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싫다.

별별 사람들 53화

by 매콤한 사탕

할머니는 스물셋, 그녀의 아이는 겨우 한 살이었다.

한밤중에 군인들이 남편을 데리러 왔다.

총격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남편은 경성의대를 갓 졸업한 의사였다.


"괜찮아, 내일 아침에 봐."


진료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급하게 집을 나서던 남편이 할머니를 돌아보며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살아생전 남편과 나눈 마지막 말이었다.



남편은 일본으로 유학 온 오빠 친구였다.

돈 많은 성공한 사업가의 아들이라 어울리기는 했지만

할머니의 집안은 양반이 아닌 중인 신분의 남자와의 혼인을 끝내 허락하지 았았다.

남편은 가업을 물려받지 않고 조선으로 돌아가 의사가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무상으로 진료해 주고 그들을 위해 왕진까지 다니던 마음씨 착한 의사였다.


몇 년 간 일본에서 조선으로 편지를 주고받던 할머니는

어느 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열아홉에 혼자 배를 타고 조선에 왔다.

항구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남편을 보며

할머니는 이 사람과 평생 사랑하며 살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행복했다.


그러나,

혼인한 지 2년 만에

남편은 영영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그다음 날 아침에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 도련님이 남편을 찾아오겠다고 집을 나섰다.

서울이 곧 함락될 것이다.

남들보다 빨리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남편이 집에 돌아오는 대로 바로 떠나야 했다.


그날은 평범한 날이었다.

햇살이 좋은 여름날.

새로 돋아난 어린잎이 점점 더 짙게 초록빛으로 물들어가는 때

남편을 찾으러 갔던 도련님이 폭격당해 죽었다고 했다.


바로 떠나야 한다.


돌이 지난 지 며칠 되지 않은 갓난아이를 업고 시어머니와 다른 식솔들을 따라 길을 떠났다.

등뒤에서 대포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놀랐는지 까무러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눈앞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포격이 멈추자 다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태어나 처음으로 시체를 봤다.

포탄에 맞아 엉망이 된 엄마의 시신 옆에서 잿더미를 뒤집어쓴 아이가 엉엉 울고 있었다.

아무도 아이를 달랠 생각조차 못한 채

참혹한 광경에 넋을 잃고 있을 때였다.

어떤 남자가 시신에게 다가가더니 옷주머니를 뒤지고 손에 낀 가락지를 빼냈다.


아무도, 아무도 그 남자를 말리지 못했다.




할머니의 생의 무게가 한 세기에 가까워졌다.

뉴스를 보던 그녀가 대뜸 내게 소리쳤다.


"전쟁은 싫다! 전쟁이 싫어!"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동자는 기억을 거슬러 전쟁의 참상 한가운데 서 있는 듯 했다.


전쟁과 멀리 떨어져

전쟁을 벌이는 이들은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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