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떠나지 않았나,
아니, 왜 떠날 수 없었나

『La Nuit au cœur』와 페미니사이드

by 프렌치 북스토어

어느 날 한 여성 작가는 시를 쓰는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처음부터 그녀의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녀의 글을 고쳐주는 사람처럼 굴었다.


칭찬은 늘 정확한 지점에 꽂혔다. 그리고 그의 조언은 늘 권위의 형태로 따라왔다.


문법, 시제, 문장의 호흡 같은 것들이 둘 사이의 첫 대화가 되었다.

그는 "너를 이해한다"는 말이 대신 "너의 문장을 이해한다"는 말로 관계의 문을 열었다.


여성 작가는 그 접근이 이상하게도 달콤했다.

누군가가 자기 문장에 관심을 보인다는 일은, 자기 존재가 잠깐 더 선명해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가 보여주는 선명함의 가장자리에 어둠이 끼어드는 순간도 분명 존재했다.

남자의 시선이 너무 오래 머무를 때, 칭찬이 선물이라기보다 표식처럼 다가왔다.

문득, 그리고 아주 가끔씩 그에게서 설명하기 어려운 서늘함이 느껴지고는 했다.

하지만 기분 탓으로 돌렸고, 그녀는 다음 문장으로 넘어갔다.


관계도 그렇게, 다음으로 넘어갔다.

둘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세계가 조금씩 재배치되었다.

그녀의 하루는 쓰기에서 관리로 이동했다.


관리라는 말에는 이상하게도 끝이 없었다.

살림을 관리했고, 분위기를 관리했고, 남자의 기분을 관리했고, 무엇보다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말을 관리했다.


말은 점점 조심스러워졌다. 그리고 그 조심은 점차 습관이 되었다.


"아까 누구랑 있었어?"

"왜 늦었어?"

"그 사람은 왜 너한테 웃었지?"


처음에는 사소한 질문들이었다.

여자는 설명했고, 다시 설명했다.

그녀는 오해가 생기지 않을지, 설명이 충분한지를 스스로를 검열해야 했다.

그렇게 같은 하루를 다른 문장으로 반복해서 설명해야 하는 시간은 점점 늘어났다.


남자의 의심은 점점 커졌다.

"그럴 리 없다"는 말로 지워지지 않는 종류의 의심을 내보이곤 했다.


여자가 일상에서 스친 모든 사람이 의심의 재료가 되었다.

직장 동료, 버스에서 마주친 사람, 심지어는 계산대에서 내민 손까지도.

그녀는 늘 어떤 재판의 증언처럼 자기 하루를 제출해야 했다.


그녀가 자신의 일상을 입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와의 관계가 더는 사랑이 아니라 믿음을 갱신하기 위한 끝없는 절차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때로 침묵으로, 때로는 폭발로 그녀를 다뤘다.

침묵은 처벌처럼 길어졌고, 폭발은 경고처럼 갑자기 다가왔다.


여자는 그 리듬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떤 기분일까?', '지금은 어느 상태일까?'

그 리듬을 읽는 능력이 발전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더 갇혀 있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의 기분을 읽는 능력은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시켜 주는 기술이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그를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기술이기도 했다.


그녀가 '나는 이 삶에 갇혔지?'라는 질문을 떠올렸다가도, 곧바로 '내가 더 잘하면 괜찮아질거야'로 시선은 되돌아갔다.

도돌이표 같은 시간은 같은 구간을 맴돌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 되돌아감이, 가장 익숙한 길이 되었다.


어느 날 밤, 이런 익숙함 체계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계는 그녀의 몸이 먼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집 안의 공기가 갑자기 바뀌었고, 그녀는 문과 문 사이를 오갔다.

손이 떨리고,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평범한 행동들 앞에서 매번 멈칫거려야만 했다.


몸은 도망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은 설명하려 했다.

설명은 언제나 늦게 도착했다.


남자는 놀랍도록 침착한 얼굴로 그 상황을 정리하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침착함이 오히려 그녀를 더욱 처참하게 무너뜨렸다.

공포는 비명보다 먼저 손끝을 흔들었고, 숨은 문장보다 먼저 끊어졌다.


그렇게 새벽이 올 때까지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밤이 끝나도 몸의 기억은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녀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녀는 결국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데리러 와 달라는 부탁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

물론 그 선택조차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더 잔인한 고백이 그다음에 따라왔다.

떠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떠난 뒤에도 그녀가 머물었던 그 공간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왜 다시 그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만 했을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는 선택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상하게도 너무나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고립, 공포, 경제적 조건, 관계의 오래된 습관,

그리고 무엇보다 이 정도는 내가 감당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해 온 시간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선택을 논리적으로 납득시킬 수 있는 이유조차 없었다.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곧 사랑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돌아가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고 그녀는 결국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그녀의 삶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꿈과 기억, 검색창의 이름, 어떤 사진 한 장 같은 방식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그녀는 그의 잔상을 지우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분해해 언어로 만들고 싶어 했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는 자신의 몸이 그 밤을 혼자 떠안지 않게 하기 위해서.


(※ Nathacha Appanah의 『La Nuit au cœur』의 일부를 각색)






최근 페미니사이드(féminicide)라는 단어를 자주 듣는다.

남편이나 연인, 혹은 헤어진 파트너가 소유욕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여성을 살해하는 범죄를 가리킨다.


이 말이 끔찍한 이유는 그저 살인이라는 결과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익숙한 공간, 사랑하는 사람, 가장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비극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문제를 부르는 단어가 있다.

'데이트 폭력'

사랑하는, 어쩌면 한때 사랑했던 누군가가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일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페미니사이드는 더 멀리 본다.

가까운 관계에서 벌어진 비극이 어떻게 되풀이되는지 묻는다.


그리고 가장 눈여겨볼 부분은 이런 종류의 범죄를 가해자 개인의 우발적 감정이나 피해자 개인의 비극으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관계 안에서 반복되는 통제, 가스라이팅, 고립, 감시가 어떻게 하나의 문법처럼 굳어지고, 그 문법이 어떻게 비극을 되풀이하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페미니사이드는 단순한 연인 간 범죄가 아니라, 권력 불균형이 낳는 인권 침해로서의 폭력이라고 정의한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는 언제나 있었다.

그럼에도 페미니사이드라는 별도의 단어까지 만들어가면서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반복되는 불행은 결국 여성의 삶을 조금씩 잠식해 버리는 관계적 구조, 그리고 끝내 죽음으로 밀어 넣는 사회적 과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회는 여성을 향한 범죄를 개인의 일탈로 축소하지 않는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족이나 연인 사이에서 발생한 일상적이고, 장기적인 범죄를 프랑스 사회가 암묵적으로 허용하고 방치해 온 구조적 문제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왜곡된 성 인식과 불균형한 권력관계, 이러한 관계가 낳은 은밀하고 체계적인 폭력.

그리고 매년 비슷한 동기와 수법으로 되풀이되는 비극은 페미니사이드라는 단어를 만들어낼 만큼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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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선의 변화를 섬세하면서도 날카롭게 따라가는 작품이 나타샤 아파나(Nathacha Appanah)의 『마음속의 밤(La Nuit au cœur)』이다.

이 소설은 세 여성의 이야기를 따라가지만, 그 서사들이 도착하는 곳은 모두 동일하다.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이 만들어지는 방식, 폭력의 문법에 집중한다.


첫 번째 서사에서 화자(나)는 한 남성 시인과의 관계 속에서 가스라이팅과 데이트 폭력을 겪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어서 알제리 출신 여성이 남편의 통제와 제도의 무력함 속에서 끔찍한 결말로 떠밀려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평범한 여성이 남편의 의처증과 폭력에 어떻게 희생되고 조작되는지에 집중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세 여성들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은 모두 다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얼굴의 폭력이 같은 구조 속에서 공유되고 있는 사실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이런 비극은
왜 계속 반복될까?


좋은 사람을 만나면 된다는 식의 논리는, 이상한 사람만 거르면 된다는 식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고 말하는 순간, 폭력은 다시 개인의 안목과 개인의 선택으로 환원된다. 그리고 사회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하지만 페미니사이드는 누군가의 불운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연인이라고 불리는 관계 아래 통제와 구속과 고립이 정상처럼 스며들고, 위험 신호는 사소한 다툼으로 축소된다.

그렇게 시기를 놓치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지경에 이를 때까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왜 떠나지 못했냐는 질문이 먼저 튀어나오는 사회에서 불행을 함께 짊어질 이유는 없다.

남녀 사이는 그 둘 만이 안다는 착각, 남의 집안일에 참견해야 좋을 게 없다는 식의 관념 아래서 떠날 수 있는 선택은 늘 개인에게 떠넘겨진다.


아파나의 소설 역시 이러한 반복되는 비극을 개인적 이유로 설명하지 않는다.

비극이 반복되는, 비극을 가능하게 만드는 규칙을 해부한다.


작품은 가까워지는 방식, 고립될 수밖에 없는 이유, 감시가 생활로 스며드는 모습을 다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과와 평온으로 이어지는 일상은 결말이 아니라 다음 폭력으로 넘어가기 위한 휴지기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폭력은 폭력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은 때때로 다정함과 반성의 얼굴을 하고 되돌아온다.

그 틈에서 사람들은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고, 그 기대는 다시 그녀들의 발목을 잡는다.


그녀들이 왜 떠날 수 없게 되었는지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성격이나 의지 문제라고 단정 짓고 공동의 책임을 회피하는 시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같은 비극이 반복된다면, 다른 누군가는 그런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비극이 반복되는 공식에 집중해야 한다.


어떻게 다른 인간관계를 끊어내는지 유의해서 살펴봐야 한다.

경제적 이유, 혹은 아이 때문에, 체류 자격이 필요해서,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주변의 시선과 수치심, 자존심과 체면, 어쩌면 간혹 제도의 공백 때문에 누군가의 선택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폭력의 정도가 심각해질수록 관계를 끊어낼 수 없는 심리적 이유를 물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남아 있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선택할 수밖에 없음일 수 있다.


그리고 소설은 한 개념을 더 소개한다.

죽음이 임박했다는 두려움, PAMI(Peur d’Affronter une Mort Imminente)이다.


프랑스 사법의 맥락에서 쓰이는 이 개념은, 죽음이 임박했다고 느낀 공포로 인해 발생한 정신적 충격을 의미한다.


이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다.

두려움을 느낀 순간이다.

실제로 비극의 순간까지는 가지 않았더라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는 순간 자체도 독립된 피해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사람들이 쉽게 건네는 말들을 조용히 무너뜨린다.

"천만다행이다", "무사하니 과거는 다 잊자", "이제 다 끝난 일이다" 같은 문장들은 새로운 일상을 살아가기 위한 위로처럼 들린다.

하지만 동시에 폭력을 축소하고 덮어두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사람들은 지나간 일이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다잡고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끝나지 않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빠지는 순간, 이미 파괴된 것은 존재한다.


찰나의 한 순간이었지만, 한 번 공포를 겪어버린 몸은 그 뒤로도 종종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읽는다.

문턱에서 멈칫하고, 잠금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소리에 과민해지고, 숨이 얕아진다.

아무 일도 없지만, 아무 일도 없도록 하는 행동들에 더욱 신경 쓰게 된다.


누군가의 공포에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지나가버린 시간이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다만 이름이 없을 때보다 덜 고립될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