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 voulais vivre』와 하이퍼텍스트로 다시 쓰는 심판의 시선
1628년 9월, 아르망티에르, 한 여자가 소리를 내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목에서부터 올라오는 비명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유리창에 비친 얼굴은 아름다웠고, 집안 풍경을 음산하게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유리가 깨졌다.
유리가 산산조각나는 소리보다 손이 먼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손은 곧바로 창틀을 낚아챘고, 여닫이 창문을 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창문이 무언가에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몇 번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는 무릎이 창틀을 부수고 들어왔다.
부서진 창문의 나무와 유리 조각이 방 안으로 쏟아졌다.
아토스는 그녀로부터 세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 서 있었다.
한때는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남자가 공포의 존재가 되어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칼자루가 옷 사이로 번쩍였다.
동시에 그녀는 반대편 문을 향해 뛰어갔다.
하지만 문을 여는 순간, 문 밖에는 다른 남성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그리고 그녀를 처리하려던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이기 전에 재판을 먼저 합시다!"
기묘하게 정중한, 폭력적인 말투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를 잡기 위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거대한 몸집. 좋은 옷차림 속의 날카로움.
그리고 영어를 쓰는 남자들까지 그녀를 둘러쌌다.
그중에는 붉은 망토를 걸친 사내도 함께 서 있었다.
그녀는 열 명의 남성에게 둘러싸였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반짝이는 검집을 옆구리차고, 손은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방 안을 훑어보았지만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금세 그녀는 등이 벽에 닿는 느낌을 받았다.
아토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판사가 재판을 열 듯, 말을 하기 시작했다.
"밀라디, 이제 앞으로 나와라."
그녀는 석회 바른 벽에 등을 붙인 채 숨을 몰아 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면, 눈 속의 공포와 반항의 의지가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네 죄를 심판하러 왔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봐."
문학에서 악당은 대개 기능적으로 소모된다. 이야기가 속도를 올릴 때, 누군가를 미워해야 할 때, 주인공의 고통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 때, 가장 빠른 지름길은 그럴듯한 악당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가끔은 그 존재만으로도 서사가 굴러갈 만큼, 잘 만들어진 악당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이제 한 작품의 악당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 낯설지 않다.
이렇게 두 개 이상 텍스트가 인물, 장소, 세계와 배경적 설정을 공유하는 작법을 트랑스텍스추얼리테(transtextualité)이라고 부른다. (더 정확하게는 하이퍼텍추얼리테(hypertextualité)라고 구분한다)
제라르 주네트(Gérard Genette)가 정리한 이 개념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작품의 설정을 빌려와 새로운 이야기를 덧씌우는데, 그 과정에서 소모되었던 인물을 되살려내 새로운 의미를 재배치하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서사는 새 이야기인 동시에 원작의 분위기가 겹쳐져 읽히게 된다. 이미 알고 있는 인물과 세계가 그대로 재사용되는 만큼 진입 장벽이 낮아지지만, 대신 재미의 중심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서 같은 사건이 왜 이렇게 달리 보이는지로 이동한다.
원작에서 기능적으로 소모되었던 악당이나 조연이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과거의 장면들을 새 기준으로 다시 정렬하게 된다. 한때 설명이나 장치에 불과했던 존재가 서사의 원인과 책임, 도덕의 배치를 재편하는 과정을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변형의 쾌감은, 익숙한 세계를 빌려오되 그 위에 전혀 다른 무게중심을 얹는 것에 있다. 이미 알고 있는, 혹은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되새기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다시 조명하는 이야기에서 집중해야 하는 것은 그 무게중심이 악당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기억되는가 위로 옮겨갈 때 생기는 서늘함이다.
아델라이드(Adélaïde de Clermont-Tonnerre)의 『나는 살고 싶었다(Je voulais vivre)』는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국민 고전인 『삼총사(Les Trois Mousquetaires)』의 설정을 빌려온 작품이다. 『삼총사』에 등장하는 악당 밀라디(Milady)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해부한다.
카멜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 사건(Meursault, contre-enquête)』에서도 그랬지만, 프랑스의 트랑스텍스추얼리테 작품들에는 시대적 감각이 반영되어 있다.
소설은 카뮈의 『이방인』에서 이름 없이 아랍인으로만 등장한 작품 속 희생자에 집중함으로써 프랑스 식민주의와 알제리 전후 사회의 시대상을 신문한다. 원작이 제시했던 부조리와 죄의 문제를, 가해자와 피해자의 비대칭성과 기억의 정치학이라는 동시대의 감각 위에서 재조명하고 있다.
아델라이드의 소설이 보여주는 시대 감각도 이 지점에 있다. 『나는 살고 싶었다』는 망토와 검, 궁정 음모를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리슐리외의 정치가 어떻게 괴물을 만들어내는지, 같은 행동이 남성에게는 용기이고 여성에게는 방종과 부도덕으로 읽히는지를 집요하게 묻는다. 악을 설명하기보다, 악당이라는 자리가 어떻게 배치되는지를 보여준다.
밀라디를 순진한 피해자로 세탁하지도, 그렇다고 여전히 일차원적 악녀로 남겨두지도 않는다. 그녀를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그려내는 방식은, 권력과 젠더가 뒤엉킨 폭력의 회로를 드러내려는 동시대의 감수성과 맞닿아 있다.
밀라디는 원작 『삼총사』에서 등장하는 순간 이미 결론이 정해진 인물이었다. 아토스는 젊은 시절 아름다운 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게 된다.
어느 날, 사냥 중에 아내가 낙마하면서 정신을 잃자 아토스는 숨을 쉬게 하기 위해 그녀의 옷을 찢게 된다. 그때 그녀의 어깨에서 백합 문신(Fleur-de-lis)을 발견한다. 백합 문신은 당시 프랑스에서 중범죄자에게 찍던 낙인이었다.
귀족으로서 영지 내 사법권을 가지고 있던 아토스는 배신감과 수치심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아내를 나무에 매달아 직접 처형을 진행한다. 그 후 그는 삶에 환멸을 느끼고 자신의 신분을 버린 채 아토스라는 이름으로 총사대에 입대해 술로 세월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죽은 줄 알았던 아내가 살아 돌아오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녀는 리슐리외 추기경의 첩보원인 밀라디 드 윈터가 되어 나타나면서 이 둘의 관계는 계속 이어진다.
밀라디는 주인공들의 우정과 용기, 명예를 반사광처럼 더 빛나게 만드는 대척점으로 배치된다. 그녀는 매혹과 위장, 잔혹함을 하나의 기술처럼 다루면서 서사를 이끌어 간다.
그리고 등장하는 심판의 시간. 아르망티에르의 사적 재판이라고 부른다.
결국 붙잡힌 밀라디는 열 명의 남성들에게 둘러싸인 채 사적으로 재판을 받게 된다. 그 결과 과거의 사형 집행인이었던 이에 의해 처형을 당하게 된다.
원작에서 이 장면은 정의를 실현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드는 가장 극적인 장면으로 읽힌다. 그리고 소설 『나는 살고 싶었다』이 장면을 재연하면서 시작한다.
작품은 밀라디의 악행 자체보다 그녀가 악녀라고 확정되는 방식에 집중한다. 원작에서는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남성들에 의해서 밀라디의 악행이 서술된다. 그녀의 존재 자체를 음모, 유혹, 교활함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사적인 원한으로 뜨거워져 있는 이들에게는 그녀가 했던 행동에 대한 설명 대신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가 더 중요했다.
그리고 밀라디 본인에게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설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원래 그런 여자라는 이유뿐이었다.
선녀의 입장에서 바라본 선녀와 나무꾼이 유쾌하지 않은 것처럼 밀라디의 입장에서 사적 심판은 정의로웠을까? 그녀를 둘러싼 한쪽(남성들) 말만으로 개인을 심판하는 행위를 정의라고 결론 내리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사실 이런 구조는 이미 익숙하다. 우리는 여러 번, 악당에게 서사를 입혀 한쪽 시선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였음을 드러내는 작품들을 즐겨왔다.
서쪽의 마녀를 서사 중심으로 끌어와 승자의 역사에 붙은 설명문을 다시 쓰는 작품은 얼마 전 두 번째 영화로 소개되었고, 도시의 폭력과 빈곤, 조롱과 방치의 배치 속에서 한 남자가 괴물로 기록되는 순간을 시대의 명작으로 그린다.
익숙한 구조임에도 이 작품이 높게 평가받는 이유는 선과 악이라는 시선이 어떻게 구조적으로 진실이 되어 가는지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누가 악당이고, 누가 영웅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가 아니라 그녀가 어떤 상황에서 악녀로 기억되었는지에 포커스를 맞춘다.
재해석한 장면에서는 자신을 포위한 남자들이 죽어도 마땅한 이유를 늘어놓는 중에도 밀라디는 무릎 꿇은 채 말이 없다. 그리고 머리채를 잡혀 끌려나가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그저 살고 싶었다는 생각뿐이다.
나는 스물다섯이었다.
나는 여자였고,
어머니였고,
프랑스를 위해 일했다.
그리고 나는 살고 싶었다.
악당은 언제 만들어질까?
칼을 들었을 때가 아니라, 칼끝이 누군가를 향하기 시작했을 때 심판은 시작된다. 결론은 내려지고, 이후의 모든 행동은 악이 된다.
이쯤 되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득은 유혹으로, 침묵은 음모로, 반격은 잔혹함으로 해석되기 시작하는 순간 입을 여는 것은 위험하다.
"걔는 원래 그래"
놀랍도록 효율적인 문장이다. 설명을 절약하고, 감정을 간결하게, 그리고 관계를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게 만든다.
악당을 만드는 일.
극한의 효율에 미친 사회에서 이보다 편한 방법은 없다.
그렇게 우리는 늘 악당을 찾는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은 바로 이런 익숙함에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