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사회 운동가, 루이즈 미셸과 그녀의 회고록
요즘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원색 옷을 입고 선거 운동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예전에는 잘 못 느꼈는데, 나이가 들수록 정치가 내 삶에 점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 얘기를 하다가 뜬금없는 정치 타령인가 싶겠지만 정치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날수록 문학도 내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최근에는 그 빈도가 확연히 줄어들었지만 과거에는 작가가 정치나 사회적 운동에 참여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빅토르 위고도 프랑스의 상원 위원으로 활동을 했을 정도로, 작가가 추구하는 사상적 견해는 대중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빅토르 위고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9세기 동시대에 프랑스 사회에 영향력을 끼쳤던 여성 작가가 있다. 루이즈 미셸Louise Michel은 비록 사회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로서 행보를 보였지만, 프랑스를 대표하는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는 인물이다. 최근 들어 그녀의 삶과 작품은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격동 속에서 여성의 역할과 가능성을 새롭게 정의한 인물로 재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미셸은 1830년 5월 29일에 프랑스에서 태어나, 파리 코뮌commune de paris의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교육자, 혁명가, 작가, 그리고 정치 활동가로서 다양한 정체성을 아우르며, 당시 사회적 정의와 자유를 위한 투쟁에 깊이 관여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루이즈 미셸은 과감한 정치적 행보로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그녀는 사회 운동가인 동시에 문학가였다. 그녀의 작품은 종종 사회적 불의에 대한 비판과 혁명적 열정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관찰을 통해 당시 프랑스 사회의 대중들의 삶을 소설, 시, 희곡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표현했다. 미셸의 삶과 그녀가 남긴 작품들은 현재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써 재평가받고 있는 중이다.
루이즈 미셸은 1830년 5월 29일, 프랑스 북부 오트마른Haute-Marne 지역의 보프몽Vroncourt-la-Côte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막 벗어나 자유주의적인 변화가 태동하는 시기였다. 그녀가 태어나던 해인 1830년에는 7월 혁명을 통해 보수적인 차르티스트 왕가의 정치 대신 자유로운 정치적 제도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영향으로 미셸은 일찍부터 사회적 정의와 평등에 대한 강렬한 열정을 보였다.
미셸은 그녀의 할머니의 영향을 받아 교육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녀의 할머니는 미셸에게 독서와 학문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주었고, 교육자로써의 삶을 살기를 희망했다. 그녀는 교육을 통해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념은 그녀가 성인이 되어 정치적 활동을 시작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녀는 여성과 노동자 계급의 교육을 특히 중시했으며, 이는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집단이었기에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대표하는 성격의 행보를 보였다.
교육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파리로 이주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파리에서 미셸은 교사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는 당시 나폴레옹 3세의 군사 정권 시기로 사회적으로 자유가 억압되었고,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공장과 공업지대에서 노동자 계급이 발생하고 그들의 삶에 대한 개선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기에 미셸은 교육과 사회 정의에 대한 그녀의 관심은 점차 정치적 활동으로 확장되었다. 미셸은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서 정치적 활동가의 모습을 본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19세기 프랑스에서의 사회적 변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1799년~1815년: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혁명 이후에 나폴레옹의 통치 하에 프랑스는 강력한 중앙 정부를 구축했다. 행정, 교육, 법률(나폴레옹 법전의 도입) 등 여러 분야에서 국가의 역할이 확대되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산업화의 초창기 단계에서 기계화 및 생산성 향상과 함께 파리의 인구가 급증하며 도시화가 가속되던 시기였다.
◆ 1815년 ~ 1848년: 복원 왕정과 7월 왕정
복원 왕정(1814-1830)과 7월 왕정(1830-1848) 기간 동안 정치적 불안정은 지속되었다. 이는 여러 차례의 반란과 정치적 변화를 겪었다. 과거 전제적인 통치와 자유주의적 이념의 혼란기였다. 이 시기에는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부르주아지의 부와 영향력이 증가했다. 이는 전통적 귀족 계층과의 긴장을 초래했고 동시에 노동자 계급의 형성가 그들의 불만이 쌓여가는 시기였다.
◆ 1848년 ~ 1871년: 제2공화국 및 제2제정
1848년 혁명으로 제2공화국의 설립되었다. 제2공화국의 설립으로 노동자와 시민 계층의 정치적 참여가 확대되었다. 이 시기 파리 코뮌(1871년)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부가 짧은 기간 동안 권력을 잡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급진적인 정치적 성향으로 인해 중앙 정부와의 충돌이 일어났고 극심한 폭력과 파괴가 발생하기도 했다.
◆ 1870년 ~ 1940년: 제3공화국
오랜 혼란 끝에 비로소 프랑스 사회에 짧은 안정기를 갖게 된 시기이다. 이 시기 헌법의 제정과 함께 노동 조건의 개선, 교육의 보편화, 여성 권리 증진 등 많은 사회적 개혁이 시도되었다. 또한 바론 오스만의 지휘 하에 파리는 대대적인 도시 재계획을 진행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오늘날 파리의 모습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넓은 대로의 개설, 공원 및 하수 시스템의 개선 등이 이루어졌다.
특히 이 시기에는 미술, 문학, 과학에서 중요한 진전이 이루어진 아름다운 시대라는 의미의 벨 에포크Belle Époque로 불린다. 인상주의 미술 운동이 시작되었고, 파리는 국제적인 문화 및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던 시기이다.
미셸의 정치적 활동은 19세기 후반 프랑스 사회와 정치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온 파리 코뮌(1871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코뮌은 프랑스-프러시아 전쟁과 나폴레옹 3세의 패배 이후 발생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파리 시민들이 자치정부를 세우고, 단기간이지만 사회적, 경제적 개혁을 시도한 사건이다. 이 시기에 미셸은 정치적 신념과 행동으로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녀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옹호하면서 동시에 여성과 노동자의 권리를 지지하는 활동을 전개한다. 그녀는 파리 시민군의 한 부대인 여성 보병부대의 지도자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파리 커뮤니의 수호와 이념적 지휘를 담당했다.
파리 코뮌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더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노동 시간 단축, 야간 근무 금지, 평등한 교육 기회 제공 등 다양한 사회 개혁을 시도했다. 이러한 변화에서 미셸은 여성에게 더 많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여성 권리 증진하는 등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시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871년 3월에 시작된 코뮌은 같은 해 5월,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코뮌 지지자들이 사망했으며, 많은 이들이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다. 이 사건은 "피의 주간La Semaine Sanglante"으로 불리면서 코뮌의 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파리 코뮌은 비록 짧은 기간 동안의 시도였지만, 그 이후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노동자 계급이 주도하는 정치적 실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이후 많은 혁명적 사상과 운동에서 실험적 사적으로 언급되기도 했다. 이러한 논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의되고 있는데, 평등과 정의를 향한 투쟁의 상징으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파리 코뮌 기간 동안 미셸은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녀는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구급활동을 하고, 병사들을 위한 간호와 의료 활동을 펼치는 등 직접적인 전투 지원 역할을 했다. 또한, 그녀는 여성을 위한 최초의 군사 조직인 여성 대대를 조직하는 데도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미셸은 코뮌의 가장 상징적인 여성 인물 중 하나로 기억되게 되었다.
미셸의 활동은 단순히 군사적 지원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녀는 사회적, 경제적 개혁을 촉구하는 여러 집회와 모임을 통해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녀는 교육의 개혁, 노동 조건의 개선, 여성 권리의 증진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코뮌이 붕괴와 함께 정부군에 의해 체포된 미셸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나 변명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자신의 행위를 당당히 변호하며 코뮌의 이상을 옹호하는 선택을 한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어쩌면 그녀의 이러한 절개가 그녀를 상징적 인물로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미셸은 재판을 통해 뉴칼레도니아로 추방이 결정된다. 추방 생활에서 그녀의 정치적 신념과 사회적 활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정치범들과 원주민들 사이에서 교육자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그녀는 이곳에서도 사회적 정의와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특히 추방된 다른 정치범들과 원주민들에게 다양한 교육을 제공했다. 그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고, 프랑스어, 역사, 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가르쳤다. 미셸의 교육을 통해 사회적 정의와 평등을 실현할 수 있다는 신념을 몸소 실천하려고 했던 것이다.
뉴칼레도니아에서의 추방 생활은 미셸의 정치적 신념을 더욱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원주민의 권리와 복지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러한 그녀의 노력으로 원주민들 사이에서도 큰 존경을 받았다.
1880년, 사면 조치에 따라 미셸은 프랑스로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귀국은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소식이었다. 그녀는 이후 뉴칼레도니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프랑스 내에서의 사회적, 정치적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이러한 그녀의 정치적 성향은 문학적 작품을 통해 드러내기도 했다. 그녀의 문학 작품은 그녀의 정치적 신념과 사회적 관심사를 너무나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녀는 문학을 통해 대중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중에 《이빨 부딪히는 소리Le Claque-Dents》는 사회적 불평등과 억압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프랑스어로 '이빨을 부딪히는 소리'라는 의미로, 추운 겨울 두려움과 추위에 떨며 굶주림과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소설은 오래된 모르비앙의 한 섬을 배경으로 어린 소년 루이크가 빗자루 아래에서 발견한 여자 아기 플뢰르의 삶을 따라가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섬의 노인들은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플뢰르는 결국 마을의 도움으로 성장하게 된다. 몇 년 후 하인을 찾고 있던 여인 헬렌은 플뢰르를 파리로 데려가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플뢰트가 경험하는 파리의 모습은 부정과 부패로 가득했다. 다양한 음모에 계략으로 플뢰르는 여러 번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욕망이 드러난다.
소설은 플뢰르의 순수함을 강조함으로써 부유하고 화려하지만 배신과 부정과 부패로 가득 찬 파리와 대조되는 모습을 강조한다. 파리의 잃어버린 순수함, 생존의 가혹한 현실, 탐욕과 야망의 잔인함을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현실의 모순과 불합리를 그려내었다.
작품은 19세기 후반 프랑스 사회의 모순과 문제점들을 실제로 드러내고 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계층이 겪는 고통과 어려움에 집중해서 사회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소설 속 플뢰르의 여정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연대의 가치를 강조함과 동시에, 억압과 불평등에 맞서 싸우는 대중들에게 변화의 정당성을 실어주려 했다. 작품을 통해 사회적 정의와 평등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대중들로 하여금 기존의 사회 구조에 대해 질문하고, 변화에 동참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했다.
그녀의 또 다른 작품 《회고록Mémoires》은 그녀의 자서전적 작품으로, 그녀의 삶, 그녀가 참여한 사회적 및 정치적 운동, 그리고 특히 파리 코뮌에 대한 그녀의 경험을 담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녀의 여성 인권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녀는 오로지 성적 대상으로써 여겨지는 노동 계급의 여성, 사회적 소유물로서 인식되는 행태를 비판했다.
"농부들 사이에 말이나 소가 교환되는 것처럼 매음굴 주인들 사이에도 여성 교환이 존재한다. 그들은 가축을 다루듯 인간을 다뤘고, 또 부가가치가 가장 높은 가축이라고 여겼다. 무역을 위해 유럽 전역을 여행하는 여성 시장의 상인들과 내가 각각 밧줄 끝에 묶여 있다면 잘라낼 사람은 내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의 아름다운 딸들이 길거리나 노점에서 팔리고, 부자들의 딸들이 지참금으로 팔리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가? 원한다면 누구든지 구매할 수 있다. 노예는 프롤레타리아이고, 모든 노예는 프롤레타리아의 아내이다."
- 루이즈 미셸의 회고록에서...
1880년 프랑스로 귀국한 후, 그녀는 자신의 정치적 활동을 재개하여 사회적 정의, 교육의 중요성, 그리고 여성의 권리 증진을 위해 활동했다. 특히 교육을 통해 사회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신념 아래, 무료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실행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의 생애 후반은 사회적 변화를 위한 활동에 전념하는 것으로 삶을 바쳤다.
루이즈 미셸은 1905년 1월 9일에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장례식은 수천 명의 추종자가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그녀의 죽음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애도되었다.
루이즈 미셸의 삶과 작품은 19세기 프랑스의 격동의 시기에 사회적 정의, 평등, 자유를 위한 끊임없는 투쟁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녀는 개인의 용기와 행동이 역사의 진로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실천으로 옮긴 인물로서 평가받고 있다.
문학에서 어떤 작가를 알게 되었을 때, 작가의 자품을 먼저 접하고 작가의 삶에 매료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나도 그렇다. 하지만 간혹 누군가의 발자취를 따라가다가 우연히 작품을 만나게 된다. 미셸은 나에게 그런 작가였다. 방구석에서 펜으로 만들어내는 활동을 넘어, 온몸으로 직접 변화를 경험하고 이끌어가는 적극저인 작가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사회적 정의를 향한 용기 있는 행동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게 만든다. 또, 그녀의 가치관은 오늘날에도 사회에서 소외된 많은 이들에게 그들의 목소리의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루이즈 미셸가 재조명받는 이유는 시대적 과제에 도전하고 맞서 싸웠기 때문 아닐까. 그녀가 남긴 작품은 그녀의 삶의 궤적에서 살아 숨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