으로 들을 수 있느냐는 거였는지도.
그래서 내가 던져야 할 질문은
“신은 어디에 계셔요?”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들을까요?” 였는지도 몰랐다.
산책 중 그리고 새벽이면 가슴을 관통하던
따뜻한 앎이 그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언제나 신 안에 머무르고 있다”라는 걸.
그냥, 아주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당신의 하루에도
신의 보물과 축복을 마주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