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갑옷

별별 사람들 47화

by 매콤한 사탕

R에게는 특별한 갑옷이 있었다.

하기 싫은 일이 생기거나, 자기편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어김없이 꺼내 입는 만능 갑옷


"제가 오랫동안 우울증 때문에 죽고 싶었거든요."


대부분의 선량하고 친절한 사람들은 R의 딱한 사정을 듣고서 선의를 베푼다.

그리고 R의 자기 고백을 소중히 다루었다.


사실, R은 정신과나 심리상담센터에 찾아가서 우울증 진단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그러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R은 자체적으로 우울증을 진단했다.

도서관에 가면 널린 게 우울증에 관한 책들이었다.

책 몇 개만 휘리릭 넘겨보면 될 것을 괜히 돈 들여, 시간 들여, 진료 기록이 남는 병원까지 갈 필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R이 전혀 우울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평범한 사람들도 살다 보면 한 번쯤 우울감에 빠진다.

R은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시도 때도 없이 우울해졌다.

그럼에도 이 인간이 우울증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었다.

R은 자기 뜻대로 사람들이 움직일 때면 기운이 펄펄 났다.

힘든 일을 자기 대신 처리해 주고,

상냥하고 친절하게 자기에게 귀 기울여주고,

오냐오냐 해줄 때면 신이 나서 콧노래를 불렀다.


우울증이라는 만능 갑옷에 사람들이 꼭두각시들처럼 자기 뜻대로 움직여 줄 때면

R은 크게 웃고 말이 많아지고 행복해졌다.

기운이 없거나 축 처지거나 사람들이 힘들거나 죽고 싶거나 그런 증상들이 지속되지 않았다.


이제는 어리지도 젊지도 않은 R은 수십 년 동안 쓴 만능 갑옷에 구멍이 생긴 것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저기... 그분 우울증이래요. 안 됐어요."

"아, 설마 그래서 어제 야근한 거예요 그분 유명해요. 몇십 년째 우울증이라면서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잖아요."

"네???"

"자기가 하기 싫은 일 있으면 꼭 그래요. 어쩐지 오늘따라 기분이 좋으시더라. 진짜 우울증이라면 그럴 에너지가 있겠어요? 우울증보다는 조울증 같은 거겠지."


놀란 나머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진짜 우울증인 사람이 얼마나 힘든지 생각 안 해봤을 걸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으신 분이 한참 기분 좋다가도 자기 식대로 안되면 확 기분이 상해서 어린애처럼 군다니까요."


점심시간을 끝나고 사무실에 들어가니 R이 싱글벙글 웃으며 끊임없이 말을 시켰다.

R은 사람들이 듣든 말든 자기 말은 끝까지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우울증은 아니더라도 성격장애가 의심스러웠다.


나는 척척박사 J의 조언을 떠올렸다.

평범한 사람들이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을 상대하는 법에 대한 전문가의 조언을 명확하다.


"전속력으로 도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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