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이후 프랑스 문학과 트라우마의 기억
누군가의 비극은 문학이 된다. 그리고 비극이 시대적일 때는 하나의 장르가 되기도 한다.
홀로코스트가 그렇다. 우리는 어떤 책을 펼치기 전에, 이미 한 문장을 알고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 테오도르 아도르노 『프리즘』
아도르노의 이 문장은 마치 금지 표지처럼 남아, 문학의 입구를 막아선다.
하지만 문학은 금기를 피해 도망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앞에 멈춰 서서,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게 만든다.
정말로 쓰지 말아야 했던 걸까?
아니면,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아우슈비츠는 단지 한 사건이 아니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뒤에 무엇이 남는지에 대한 최악의 증거였다.
너무 잔인했던 폭력은 언급되지 않는다.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건, 말로 옮길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역사를 종종 말해지지 않는 폭력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devoir de mémoire
프랑스 문학은 이 난제를 기억해야 할 의무(devoir de mémoire)라는 이름으로 끌어안는다. 그 의무는 늘 형태를 요구한다.
증언은 언어를 필요로 하고, 언어는 언제나 부족하다. 직접 말하면 다시 상처가 된다. 너무 정확하면 오히려 거짓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프랑스 작가들은 정면 돌파 대신, 문학이 가진 가장 오래된 무기들을 사용했다. 침묵, 끊김, 공백, 파편, 반복 같은 서사를 일부러 부러뜨리고, 허구와 자전적 기억을 교차시키고, 심지어는 '기억할 수 없음' 자체를 쓰는 방식으로 트라우마를 우회한다.
그 결과, 텍스트의 역할도 달라졌다. 비극적인 기억을 읽는 사람들은 더 이상 안전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지 않는다. 문학은 사람들을 목격에 가까운 위치로 불러오게 만들었다.
아우슈비츠 이후, 프랑스 문학이 트라우마를 내용이 아니라 형식으로까지 끌어내며 무엇을 바꾸었는지.
왜 어떤 작가들은 수십 년의 침묵 끝에야 붓을 들었는지, 그리고 그 문학적 실험이 오늘의 우리에게, 기억을 대하는 방식 자체를 어떻게 다시 묻게 하는지 물어왔다.
말할 수 없는 역사, 그렇지만 써야 했던 기억.
프랑스 문학은 그 불가능한 과제를 문학으로 성립시킨다.
비극이 장르가 되는 순간은, 어쩌면 여기서 시작된다.
나에겐
유년기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2세대인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은 아주 낯선 방식으로 자신의 유년 시절을 기록한다. 그는 자전적 소설 『W 또는 유년의 기억(W ou le souvenir d’enfance)』을 통해 기억이 비어 있다는 사실부터 써 내려가며, 자전과 허구를 교차시키는 이중 서사로 말할 수 없는 상실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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