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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렌치 북스토어 Apr 10. 2024

스캔들에 가려진 마리 다구의 《넬리다》

프란츠 리스트와의 스캔들에 가려진 마리 다구의 작품 《넬리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매우 아름다웠다. 로렐라이*와 같았다. 날씬하고, 고상한 태도로, 매혹적이면서 우아한 그녀의 움직임에는 품격이 묻어났다. 그녀의 머리는 과감하게 올려져 있었고, 어깨 위로 녹아내리는 금처럼 흘러내리는 풍부한 머리카락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전형적이면서 클래식한 그녀의 얼굴에 퍼져 있는 현대적인 미는 눈부시게 화려하고 멜랑꼴리한 이상하고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녀를 살롱, 콘서트 홀, 오페라 하우스에서 눈에 띄지 않게 만들 수 없었다. 그녀는 페보르 생 제르맹**의 살롱에서조차 몇 안 되는 여인들 사이에서 돋보이는 우아함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었다."


로렐라이* : '요정의 바위'라는 뜻으로, 실제로 독일의 라인강에 있는 커다란 바위이다. 로렐라이 언덕은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설화의 배경이 된 곳으로, 라인강을 항해하는 뱃사람들이 요정의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도취되어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배가 물결에 휩쓸려서 암초에 부딪쳐 난파한다는 이야기의 배경이 된 곳이다.

페보르 생 제르맹** : 19세기 프랑스 귀족들이 모여 살던 지역. 파리의 귀족들은 이 지역에 모여 파티와 모임을 갖는 것으로 유명했다.


『헝가리 광시곡』, 『라 캄파넬라』, 『메피스토 왈츠』 등으로 유명한 헝가리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의 전기의 일부이다. 전기에서 그는 프랑스에서 열린 파티에서 한 여인에게 매혹돼버린다. 리스트를 매혹시킨 여인은 프랑스의 작가 마리 다구Marie d'Agoult이다.



마리 다구



다니엘 스턴Daniel Stern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던 마리 다구는 그녀의 문학 성취에 비해 리스트의 여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물론 그녀의 삶과 문학적 발자취에 있어 리스트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의 세기의 스캔들에 그녀의 작품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


마리 다구는 프랑스의 귀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당시 여성의 역할과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리스트와의 사랑을 계기로 그녀는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마리 다구는 탁월한 작가이자 사상가로서, 당대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해 날카롭고 통찰력 있는 논평을 남겼다. 그녀의 글은 사랑, 자유, 여성의 주체성 등의 사회적 이슈들을 다루었다.



마리 다구


마리 다구의 본명은 마리 캐서린 소피 드 플라비뉴Marie Catherine Sophie de Flavigny 로 1805년 12월 31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공작이자 군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마리가 22세가 되던 해인 1827년 15세 연상이었던 나폴레옹 시대의 군인, 샤를 루이 콩스탕 다구Charles Louis Constant d'Agoult 백작과 결혼을 시킨다. 마리는 샤를 백작과의 관계에서 두 딸을 낳는다.


1833년 초, 마리가 여성 합창단에서 초대되면서 프란츠 리스트와의 관계가 시작된다. 마리는 그녀의 회고록에서 리스트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내가 본 것 중 가장 특별한 사람이 느끼게 해 주었던 감각을 설명할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유령이라는 단어로 그를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그는 키가 크고 매우 마른 체격이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그의 커다란 바다빛 녹색 눈은 햇빛을 받으면 파도처럼 빛났다. 그의 표정에는 고통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그는 어쩔 줄 몰라했다. 마치 어둠으로 돌아갈 시간을 맞이할 유령처럼 산만하게 방을 가로질러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프란츠는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온 세상을 일깨울 정도로 생기 넘치고 독창성 있게 말했다. 젊은 마법사의 목소리가 내 앞에 무한한 세계를 열어주었고, 내 생각은 그 속으로 빠져들고 길을 잃었다. 우리 사이에는 매우 미숙하면서도 진지한, 심오하면서도 진지한 무언가가 있었다.”





프란츠 리스트와 마리 다구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마리의 나이는 28세였다. 리스트는 그녀보다 6살 더 어린 22세였다. 둘은 사회적 지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녀의 남편, 샤를 백작과의 관계는 이듬해 첫째 딸 루이스의 죽음으로 완전히 망가져 버린 후, 1835년 마리는 파리를 떠나 스위스 제네바에서 리스트와 함께 살기 시작한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 둘의 관계는 1838년 4월, 리스트가 헝가리의 홍수 피해자들을 위한 자선 콘서트에 참여하기 위해 비엔나에서 머물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마리는 리스트가 그녀의 곁에 있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리스트는 자유롭게 콘서트 투어를 요구했다. 1838년 10월 아들을 임신하게 되면서 그 둘의 관계는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지만, 1839년 5월 아들 다니엘Daniel이 태어난 후, 이듬해인 1840년 다시 파리로 돌아오면서 둘은 별거를 시작하면서 사실상 관계는 끝을 맺게 된다.


리스트와의 곤계는 끝났지만 마리의 문학적 성취는 막 시작되고 있었다. 그녀는 파리로 돌아온 후 1846년 다니엘 스턴이라는 이름으로 《넬리다Nélida》를 출판하게 된다.



마리 다구의 《넬리다》, 1846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넬리다는 수녀원에서 자란 귀족출신 고아로 설명하고 있다.. 그녀의 뛰어난 상상력은 종교에 심취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수녀가 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종교적인 생활에 깊이 실망한 수녀원장은 스스로를 미친 사람들의 무리라고 비판하면서 넬리다의 길을 포기하게 만든다.


넬리다는 젊은 화가 게르만과 잠시 관계를 맺게 되지만, 그에게 정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충격에 빠진다. 그녀는 충격으로 귀족 티몰레옹과 결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그녀의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티몰레옹은 젊은 여성과 관계를 이어갔고 그녀의 생활에 싫증을 느끼게 된다. 같은 우울함에 시달리는 게르만과 다시 만난 넬리다는 곧 그녀의 사랑과 예술적 열정에 부응하는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게 된다.


넬리다와의 관계가 시작되고 게르만은 그녀를 뮤즈로 작품 활동을 하게 되면서 큰 명성을 얻게 된다. 그의 성공을 옆에서 지켜본 넬리다는 사랑이 그 둘의 사회적 장벽을 극복할 것이라고 믿고, 함께 제네바로 도망가서 생활하게 된다. 둘은 그곳에서 잠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넬리다는 다른 여성들의 소문과 악의에 괴로워하며, 그녀의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게르만에게도 혼자 남겨지게 된다.


그의 작품에 대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넬리다는 그가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게르만에 대한 그녀의 신뢰가 깨지면서 둘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결국 게르만은 그에게 필요로 하는 개인적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넬리다를 떠나 독일로 떠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을 도전 앞에서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우울증에 빠지고 만다. 게르만을 넬리다를 떠난 것을 후회하며 고통의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마리 다구



마리 다구는 이후에도 소설, 에세이, 문학 비평, 자서전과 회고록 등 여러 장르에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그녀는 사랑, 예술의 자유, 여성의 독립성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그녀의 작품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재조명을 받고 있다. 문학,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그녀의 작품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녀가 여성의 경험과 감정을 중심으로 한 내러티브는 당시 여성의 목소리와 경험이 종종 배제되었던 시기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녀의 작품들은 사회적 규범과 여성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제공하고 있다. 여성의 자유, 사랑, 예술에 대한 열정과 같은 주제를 통해 당시 존재했던 사회적 제약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러한 주제는 오늘날에 성별, 권력, 사회적 기대에 대한 현대적 논의의 초석을 다졌다고 말할 수 있다.




마리 다구, 1861년



마리 다구의 작품과 삶은 사랑과 예술에 대한 열정적인 탐구, 그리고 사회적 규범에 도전하는 용기로 가득 차 있다. 그녀는 19세기 프랑스 문학에 깊은 흔적을 남겼음에도 시대의 스캔들에 가려 충분히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작품은 여성의 삶, 사랑, 예술, 그리고 사회적 정의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를 통해, 당시의 문화와 사회에 비판적인 시각을 충분히 제공했음에도 말이다.


현대 문학과 사상에서 마리 다구의 작품과 그녀의 삶이 다시 조명받고 있는 것은 그녀의 글이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성의 권리, 개인의 자유, 그리고 사회적 정의에 대한 논의를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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