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 사람들 52화
"형아는 사춘기라서 맨날 엄마한테 혼나요."
"그래?"
"다 켰으면서 나이가 어린 나보다 더 엄마 말을 안 들으면 어떡해..."
거기까지 말하고는 여덟 살 막내조카는 자기 엄마가 하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지하게 들어줘야 하는데 '어떡해'가 '오똑케'로 들려와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앞니가 자라는 중이라 무슨 말을 해도 귀엽게 들렸다.
".... 암튼 형아가 문제야. 형아는 아~주 못 말리는 사고뭉치 말미잘이다요."
막내조카는 반말에다가 ~요를 붙여 힘겹게 존댓말을 완성했다.
말미잘 그것은, E가 사춘기 아들에게 욕대신 부르는 애칭(?)이었다. E의 집에서는 아직도 사춘기 대 갱년기의 징검승부가 진행 중인 모양이었다.
그렇다 해도 막내조카까지 사춘기 형을 홀대하는 건 아닌가 염려되었다.
"근데 사춘기는 누구나 겪는 거야. OO이도 사춘기 때 그러지 않을까?"
"나도 다 알아요. 형아가 사춘기니까 동생인 내가 이해해야지."
막내조카는 인생 다 살아본 어르신처럼 푸근하게 말했다.
갑자기?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엄마는 사춘기인 첫째 말미잘에게 막내와 함께 미용실에 다녀오라고 했다.
"동생 잘 챙겨서 다녀와! 절대 손 놓치지 말고! 알았지?"
"아휴, 걱정 마세요. 엄마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알아서 잘하고 오겠습니다."
"비 올 거 같으니까 우산 챙겨가고! 엄마가 집에 가면 용돈 줄게. 잘 부탁해!"
"네~네~"
막내는 첫째 형이 영~ 못 미더웠다. 집을 나서며 막내는 엄마의 지령을 다시 확인했다.
"형아, 카드 챙겼어?"
"그래."
"우산은?"
"들고 간다. 요 녀석이 쪼그만 게 엄마처럼 잔소리는..."
막내는 엄마의 말대로 형의 손을 꽉 붙들고 미용실로 가려했다.
하지만 사춘기 말미잘은 막내의 손을 놓으려는 듯 느슨하게 잡고 뛰듯이 걷는 통에 막내는 눈물이 찔끔 나려 했다.
"형아, 엄마한테 이른다. 똑바로 걸어!"
"아, 알았어. 근데 너 초등학생이 이 정도 속도도 못해. 완전 느림보네~ 나무늘보~"
"놀리지 마! 이 사춘기 말미잘 형아야!"
"뭐라고~ 요 녀석이~"
형제는 가는 내내 티격태격했다.
미용실에 도착해 형이 먼저 머리를 손질하고, 그다음 막내 차례였다.
형은 막내를 보며 또 짓궂은 장난을 했다.
"OO아, 형아 먼저 가도 돼?"
"안돼! 여기서 나 집에 혼자 못 간단 말이야!"
"집도 못 찾는대요~"
"형아! 진짜 나 화낸다!"
"알았어, 알았어. 농담도 못하냐."
불안한 막내는 머리를 손질하는 동안, 형이 있는지 몇 번이고 거울로 확인했다.
애타는 동생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 형은 모바일 게임을 하느라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미용실에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 막내는 너무 분한 나머지 아기처럼 울음보를 터트릴 뻔 했다.
형은 또 다시 엄마와의 약속을 어기고 한 발짝 앞서 걷고 있었다.
'정말 사춘기 형아는 못 말리는 사고뭉치 말미잘이야! 이런 사람이 왜 내 형아인 거야.'
그때, 하늘에서 빗방울이 뚝하고 떨어졌다. 형이 갑자기 생각난 듯 급하게 뒤돌아 말했다.
"앗, 맞다. 우산! 미용실에 놓고 왔네."
"다시 돌아가야 해?"
"너 여기서 잠깐 기다려! 형이 빨리 갔다 올게."
막내는 뛰어가는 형의 뒤에 다 대고 소리치며 쫓아갔다.
"그냥 같이 가자! 형아~ 기다려!"
하지만 형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달려갔다.
길거리에 우두커니 서서 막내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래서 혼자 집에 가보기로 결심했다.
처음이라 솔직히 겁먹긴 했지만 미용실에서 집에 돌아가는 길은 의외로 간단하고 쉬웠다.
어느새 혼자 집에 도착한 막내는 마음이 벅차올랐다.
집에 들어가니 퇴근한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미용실에서 혼자 집에 찾아왔다고 하니 엄마는 대견해하셨다.
"그런데 형은?"
"몰라요. 형아는 알아서 오겠죠."
하지만 형은 30분이 지나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이 빗방울이 거세져 차가운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엄마는 걱정이 되는지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실 소파에서 전화기가 울렸다.
막내는 우산도 두고 오고, 외출 시 전화기도 안 챙기는 못 말리는 형이라 생각했다.
'비도 오고 어두컴컴해졌는데 집에 안 오고 형아는 어디 간 거야?'
1시간이 지나고, 가족 모두가 형을 걱정하고 있었다.
엄마가 형을 찾아 나서려는지 주섬주섬 다시 옷을 입었다. 집에 있으라고 했지만 막내는 노란색 우비를 서둘러 챙겨 입었다.
엄마와 함께 현관문을 나서자 비를 쫄딱 맞은 채 손에 우산을 들고 있는 형이 보였다.
형은 막내를 보자마자 달려와 노란색 우비를 꼭 끌어안았다. 형은 울고 있었다.
"흑흑, 엄마 제가 OO이 잃어버린 줄 알고 여기저기 다 가봤는데 없어서 으헉... OO아, 형이 미안해! 진짜 잘못했어!"
"아니야, 형아 내가 잘못했어. 내가 말없이 집에 그냥 와버렸어."
"괜찮아, 집에 잘 왔으면 됐어. 다행이야. 진짜 다행이야."
형제는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못 말리는 사춘기 형은 사고뭉치가 분명했다..
우산을 쓰고도 겨울비를 쫄딱 맞고서 몇 시간씩 막냇동생을 찾았다.
전화기도 없이 막냇동생을 찾기 전에 집에 올 생각도 못하고 빗속을 달리고 또 달렸다.
막내조카는 자신의 교육용 태블릿 일기장에
그날을 형아의 사랑을 확인한 날로 저장했다.
막내조카는 혀 짧은 귀여운 발성으로 내 혼을 쏙 빼내 얻은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자랑스럽게 속닥거렸다.
"삼촌 그거 알아요? 우리 형아가 날 정말 사랑한다요. 그리고 나도 우리 형아를 진짜 사랑한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