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된다"고 말해야 한다

『Cœur』와 Psychogénéalogie

by 프렌치 북스토어
지금 저는 가능한 한 최대로 타락한 밑바닥의 삶으로 내려가 보려 합니다.
왜냐고요? 저는 시인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예언자가 되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저도 거의 설명할 수가 없거든요.
마치 모든 감각들이 혼돈의 상태가 되어 알 수 없는 곳으로 옮겨 같 것 같은 느낌입니다.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강해져야 합니다.
저는 제 스스로가 시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시인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이건 제 잘못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건 틀린 표현입니다. "나는 생각된다"라고 말해야 해야 합니다. 말장난 같다면 용서해 주세요.

— 랭보가 스승인 조르주 이잠바르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랭보의 아버지는 랭보가 여섯 살 때 집을 나갔다. 군인이었던 그의 아버지에게 전장을 따라 옮겨 다니는 일은 삶의 일부였다. 하지만 어린 랭보에게 그 리듬은 곧 결핍의 규칙이었다.


떠나간 아버지가 언젠가 돌아올 거라는 기대는 여섯 살 아이에게 사실상 주문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주문은 언제나 떠나간 쪽보다 기다리는 쪽에서 더 간절한 법이다.


반항아이자 천재라고 불리는 랭보의 이런 과거가 더욱 섬뜩한 이유는 그의 집안에서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떠난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구두장이로 알려진 랭보의 증조할아버지 역시 여섯 살 난 아들을 두고 집을 떠나버렸다.


프랑스 문학계에서는 랭보를 '발바닥에 바람을 달고 있는 남자(l’homme aux semelles de vent)'라고 부른다. 그는 끊임없이 도망치듯 떠돌았고, 한 곳에 정착하지 않는, 어쩌면 정착할 수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도망쳤고, 사라졌고,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었다.


그의 마지막 또한 기묘하게 익숙했다. 그는 장 랭보(Jean Rimbaud)라고 적힌 관에 실려 샤를르빌까지 옮겨졌다. 그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흔히 자신 삶을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하고, 선택한 결과가 내 삶을 만들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질병에도 가족력이라는 것이 있듯이, 우리의 삶은 우리가 아는 가까운 누군가와 무척이나 닮아 있다. 끊어낼 수 없는 지긋지긋한 고리처럼, 부모의 삶이 너무나도 똑같이 반복되는 것을 본다.


여섯 살에 떠나가버린 아버지, 떠돌아다니는 삶, 그리고 낯선 곳에서의 맞이한 마지막까지, 랭보 자신이 선택한 삶은 가난이 대물림된다는 유명한 저서처럼, 한 곳에 머물 수 없는 기질이 그에게 대물림되었다.


그런 기질은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그 시작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내려오는 관성을 가장 먼저 배우는 건, 늘 남겨진 쪽이다.





티볼트 드 몽테귀(Thibault de Montaigu)의 소설 『심장(Cœur)』은 왜 이런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반감에서 시작한다. 허풍만 잔뜩 늘어놓는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 그의 삶은 아들인 티보가 보기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 투성이었다.


하지만 '왜?'라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작품은 그 순간을 겪어내면서 아버지를 향한 왜라는 질문이 어떻게 자신에게 와닿는지를 그린다.


그렇게 한 사람의 삶으로 다른 누군가의 삶이 설명되는 순간, 작은 위안을 받는 동시에 삶의 굴레라는 더 무거운 형태가 되어 굳어진다.


소설은 작가 티보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그는 어느 날 병든 아버지 엠마뉴엘로부터 자신들의 조상 루이에 대해 써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면서 시작한다.


우리 집안의
한 남자에 대해 써줘


그는 루이의 죽음이 왜 지금 아버지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병세로 건강이 나빠진 아버지는 왜 흘러간 가족의 영웅담이 필요한 걸까? 티보는 그저 한 편의 시시한 가족 서사를 써 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티보는 1914년에 전장에서 전사한 루이의 기록을 찾기 시작했다. 가족이 보관해 온 사진과 편지, 낡은 문서함, 군 관련 기록과 연대기, 이름이 반복되는 족보의 행간을 뒤지며 한 사람의 삶을 복원해 나갔다.


하지만 자료를 모을수록 티보는 새로운 시각으로 루이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그저 과거의 한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집안 전체를 붙들고 있는 이야기의 중심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루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표정이 달라졌다. 어떤 문장은 끊임없이 반복해서 말했고, 또 어떤 장면에서는 매번 말을 잊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루이에 대한 자료 수집을 이어가던 중 티보는 예상치 못한 장애물에 부딪히게 된다. 문서가 말해주는 사실과 가족이 기억하는 이야기 사이에 차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어떤 기록은 불분명했다. 누군가의 이름은 의도적으로 지워져 있었다. 티보는 그 틈을 메우기 위해 사람들의 기억에서 루이를 찾아내야만 했다. 그는 친척들을 찾아가 루이에 대해 물었다.


티보는 친척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공통된 반응을 찾아내게 된다. 누구는 루이 이야기를 꺼내면 갑자기 목소리가 높아졌고, 다른 누군가는 웃으며 그의 이야기를 얼버무렸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려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반응들이 그들과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똑같이 발견된다는 사실이었다. 그 순간 티보 자신도 그가 느꼈던 감정들을 돌아보게 된다.


루이를 조사하는 중에 특정한 단어, 특정한 장면, 특정한 날짜를 만나면 이유 없이 불안해졌다. 반대로 어떤 순간에는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흥분됐다.


마치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비슷한 어쩌면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티보는 더 많은 사실을 수집하는 대신 이제껏 수집한 기록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집중하기로 한다. 같은 종류의 부재, 같은 종류의 과장, 같은 종류의 침묵이 이상할 만큼 자주 나타났다. 그리고 그 패턴은 여지없이 다음 세대로 대물림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한 줄로는 정리되지 않는 유사함. 이러한 세대를 이어 전해지는 유사성을 심리-계보학(psychogénéalogie)이라고 설명한다.


심리-계보학은 세대를 거쳐 반복되는 삶의 방식을 설명한다. 한 개인의 기질과 성격, 선택으로만 설명되기 어려운 삶의 패턴을 가족의 연대적 서사로 해석하려는 시선을 의미한다.


과거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상처가 어떻게 삶에 영향을 주었는지, 상처가 다음 세대로 어떻게 변이 되어 전달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이러한 시선에는 과거로부터 내려온 습관이나 가치관, 혹은 삶을 대하는 태도나 방식이 어떤 욕망과 공포를 만들어냈는지를 파헤친다.


그리고 이러한 되물림은 침묵에서 시작한다고 설명한다. 가족 누군가가 받은 상처, 수치심, 두려움, 갈등 같은 것들은 언급하기 싫은 순간으로 기억된다. 이러한 사건은 그(녀)의 삶 속에서 묻히고 지워지는 대신, 결핍을 초래하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핍은 형태를 바꾸어 다른 세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대부분 이런 상처는 사건 자체보다도, 그때 느꼈던 감정을 더 깊이 숨겨버리는 경우가 많다. 참혹했던 순간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흐릿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때 겪었던 두려움, 수치심, 외로움 같은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우리가 다 잊었다고 믿는 사이 다른 얼굴을 하고 다시 올라온다.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거나, 예의와 체면에 과하게 민감해지고, 이유 없이 불편해지거나 사소한 말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어떤 관계에 집착하거나 스스로를 끝없이 자책하는 모습들 역시 이런 상처로 인해 생긴 결핍이 만들어낸 하나의 습관이라고 설명한다.


같은 연장선상에서 보면 온전히 내 의지로만 선택한 것이 얼마나 될지 의심하게 된다. 이미 만들어진 규칙과 분위기에서 자유로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랭보는 이러한 되물림의 굴레 안에서 방황하면서, '생각한다'가 아니라 '사람들은 생각된다(on me pense)'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주체가 되기보다 누군가의 시선과 기대 속에서 생각당하고 있는 존재라고 느꼈는지도.


제노소시오그램(génosociogramme)을 활용하면 이런 감정의 되물림의 흔적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가계도에 사회적 정보를 더한 도표는 가족의 연대사를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제노소시오그램은 한 가족이 세대를 거치면서 어떤 사건들을 겪었고, 어떤 방식으로 삶을 지탱해 왔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상처를 받았고, 어떤 말이 사라지고, 어떤 역할이 강조되었는지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도록 관계도를 작성한다.


이때 누가와 누구가 결혼했다, 누가는 누구의 아들이다 같은 정보만을 기록하지 않는다. 출생과 사망뿐 아니라, 가족이 겪은 이사와 단절, 파산과 성공, 전쟁과 상실, 병과 사고, 우울과 중독, 유산과 비밀스러운 죽음까지 삶의 사회적 흔적을 함께 기록한다.


이러한 기록은 이름 옆에 적힌 단순한 날짜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지금 나의 슬픔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어떤 결핍이 어느 세대에서 짙어졌는지 보여주는 작은 단서로 사용된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른 도형으로 표시하고, 결혼과 이혼, 동거와 단절을 선으로 구분한다. 사고, 병, 죽음, 실종 같은 중요한 사건은 별도의 기호로 표시한다. 그리고 중요한 건, 모른다는 사실도 함께 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르는 날짜는 빈칸으로 두고,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는 관계는 점선으로 남긴다.


제노소시오그램을 통해서 알아내야 할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는 빈칸이 반복되는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서사는 언제나 말의 형태로만 남지 않는다. 어떤 가족에게는 침묵으로 남고, 다른 세대에서는 과장되어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이는 반복의 패턴을 눈여겨봐야 한다. 어떠한 비극은 여러 세대에 걸쳐서 반복해서 나타나기도 한다. 누군가의 과잉 성취가 다른 누군가의 수치와 맞물려 있고, 누군가의 부재가 다른 누군가의 과잉 책임감을 만든다.


반복을 알아차리는 순간,
운명이 아니라 선택지가 된다


작품 마지막에 티보는 1914년 루이가 살았던 집을 찾아간다. 물론 루이의 흔적이라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100년도 더 지난 지금, 그는 과거 루이가 서 있던 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이와 함께였다.


루이의 마지막이 남아 있는 곳에서 아이는 자신의 아빠가 떠나가 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티보는 우는 아이를 달래며 자신은 오래도록 옆에 있겠다고 안심시킨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에는 그의 아버지가 남긴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작품의 마지막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아주 조용한 방식으로 몇 세대를 가로지르는 감정의 되물림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914년이라는 숫자는 이제 역사책 속 연도가 되었지만, 루이가 살았던 그 집, 그가 마지막으로 숨 쉬던 공간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사람을 맞이하고 있다. 티보는 그 자리에 서고, 또 그 곁에는 자신의 아이가 서 있다.


과거의 누군가가 서 있었을 자리 위에, 전혀 다른 시대의 두 사람이 다시 서 있는 장면으로 거창한 설명 없이 시간이 한 점으로 접히는 듯한 느낌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접힌 시간의 한가운데에서, 아이가 느끼는 감정은 역사적 비극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주 사적인 두려움이다. 루이와 티보, 그리고 그 위 세대까지 이어져 온 떠남과 남겨짐의 감정이, 이제는 언어도, 사연도 모르는 아이에서 또 한 번 새겨지는 순간처럼 보인다.


개인적으로 아주 조심스러운 희망도 함께 읽었다. 루이는 혼자 그 집을 떠나야 했지만, 티보는 아이의 손을 잡고 그곳을 다시 찾았다. 과거의 상처가 만들어낸 공간에, 이번에는 함께 서 보는 선택을 한 것이다.


아이는 두려워하지만, 그 두려움을 느끼는 바로 옆에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다르다. 상처의 대물림이 계속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면서도, 그 되물림을 의식하고 멈추려는 한 사람의 시도가 동시에 느껴졌다.


바로 이 모순된 양가적인 감정, 되물림과 끊어내기의 가능성이 한 장면 안에 겹쳐 있는 점이 이 소설의 결말을 잊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이다.


소설은 "모든 상처는 치유되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상처가 새롭게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는 순간을 보여주고, 그 옆에서 누군가 그 상처를 함께 바라보려고 애쓰는 장면을 남긴다. 그 모습은 과거의 비극을 반복하는 실루엣이자, 동시에 그 반복을 언젠가 멈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용한 약속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