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사람들의 삶은 왜 모두 소설 같을까?

『Kolkhoze』와 자신의 삶으로 역사를 쓰는 방법들

by 프렌치 북스토어

프랑스 사람들은 모두 소설 같은 삶을 산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삶을 문학처럼 다루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는 아직 젊었다.

서른을 막 넘겼을 때였을 것이다.

아니면 내가 잘못 계산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확한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녀가 스스로를 역사학자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주저하던 나이였다는 점이다.


헬렌, 나중에 내가 어머니라고 부르게 될 그 여자는 그 시절에 콜호즈(Kolkhoze)를 연구하고 있었다.

콜호즈는 소련의 집단농장을 의미했다.


나는 그때 세상에 존재하긴 했지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아주 어렸거나, 아니면 아직 태어나지 전의 일이다.


헬렌은 파리의 도서관에 파묻혀 살다가 어느 여름 중앙아시아로 떠나게 된다.

가축의 전염병을 연구하러 가는 스위스와 프랑스의 교수들을 따라 통역이자 조수라는 애매한 신분으로 함께하게 되었다.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부하라.


이름만 들어도 이상하게 반짝이는 도시들에서 그녀는 일기를 쓰고, 노트를 채우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녀는 농장 책임자들을 인터뷰했고 내용을 정리했다.

그 노트 중 일부는 지금도 집 어딘가에 있다.


파란 줄이 쳐진 공책, 잉크가 번진 러시아어와 프랑스어, 연필로 적힌 숫자들.

내가 이 문장을 쓰기 위해 그 공책을 다시 뒤적였는지, 아니면 그냥 기억에 기대고 있는 건지, 솔직히 말해 나도 확신하지 못한다.


어쨌든 서류상으로 보자면, 그녀는 현지 조사를 동반한 역사 연구를 수행했다.

주제는 소비에트 집단농장의 형성과 변형이었다.


그녀는 콜호즈와 소브호즈의 차이를 이해하고 소련의 집단 노동의 이념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확인해야 했다.


교수들은 보고서를 원했고, 출판사는 나중에 그 보고서를 조금 덜 딱딱한 문장으로 손질한 책을 원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에 서점에서는 그 책을 역사/논픽션 코너에 꽂아두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콜호즈는, 학술서가 아니라 한밤 중에 일어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헬렌은 우리에게 몇 번이고 콜호즈와 소브호즈의 차이를 설명해 주었다.

정확한 문장은 이미 희미하지만, 대략 이런 식이었다.


콜호즈는 농민들이 집단으로 소유하는 농장이고, 소브호즈는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농장이라고 설명했다.

둘 다 실질적으로는 국가가 운영했지만, 콜호즈가 노동자에게는 약간 더 나은 조건이었다.

헬렌은 이 둘에 대해서 설명할 때마다 잠깐 말을 멈추고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곧 "그래도 콜호즈가 소브호즈보다는 낫지, 항상 그래"라고 덧붙였다.


"항상 그래"라는 말은 이론적 근거가 있는 결론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콜호즈가 더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실패한 제도라는 걸 알면서도, 농민들이 언젠가 다시 자기 땅을 가질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기대 같은 것.


그녀는 강의실에선 그 기대의 파산을 이렇게 설명했다.

하지만 집에서는 여전히 그 기대를 농담처럼 품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농담이 우리 삶 속으로 감염되듯 들어왔다.


아버지가 출장으로 집을 비운 어느 저녁이었다.

밖은 늦가을이라 금방 어두워졌고, 파리의 아파트는 창문이 작고 방음이 나빠 늘 약간 축축했다.


우리는 각자의 방에서 숙제를 하다가 헬렌이 부엌에서 설거지를 끝내고 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접시를 포개는 도자기 소리, 물을 잠그는 금속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복도 끝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밤은 콜호즈를 할까?"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내 머릿속의 지도가 뒤집혔다.

멀리 떨어진 중앙아시아의 평야, 소련의 집단농장이 파리 16구의 거실로 순식간에 밀려 들어왔다.


아직 어렸던 우리는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면서도, 질문할 필요는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누나는 먼저 자기 방에서 매트리스를 끌고 나왔다.

나는 베개 두 개와 이불을 들고 뒤를 따랐다.

막내는 헬렌의 침실로 뛰어 들어가 그녀의 침대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매트리스를 거실 바닥에 나란히 깔았다.

하나의 커다란 판처럼 맞붙여, 틈이 생기지 않아야 했다.

그리고 이불을 한 장으로 합쳤고, 베개들은 둘씩 겹쳐 놓았다.

침대가 아니라, 하나의 들판을 만드는 셈이었다.


헬렌은 웃으면서 말했다.


"봐, 이게 콜호즈야. 각자 침대에서 따로 자는 건 소브호즈고."


이런 문장은 그녀가 창조했을까, 아니면 내가 나중에 덧댄 것일까.

나는 지금도 확신하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는 건, 그녀가 그렇게 말했을 것이라는 강한 느낌뿐이다.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고, 내 기억을 검증해 줄 아카이브도 없다.


대신 나는 "헬렌은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라고 쓸 수밖에 없다. 이건 소설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 가족의 가장 믿을 만한 기록이기도 하면서.


어쨌든 그날 밤부터 우리 집에서 콜호즈는 두 개의 뜻을 갖게 되었다.

하나는 여전히 헬렌이 강의실에서 설명하는 경제 제도, 다른 하나는 아이 셋과 엄마가 이불 한 장 아래 모여 자는 밤의 이름이었다.








엠마뉴엘 카레르(Emmanuel Carrère)의 『콜호즈(Kolkhoze)』는 한 가족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한 시대의 연대기 같은 소설이다.


소설은 전후 보르도 부르주아 청년과 무국적 신분의 가난한 젊은 여자 헬렌이 만나 결혼하고, 그 여자가 이후 러시아사 연구의 권위자는, 4대에 걸친 가족의 역사가 소련의 탄생과 해체, 조국 조지아의 병합과 독립,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가로지른다.


작년 이 소설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문학상인 메디치상(Prix Médicis)을 받았다. 단순한 가족 회고록도 아니고, 냉정한 역사서라고 말할 수도 없고, 전통적인 의미의 소설에 머무르지도 않는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소설은 카레르 자신의 어머니, 헬렌(Hélène Carrère d’Encausse)의 삶을 기록하면서, 동시에 그를 둘러싼 침묵과 왜곡, 망각의 층위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로망 브레(roman vrai), 진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소설로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조지아·프랑스의 정치사에 바탕을 둔 장문의 에세이처럼 읽히기도 한다.


메디치상이 기존 작품의 형식을 깨는 신선한 작품을 선호해 왔던 만큼, 작년에는 소설 같지 않은 소설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작품은 어머니의 장례식 장면에서 출발해, 가계도와 아카이브, 인터뷰, 자기 기억을 뒤섞으면서 소련 집단농장의 용어였던 콜호즈(kolkhoze)를 가족의 내밀한 암호로 다시 써넣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과정에서 텍스트는 끊임없이 장르의 경계를 어지럽힌다.


어떤 페이지에서는 한 여성 역사학자의 전기를 읽고 있다가, 다음 페이지에서는 조국을 잃은 난민 가문의 서사시를, 또 다른 페이지에서는 작가 자신이 어머니에게 빚진 사랑과 상처를 더듬는 긴 고백을 넣는 식이다.


이러한 종잡을 수 없는 장르 불문의 작품을 개인적 진실과 집단적 역사 사이의 접촉면을 문학의 방식으로 드러냈다는 평가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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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이유를 듣는 순간 자연스럽게 두 프랑스 작가가 떠오른다. 아니 에르노(Annie Ernaux)와 파트릭 모디아노(Patrick Modiano). 모두 자기 삶을 쓴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개인의 경험으로 역사를 쓰는 방식은 서로 다른 차이점을 보여준다.


로망 브레(roman vrai)로 쓰는
가족-세계사


우선 카레르의 작품에서 가장 큰 특징은 진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는 소설(roman vrai)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삶이 어떻게 거대한 역사 속에서 휘말리고 이용되고 왜곡되는지에 집중한다.


특히 이번 작품은 카레르 자신과 가족을 전면에 세우고, 공개된 자료(아카이브·논문·언론 기사)와 사적인 기억을 뒤섞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내가 이 사람을, 그의 어머니(이 여성)를, 이 역사를 쓸 자격이 있지 직접적으로 묻는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역사·논픽션·소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의도적일 수도 있지만 장르를 구분 지을 수 없는 문체로 끊임없이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이 회고인지, 아니면 재구성한 허구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모호함을 직접적으로 대표하는 단어가 콜호즈이다. 소련 역사에서 등장하는 용어가 가족의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오면서 개인의 삶과 세계사가 하나의 언어 안에서 겹쳐지는 부분을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개인의 삶을
사회적 문서로 변환하는
글쓰기


에르노 역시 자신의 경험과 가족사를 쓰지만, 자기 삶을 대하는 태도는 카레르와 정반대에 가깝다.


그녀는 자신의 작업을 자기-사회-전기(autosociobiographie)라고 부르면서 개인의 감정을 사회학적·역사적 자료로 평평하게 펼쳐놓는 것을 추구했다.


특히 그녀는 작품 안에서 나(je)라는 주어를 거의 쓰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신 우리(nous/on)와 그녀(elle)를 사용했는데, 이러한 시선은 자신의 경험을 곧바로 프랑스 전후 세대를 겪어온 전체 집단의 자서전으로 받아들여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객관성은 과거를 생생하게 되살려내는 방식으로 글에 신뢰를 쌓아 갔다. 정확한 날짜와 당시에 유행했던 광고, 유행가, 선거 홍보 문구, 소비문화, 낙태·피임, 계급 이동 같은 요소들이 얽혀서 프랑스 사회사의 연표로 재조합되었다.


에르노는 개인의 기억을 비개인화하는 방식을 취했다. '나는 이렇게 느꼈다'라는 시선보다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라는 시선으로 기록했다.


이러한 특징은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카레르가 어머니와의 애증, 죄책감, 사랑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반면, 에르노는 부모·연인·자녀를 이야기할 때조차 감정을 빼고 차가운 문체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게 에르노의 작품들은 문학 작품이라기보다 사회학적 문서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다.


사라지는 역사,
구멍 난 기억의 소설


모디아노도 자기 삶과 가족사를 끊임없이 변주하지만, 그가 주목한 부분은 무엇을 알 수 없는가에 있었다. 그는 점령기 파리, 유대인 박해, 협력·침묵의 역사 같은 소재를 반복하면서, 개인의 트라우마와 국가의 역사적 죄책감을 겹쳐서 표현했다.


사람들은 모디아노의 소설은 자전성과 역사소설이 섞인 오토픽션/바이오픽션의 형식을 빌린 추적의 서사라고 설명한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르고 있는 사실을 추적하는 그만의 작법에 대한 평가이다.


카레르가 아카이브와 가족사를 통해 어머니를 이해하고, 화해하고, 동시에 비판하려는 쪽으로 나아간다면, 모디아노는 비슷한 가족, 전쟁, 실종이라는 사실적 배경을 가지고 끝까지 이해되지 않는 상태를 유지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에르노나 모디아노 이외에도 자신의 삶을 예술적 모티브로 삼는 작가들이 많이 있다.


프랑스 문학 안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를 통해 사회와 역사를 비추려는 작고 끈질긴 전통이 있었고, 지금도 다른 이름들로 계속 변주되고 있다.


이를테면 디디에 에리봉(Didier Eribon), 에두아르 루이(Édouard Louis), 델핀 드 비강(Delphine de Vigan), 크리스틴 앙고(Christine Angot), 에르베 기베르(Hervé Guibert) 같은 작가들이 비슷하게 자신의 경험을 한 개인의 회고가 아니라, 사회 구조와 집단 기억을 드러내는 장치로 사용한다.


프랑스 사람들의 삶이 유난히 소설 같아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겪어온 시간을 그냥 지나간 일로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한 번 더 바라보고, 구조를 찾고, 말을 붙이고, 문장으로 남기려는 집요함을 보여준다.


이런 시선이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일상을 문학으로 만든다.

누군가에게는 이미 지나간 사건인 것들이, 다른 이들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문장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