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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민 Apr 05. 2023

결국 내 모임을 만들다

'잘 노는 공부쟁이들'의 탄생

 

 초등학교 5학년 때 '영만'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가 '만만'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초등생들의 별명이 대개 그렇듯 이름을 살짝 변형했을 뿐 별 의미는 없었다.


 학기 초 친한 친구 3명과 함께 '만만이들'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왜 내 별명을 땄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 별명은 '0만이'었는데 왜 내가 '1만이'이고, 가장 친했던 친구는 '2만이'이고, 다른 친구 둘이 '3만이', '4만이'라는 호칭을 나눠 가졌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친구끼리 "우리는 4 총사!"라며 순수한 의도로 만들었을 뿐 별 의미는 없었다.

 

 4 총사는 오래가지 않았다. 1만이가 당시 반장이어서일까, 그냥 친구들을 쉽게 좋아했기 때문일까, 거절을 못하는 성격 탓이었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1만이와 조금이라도 친해진 반 아이들은 너도나도 '만만이'가 되길 원했다. 그렇게 만만이는 '12만이'까지 늘어났다.


 만만이들은 서로 편지를 교환하고 생일을 챙겨주며 우정을 나눴다. 만만이의 숫자가 늘수록 만만이가 아닌 친구들이 소수가 된다는 사실은, 어느 날 담임 선생님께서 종례 시간에 "친구끼리 무리를 만들면 다른 친구들이 소외당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뒤에야 알았다. 그 종례 이후로 만만이는 자연스럽게 유령 모임이 됐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붉덩'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피부가 '붉'고 통통한 '덩어리'라는 뜻이었다. 식사량은 많고 운동량은 적었던 여고 시절, 나와 친했던 친구 셋 모두 비슷한 통통이들이었다. 어느 날 통통이들 넷이서 무릎 위에 연달아 앉는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마른 친구가 "덩어리들 같아"라고 했다.(역시 나랑 친했던 이 친구의 별명은 도비였다.)


 '덩어리'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덩어리에 개성을 주기 위해 색을 입혔다. 피부색별로 '붉덩' '흰덩' '검덩' '갈덩'이 됐다. 이후 덩어리들과 친해진 다른 친구는 날씬하지만 볼살이 좀 있다는 이후로 괜히 억울하게 '얼덩'이라는 별명을 받았다. 얼굴 덩어리였다. 덩어리라는 말로 소속감을 만들고 싶던 여고생들의 우정 어린 장난이었다.




"차라리 내가 만들자."  

 '소모임' 앱엔 이런저런 모임 천지였지만 마음에 드는 곳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 괜찮아 보여서 찾아간 모임은 금방 문을 닫아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나만의 모임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되돌아보니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어릴 때부터 늘 친구들과 함께할 놀이터를 만들며 살아온 모임쟁이였다.     

 

 자율스터디라는 참신한 개념에 꽂힌 나는 직접 자율스터디 모임을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이제 음주와 놀이를 곁들인.


 모임을 만들기 위한 첫 단계는 이름 짓기다. 모임 이름은 꽤 중요했다. 다른 모임을 훑으며 얻은 교훈이었다. 15자 남짓한 모임 이름에는 모임의 정체성과 지향점, 모임장의 가치관이 담기기 마련이다.     


 모임 이름에 '훈남훈녀'가 있으면 모임장이 '훈남'이나 '훈녀'라는 반가운 소식이 아니라, 모임장이 훈남이나 훈녀를 만나고 싶다는 절박한 소망이다. 모임 이름에 '2030'이라는 나이가 있으면, 40대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강력한 경고다. '핫한' 모임은 사실 별로 핫하지 않고, '인싸' 모임은 본인의 사회성을 과대평가하는 자칭 인싸 천지고, '초보환영' 모임은 초보들을 가르치며 뿌듯하고픈 꼰대들로 가득하다. 


 모임 이름을 고민하며 처음 가입했던 종로 친목 모임 이름을 참고했다. ‘흥 많은 모지리들’. 이름을 보자마자 정말 마음에 들었다. 흥 많은 모임원을 원한다는 지향점. 거기에 스스로를 낮추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진입 장벽을 낮추는 '모지리들'이라는 정체성. 흥은 많지만 허세는 없는 모지리끼리 놀아보자는 모임장의 가치관이 단번에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흥 많은'이란 표현이 탐났지만 그대로 따라 하기는 싫었다. 그래서 좀 더 구체적이면서 동시에 포괄적인 '잘 노는'이라는 표현을 쓰기로 정했다. '놀다'는 많은 행위를 포함하는 동시에 '놀겠다'는 지향점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쟁이'라는 말을 원래 즐겨 써왔던 터라 스터디 모임의 정체성을 밝혀줄 '공부쟁이들'은 금방 정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공부해야 하는데 놀고도 싶어'라는 모임장의 갈망이 담긴 이름 '잘 노는 공부쟁이들. 자율스터디 모임'이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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