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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건 Oct 02. 2022

가정폭력범 아버지를 정신병원에 데려가기까지

13일 차. 가위와 경찰관

내가 처음부터 말했다시피, 나의 울증은 아버지의 가정폭력으로부터 시작됐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가정폭력범이었다. 때리고 나서 다정하게 굴었다.


그러나 그때는 가정폭력이라는 개념이 널리 퍼지기도 전이었고 우리 가족들은 자애로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너희 아버지가 가끔 욱해서 그렇지, 자상한 사람이야."


이것이 아버지에 대한 평가였다. 하지만 나는 우울했기 때문에 긍정적인 관점가질 수 없었다. 나는 가족들에게 내 관점 말했다.


"아버지는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할 뿐이야."


실제로 아버지는 자신의 심기에 거슬리는 행동을 한 운전자가 자기 옆을 지나가면 따라붙으며 보복운전 하고는 했다. 가족들을 태운 채로 말이다.

내가 다섯 살이었을 때에는 버스기사가 자기에게 경적을 울렸다는 이유로 주먹질을 하며 싸우다 경찰서에 갔다.


아버지는 늘 위와 같이 '아무것도 아닌' 이유로 화를 냈고, 마찬가지로 그런 이유로 나를 때리고 혼냈다. 검은 스타킹에 흰 양말을 신어서, 문구점에서 가방을 사고 싶다고 해서, 약속 장소에 일찍 가고 싶다고 해서... 셀 수 없이 별 것 아닌 이유들이 나를 구타했다.


가족들은 나와 아버지의 성향이 잘 맞지 않고, 그래서 아버지가 나를 때리는 거고, 내가 예민한 아이라 아버지를 더 싫어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능을 마친 내 동생. 지극히 평범 19살 동생 시험을 망쳐서  있는데, 아버지가 동생걷어찼다.

걷어참의 여파로 동생까지 우울증에 걸린 뒤에야 모두가 내 관점 인정했다.


그것이 내가 스물네 살 쯤의 일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로 24년간 살았다고 표현해도 좋겠다.

하지만 내 관점이 받아들여졌다고 해서 기쁘지도 않았다.

오히려 비참했다.


일찍이 내 관점이 받아들여졌다면-사실이 인정되었다면, 아버지를 양육자로 두지 않았을 것이고, 적어도 동생은 우울증으로부터 안전했을 것이다.


그러지 못했으므로, 아버지가 동생을 발로 걷어찼다. 그로 돌아가 보자. 아버지는 180센티미터에 90킬로그램쯤 나가는 남자였다. 그리고 나, 엄마, 동생은 전부 여자였다. 신체적인 힘으로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나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했다.


나는 동생을 내리치려는 아버지의 어깨를 가위로 찍었다. 작은 공예용 가위였고, 내게도 망설임이 있었다. 그래서 상처가 깊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폭력을 멈추기에는 충분한 통증이 생겼다. 아버지 어깨에 난 작은 구멍으로부터 얇은 피가 흘러내렸다.


"너... 지금 뭐 한 거니?"


아버지가 날 보고 말했다. 나는 맞을 것 같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112에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가 동생을 때리고 있어요."


경찰관은 출동하겠다고 말하면서 물었다.


"아버지가 술을 드셨나요?"


우리 아버지는 체질적으로 술을 못 마신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자식을 이렇게 때리는 것도 참 기이한 일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아버지가 흉기를 갖고 계신가요?"


여기서 조금 망설였다. 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흉기를 갖고 있는데, 만약 와서 나를 잡아가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정신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걱정이지만-그 누가 아버지를 가위로 찍은 후 제정신일 수 있겠는가? 나는 그냥 경찰관이 물어본 것에만 답했다.


"아뇨."


나는 방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해 경찰에 신고했다고 말했다. 나는 엄마가 일을 키우냐고 비난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말을 들을 각오는 이미 되어 있었다.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잘했어."


그 순간 힘이 탁 풀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이걸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이게 내가 받고 싶었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맞고 있을 때 누군가 내게 해주었으면 했던 일.


적극적인 방어와, 너보호받아야 마땅하다는 반응과, 맞는 쪽이 아니라 때리는 쪽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모습.

것이 필요했다. 누군가 내게 그 일을 해줬으면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해주는 이가 없었으므로 내가 동생에게 해주었다. 내가 수년이 지나 나 스스로를 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찰이 출동했다. 아버지는 방으로 숨었다.

동생은 갑작스러운 경찰의 등장에 놀란 듯했다. 경찰에게 별일 아니니 돌아가라고 소리쳤다.

경찰은 일단 신고가 들어온 상황이니 조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를 만나 십여 분 정도 이야기를 하다가 갔다.


그러고 나니 소강상태가 되었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아파트 주민이 신고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동생은 처음에는 왜 멋대로 경찰에 신고를 했냐고 나에게 화를 냈다. 그러나 그 화는 점차 후회로 바뀌어 갔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동생에게 사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절대, 결코 사과하지 않았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끔 욱 하는데 그럴 수도 있지. 아버지들은 원래 자식을 때리는 건데. 내가 훨씬 적게 때리는 건데. 사과를 안 해도 내가 다정하게 말을 걸면 아, 미안해하는구나. 알아야지.

왜 가족끼리 이해를 못 해줘?


나는 아버지가 이런 가정폭력범이라는 것을 16살 때부터 알고 있어서 일찍 그에게 사과받기를 포기했다. 17살 때에는 고등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며 그를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동생은 19년 평생을 집에서만 살았다. 직장인인 엄마보다 전업주부인 아버지와 같이 있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나만 때렸다. 동생은 아버지에게 맞는 나를 보호하는 역할이었다. 본인이 직접 아버지에게 맞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동생은 나와 전혀 다른 감각들갖게 되었다.

자신을  때린 아버지에 대한 분노, 아버지가 제대로 사과하지 않는 것에 대한 실망감, 경찰에게 아버지의 폭력을 함구하기로 결정한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죄책감이었다. 수능자신이 울지 않았으면 가정이 평화롭게 유지되었을 것이라는 망상으로 인한 죄책감.

자신이 문제라는 괴로움이 동생을 사로잡았다.


나와 엄마가 아무리 우리 가정은 오래전에 망해버렸으며, 아버지 사과기다리지 말아야 한다고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다.

동생은 급성 우울증으로 정신과에 내원하여 상담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사과하지 않는 것에 대해 실망감을 표출하다가, 원통해했고, 결국에는 자신이 문제라고 말했다.


한편 가위에 찍히고 경찰이 온 이후 아버지는 조용해졌다.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공포감과, 딸자식 가위로 자신을 찍었다는 것이 트라우마로 남은 듯했다.


그래서 나는 평생 시도해보지도 않았던 일을 해 보기로 결정했다.

아버지를 정신과에 내원시키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정신과에 내원해서, 의사와 상담사를 통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면 동생에게 진실된 사과를 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럼 동생의 우울증이 완화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안방에 들어가 십여 년 만에 아버지를 마주 보고 앉았다. 그리고 정신에 가자고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자기는 제정신이며 아프지 않다고 주장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다음 주에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아프지 않다는 진단을 받아 와. 내가 보기에 아버지는 제정신이 아니니까."


옛날 같았으면 여기서 리모컨이나 손이 날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저 한숨을 쉬며 알겠다고 했다.


나는 안방에서 나왔다. 문을 닫고 허, 하고 웃었다. 허무했다. 아버지는 장기간걸쳐 나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그런데 가위로 만든 작은 구멍과 경찰로 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이었다니.

아버지 본인은 단 한 번, 그 작은 구멍의 아픔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니.

아버지를 사랑하고 용서하기 위해 애쓴 시간이 아까웠다. 또 그 때문에 악화된 내 정신건강도 아쉬웠다.


그러나 어쨌이제는 내 의지대로 아버지를 정신과에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틀림없이 의학이 보증해주는 결론, 당신이 스스로의 정신을 망가뜨렸기 때문에 가정폭력을 휘둘렀다는 사실을 아버지 앞에 들이밀 수 있게 될 터였다. 그래서 아버지가 자신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진실되게 뉘우치고 사과한다면 동생은 분명히 금방 회복될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나를 가장 오랫동안 괴롭혔던 것은 가정폭력으로 인해 만들어진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보통이고 평범하고 나쁘지 않은 사람이며, 내가 특이하고 이상하고 우울한 것이라는, 내가 문제라는 결론 말이다.


이제 정말 아버지의 병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었다. 이 병명을 동생에게 들려준다면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가 문제였음이 증명될 것이고, 동생이 실질적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나는 가위와 경찰관으로 아버지를 협박하여 정신과에 내원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가위와 경찰관이 없었다면 아버지는 평생 정신과 문턱도 밟지 않았을 것이다. 가정폭력범들을 정신과에 데려가는 일은 무척 힘들다. 그들은 자신은 옳고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이 잘못되었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관점은 틀렸다.


가정폭력범이 잘못했다.

자신보다 어리거나 약하다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하는 쪽이 나쁜 것이 당연하다.

아이는 가정 내에서 맞을 필요도 고통받을 필요도 죄책감에 잠들지 못할 이유도 없다.

이것은 너무나 투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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