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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선택이 곧 나를 만든다'는 희망
그리고 실존주의

《구토》 by 장폴 사르트르

by 프렌치 북스토어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소설 《구토(La Nausée)》는 출간된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문학적 성취 이상으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실존주의 철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어쩌면 조금 도전적일 수 있는 이 작품을 다시 조명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요즘 우리가 겪는 불안과 혼돈, 그리고 개인의 존재에 대한 고민은 1930년대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욱 복잡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어려운 실존주의란 단어를 쓰지 않아도, 삶의 무게는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경제 위기, 기후 변화, 정치적 양극화, 팬데믹과 같은 전 지구적 문제 속에서 실존적 불안을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소설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개인의 자유와 존재의 의미를 고민하게 만든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는 다를지 모르지만 사르트르의 소설은 철학적 논의를 넘어 우리의 현실을 이해하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기에 충부하다.




1930년대 사진들




1930년대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불안과 혼란의 시기였다.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적 위기가 지속되었고, 극단적인 이념 갈등 속에서 프랑스 제3공화국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다. 한편, 유럽 대륙에서는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급격히 대립하며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프랑스 사회는 극도의 허무와 불안 속으로 밀어 넣었다. 특히 지식인들은 기존의 철학과 이념이 더 이상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실존주의 문학이 탄생했다. 실존주의는 인간이 처한 불확실한 상황과 그 안에서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찾아야 하는 개인의 문제를 강조했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실존적 문제를 문학적 형식으로 풀어냈으며, 그의 작품 《구토》는 이러한 철학적 고민을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대중에게 전달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세상에 소개되었다.


소설 속 주인공 로캉탱(Roquentin)은 특정한 사건이 아닌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존재의 메스꺼움을 체험한다. 그는 사물과 세계가 본질 없이 단순히 거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극심한 불안과 혐오감을 느낀다. 이러한 로캉탱의 깨달음은 프랑스 사회가 경험한 실존적 위기와 맞물려 있다. 단순한 개인의 고민이 아니라 20세기 초반 유럽이 직면한 보편적인 문제를 반영한다.


소설은 1930년대 프랑스의 시대적 혼란과 철학적 고민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어쩌면 최근 우리가 겪는 혼란처럼 그 의미는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 작품을 단순한 문학적 고전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을 성찰할 수 있는 거울로 삼을 수 있다.




1600px-Manifestation_SFIO_1934.jpg "극우파의 쿠데타에 시위하는 사람들", 1934년, 뫼리스 프레스 에이전시



파시즘·공산주의·민주주의의 대립


1929년 세계 대공황은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충격을 초래하며 각국의 정치·사회 구조에 거대한 변화를 불러왔다. 특히 유럽에서는 기존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체제가 위기를 맞이했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극단적인 정치 이념들이 부상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이, 소련에서는 공산주의가 급격히 세력을 확장했으며, 이에 맞서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은 민주주의를 유지하려 했지만 내부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지만, 경제적 불황과 정치적 분열 속에서 심각한 내부 갈등을 겪었다. 극우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이 각각 자신들의 이념을 앞세우며 충돌했고, 기존의 민주주의 체제는 이를 조율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640x340_frontpopulaire.jpg "1936년 7월 파리의 인민전선 시위"




특히 프랑스 제3공화국(1870-1940)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1930년대에 접어들며 연이은 정부 교체가 이루어졌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세력이 성장하면서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1936년에는 인민전선(Front Populaire) 정부가 출범하면서 노동자 권리 확대와 사회 개혁을 추진했으나, 경제적 위기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


경제적으로도 프랑스는 대공황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산업 생산이 둔화되고 실업률이 증가하였고, 시민들은 점점 더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점차 기존의 가치 체계가 더 이상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는 그 자리를 대체할 새로운 철학적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사르트르의 철학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재조명하려는 시도로 급부상했다.




maxresdefault (1).jpg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대중의 허무와 지식인들의 새로운 사상 모색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불안정이 심화되면서 프랑스 사회는 깊은 허무와 실존적 불안을 경험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종교적 신념이나 민족주의적 이념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지 못하면서, 개인들은 새로운 철학적 관점을 필요로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실존주의 철학이 부상하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 초현실주의, 실존주의 등 다양한 사상을 탐구하며 인간 존재의 의미를 다시 정의하려 했다. 사르트르를 비롯한 철학자들은 인간이 단순히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가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이는 기존의 절대적인 가치 체계를 거부하고,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는 새로운 철학적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구토》는 당대 프랑스 사회의 불안과 혼돈을 반영한 철학적 선언으로 받아들여졌다. 로캉탱이 느끼는 메스꺼움은 단순한 개인적 감정 이상으로 1930년대 프랑스 사회 전체가 경험한 실존적 위기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100108313_3.jpg 장폴 사르트르의 《구토(La Nausée)》, 1967년



작품 줄거리


로캉탱은 어느 날, 낯선 바닷바람이 부는 작은 마을에 도착하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18세기 인물인 롤르봉(Rollebon)에 관한 전기를 집필하기 위해서다. 그는 한적한 하숙집에 방을 잡고, 매일 도서관을 드나들며 자료를 모으고 글을 쓸 준비를 한다. 그런데도 작업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는다. 공들여 모은 자료를 펼쳐놓아도, 마음 어딘가에서는 의미 없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작업이 막히자 그는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어느 날, 카페에 홀로 앉아 있다가 문득, 주변 사물과 풍경을 전혀 다른 감각으로 느끼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탁자, 의자, 손에 쥔 숟가락마저 기괴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이때 밀려드는 역겨움은 아무런 이유도 맥락도 없이 그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불쾌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익숙했던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 로캉탱은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달래고자 도서관에 간 그는 우연히 독학자(Autodidact)라 불리는 인물을 만난다. 스스로 여러 책을 읽고 공부한다는 그 남자는 삶의 의미나 이상을 책 속에서 찾으려는 듯 보인다. 하지만 깊은 대화를 나눌수록, 로캉탱은 타인과 제대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겪고 있는 낯선 역겨움에 대해선 더욱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도서관 안에서도, 길을 거닐 때도, 그는 사람들의 규칙적인 말과 행동 뒤에 숨은 공허함을 의식하며 계속해서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Topo-Vincenza-Bufano-Catia-D-amore-e-di-disillusioni-tra-la-vita-e-La-nausea-di-Jean-Paul-Sartre-sito.png 소설을 주제로 한 일러스트, 로캉탱과 아니




한편, 로캉탱은 때때로 과거 연인 안니(Anny)를 떠올리게 된다. 예전엔 그녀와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조금 더 분명해졌지만, 이제 그 기억들조차 점차 빛바래고 있었다. 그는 옛 감정을 되살리고자 안니를 다시 만나 보지만, 두 사람 사이엔 이미 메울 수 없는 거리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안니 역시 삶의 열정과 확신을 잃은 채, 과거의 아름다운 순간을 추억으로만 간직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 만남은 로캉탱에게 더 깊은 고독과 허무함만을 안겨준다.


그러던 어느 날, 로캉탱은 마을 공원에 있는 밤나무를 바라보다가 또 한 번 강렬한 구토를 느끼게 된다. 나무의 뿌리나 잎사귀 하나하나가 그저 무작위로 거기에 있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세상 모든 것은 단지 우연히 존재할 뿐이다.’ 그 깨달음은 모든 것을 더욱 역겹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삶 전체가 무의미하다고 느껴짐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자유로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의미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희미한 희망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무렵, 로캉탱은 자료 더미 속에서 헤매던 전기 집필을 포기한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글쓰기, 즉 스스로를 위한 이야기를 써보겠다고 결심한다. 이 부조리한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되, 거기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보겠다는 다짐이었다. 허무함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그 허무함 속에서 의미를 창조하겠다는 의지, 그것이야말로 그가 겪은 “구토”를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는 순간이었다.




edvard-munch-melancholy-1894-95-e1603213952250.jpg "우울", 에드바르트 뭉크, 1894년 혹은 1895년, 바이엘러 재단




메스꺼움, 존재와 사물에 대한 이질감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바로 제목이기도 한 메스꺼움(nausée)이다. 이는 단순한 신체적 불쾌감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이질감과 거부감을 의미한다. 주인공 로캉탱은 일상 속에서 사물과 세계가 그냥 거기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는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다. 나무뿌리를 바라볼 때 그는 그것이 어떤 목적도 없이 단순히 그 자리에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강한 불쾌감을 경험한다.


이러한 메스꺼움은 실존주의 철학에서 인간이 세상의 본질적인 무의미함을 깨달을 때 경험하는 감정과 연결된다. 평소에 익숙함 속에서 살아가지만, 어떤 순간 사물과 우리의 존재가 갖는 무의미함을 자각할 때 강한 이질감을 느낀다. 사르트르는 이를 통해 인간이 기존의 관습적 의미 부여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마주할 때 경험하는 실존적 불안을 보여주었다.



부조리, 무의미, 탈(脫) 도덕



실제로 소설은 기존의 소설처럼 명확한 기승전결이나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설 전반에 걸쳐 무의미함과 부조리한 분위기를 강하게 내뿜는다.


뚜렷한 갈등이나 극적인 전개 없이, 로캉탱의 내면적 독백과 단편적인 일상 묘사가 반복되면서 필연적으로 일상에서 느끼는 공허함과 부조리를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또한, 로캉탱은 역사 연구를 하면서도 과거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사랑조차도 공허하게 느끼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기존의 윤리적, 사회적 가치가 개인의 삶에서 필연적 의미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실존주의적 관점을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선악과 같은 도덕적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시선은 로캉탱이 기존의 가치 체계에서 벗어나며 혼란을 느끼는 과정을 통해 실존주의적 자유와 책임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리투아니아의 장폴 사르트르", 안타나스 슈트쿠스, 1965년




신이 부재한 세계에서의 개인


작품은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 명제 중 하나인 신의 부재를 전제한다. 기독교적 가치관이 개인의 삶을 지배했던 시대와 달리, 사르트르는 신이 없는 세계에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는 실존주의의 핵심 명제를 제시했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특정한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과 선택을 통해 스스로의 본질을 만들어간다는 의미로써 해석된다.


또한, 신이 없는 세계에서는 인간이 모든 선택의 책임을 오롯이 자신이 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로캉탱이 경험하는 메스꺼움은 이러한 절대적 자유 앞에서 느끼는 불안의 감정이기도 하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로캉탱은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결심을 한다. 이러한 그의 선택은 실존주의적 태도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의미 없는 세계 속에서 개인이 스스로 의미를 창조해야 함을 시사한다.




장폴 사르트르의 《구토(La Nausée)》, 로캉탱, 1966년




로캉탱이 부조리를 체험하는 순간들


주인공 로캉탱은 소설의 전개 속에서 점차 메스꺼움이라는 감정을 통해 실존의 부조리를 체험한다. 그는 일상적인 경험 속에서 갑자기 사물과 자신이 무의미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고 극도의 불안을 느낀다. 이러한 순간은 여러 장면에서 반복되며, 그가 실존적 각성을 겪는 주요 계기가 된다.


로캉탱이 공원 벤치에서 나무뿌리를 바라보는 순간, 그는 그것이 단순히 거기에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때 그는 사물과 세계가 본질 없이 단순히 존재한다는 것에 강한 메스꺼움을 느낀다. 이러한 작품 속 묘사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의 무의미함을 의미한다.


또한, 로캉탱은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보면서 자신조차도 하나의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거울 속의 모습은 낯설고 비인격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고, 결국 자신과의 단절감을 더욱 극명하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로캉탱은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을 듣는다. 그는 롤르봉의 전기를 쓰는 일을 포기하고, 이제는 주어진 것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축음기는 혼합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로 등장하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흑인의 원초적인 격정을 상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 사람들의 기술적 합리성을 구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축음기는 듣는 이의 실존적 상황에 따라, 춤을 추게 만들 수도 있고, 사색에 잠기게 할 수도 있다. 이 장면에서 축음기의 작용은 로캉탱에게 강한 울림을 준다. 그는 춤을 출 것인지, 혹은 춤추는 사람의 상황을 성찰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후자를 선택하지만, 동시에 완전히 하나의 선택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그는 이 선율을 사유하기로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실천적 사유 과정 속에서, 비록 암묵적이지만 일관되게 유지되는 《구토》의 실존적 의미가 드러난다.




"작품 초본 속 판화", 에두아르 고르그, 1951년




대화 속에서 읽을 수 있는 사르트르식 문제의식


로캉탱은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실존적 고립을 더욱 강하게 인식한다.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는 자신이 더 이상 그들과 동일한 가치 체계를 공유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과거 연인이었던 아니와 재회하지만, 그녀와의 감정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다. 아니는 그에게 삶에서 특별한 순간을 찾아야 한다고 하지만, 로캉탱은 더 이상 그러한 특별함을 믿지 않는다. 로캉탱은 또 몇몇 인물들과 짧은 만남을 갖지만, 이들 모두는 사회적 관습에 따라 살아갈 뿐, 자신의 실존적 고민과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는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타인의 시선과, 그것이 개인의 본질을 규정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로캉탱은 이들 관계 속에서 더욱 고립감을 느끼고, 자신만의 실존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 이유가 된다.




s-l1200.jpg 작품 《구토》 속 일러스트, 1951년, NRF




기존 가치체계의 붕괴


소설은 로캉탱이 기존의 가치 체계(사랑, 우정, 직업 등)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니와의 재회는 사랑이 영원하지 않고, 감정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로캉탱은 과거의 감정을 회복하려 노력하지만, 결국 사랑 역시 무의미한 감각적 경험일 뿐임을 깨닫는다.


그는 과거에 친분이 있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허무함을 느낀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일시적이고, 각자가 독립된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자각한다. 이러한 깨달음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가 연구하던 역사적 인물 롤르봉(Rollebon)에 대한 관심도 점차 사라진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일 뿐, 현재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결국 로캉탱은 기존의 사회적 가치들이 그에게 더 이상 의미를 제공하지 못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실존주의적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기록하는 것이 의미 있는 행동일 수 있다고 결론에 이르게 되고, 새로운 실존적 태도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la-nausee.jpg 작품 속 일러스트,




나무뿌리, 돌멩이, 거울에서 느끼는 '메스꺼움’


작품에서 로캉탱이 경험하는 실존적 위기는 특정한 사물과의 조우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사물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실존적 불안을 일깨우는 중요한 상징으로 기능한다.


로캉탱이 공원에서 나무뿌리를 바라볼 때, 그는 그 뿌리가 목적 없이 단순히 거기에 있음에 강한 불안을 느낀다. 이러한 인식은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존재의 무의미함을 극적으로 드러낸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이 기존의 의미 체계를 벗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때 느끼는 실존적 충격을 상징한다.


로캉탱이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 역시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돌멩이는 단단하고 변하지 않으며, 인간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그것과 무관하게 존재한다. 이러한 무의미함은 인간이 부여하는 의미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자기 자신조차 하나의 사물처럼 보이는 경험은 자아의 불확실성과 정체성의 유동성을 나타내고 있다. 인간이 자기 자신조차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경험하는 실존적 메스꺼움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모리스 르페브르-푸에네의 초상화", 1964년, 취리히 미술 협회




내면 독백에서 드러나는 자유의 무게


소설은 로캉탱의 내면 독백을 통해 인간이 절대적인 자유 속에서 느끼는 불안을 심도 있게 다루어 냈다. 로캉탱은 기존의 사회적 가치가 붕괴된 상태에서 완전한 자유를 가지지만, 그 자유가 곧 불안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선택은 피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자유는 곧 책임의 무게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로캉탱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해 줄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강조하는 실존의 우선성과도 긴밀하게 연결되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 행동에 대한 정당화에 대한 부재,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의미는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봤을 때 로캉탱은 기존의 의미 체계가 무너진 세계에서 어떻게 의미를 찾을 것인지 고민해야만 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는 것이 의미를 부여하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카페 드 플로르에서의 사르트르", 1945년경



메스꺼움을 수용하는 방식


소설의 결말에서 로캉탱은 자신이 경험한 메스꺼움을 부정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처음에는 무의미 속에서 고통을 느꼈지만 로캉탱은 점차 무의미를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수용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자신만의 의미를 창조하는 과정과도 연결된다.


또한, 로캉탱은 자신의 경험을 글로 기록할 결심을 하겠다고 마음먹는다. 이러한 그의 의지는 실존의 불안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제시된다. 실제로 사르트르는 예술이 실존적 경험을 표현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소음과 침묵
존재의 이중성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음과 침묵의 대비는 존재의 이중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로캉탱이 도시에 있을 때, 그는 주변의 소음 속에서 익명의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외부 환경과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함으로써 의미를 찾으려는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반면, 그가 혼자 있을 때는 극도의 침묵과 내면적 독백은 사회적 관계에서 벗어난 인간이 마주하는 존재의 근본적 문제와 실존적 불안을 의미한다.


결국, 작품은 인간이 사물과 세계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겪는 불안을 다양한 상징과 내면 독백을 통해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단순히 허무주의를 넘어 실존적 각성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탐구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Bundesarchiv_Bild_183-R09876,_Ruhrbesetzung.jpg "루르(Rhur) 지방의 프랑스 군인", 1923년




당시 프랑스 사회상이 소설 속에 담긴 방식


1930년대 프랑스는 정치적 혼란과 이념적 갈등이 심화된 시기였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이러한 현실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사르트르는 사회적 격변 속에서도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시민들의 모습을 통해 당대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했다.


로캉탱이 거리를 걸으며 마주하는 시민들은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한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일상 파묻혀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다가오는 전쟁의 위기나 사회적 불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하지도 않는다. 소설 속 주변인물들의 반응은 1930년대 프랑스 사회에 퍼져 있던 일종의 정치적 냉소주의와도 깊게 연결되어 있다. 직접적인 정치적 논평 없이도, 로캉탱이 경험하는 불안한 분위기는 당시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반영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연이은 정부 교체와 극단적인 이념 대립 속에서 시민들은 방향을 잃고 방관자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작품은 갈등이나 극적인 사건 없이도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로캉탱이 겪는 메스꺼움은 단순한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당대 프랑스 사회 전체가 경험한 실존적 공허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특별한 사건 없이도 공허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소설 속 인물들의 모습은 1930년대 경제적 불황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특별한 희망이나 대안을 찾지 못한 채 살아가던 프랑스 소시민들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더욱이 로캉탱이 도서관에서 만나는 연구자들은 과거의 기록을 정리하는 데 몰두하지만,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어쩌면 이러한 지식층의 현실에 대한 무관심과 좌절감은 당시 프랑스 사회 내부의 혼란과 무력감과 매우 닮아 있다.




"몽마르트르의 빗자루 장수", 1933년, 파리




다가오는 전쟁의 공포와 실존적 불안의 확산


작품이 집필될 당시,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이 임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전쟁의 그림자는 소설 속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로캉탱이 경험하는 실존적 불안과 사회의 공허한 분위기 속에서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로캉탱이 느끼는 메스꺼움은 단순한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다가오는 시대적 변화를 감지하는 불안과도 연결된다. 사회 전체가 변화의 기로에 서 있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일상의 리듬을 유지하며 현실을 직면하려 하지 않는다. 또한 그가 연구하던 역사적 인물 롤르봉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그의 연구 역시 점점 무의미해진다. 이러한 변화는 개인과 역사, 과거와 현재가 단절되는 과정으로, 전쟁과 같은 격변의 시대에 개인이 느끼는 실존적 공허감을 강조한다.


결국, 작품은 단순한 개인의 실존적 위기를 다룬 것이 아니라, 1930년대 프랑스 사회가 겪던 불안과 무기력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정치적 격변 속에서 방향을 잃은 사회, 그리고 그 안에서 허무와 불안을 느끼는 개인의 모습은, 특히 요즘 더욱 공감되는 문제로 다가온다.








실존주의(existentialisme)란?


실존주의(existentialisme)는 19세기와 20세기 초에 걸쳐 발전한 철학적 사조로, 인간의 존재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철학은 개인의 자유, 선택, 그리고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면에서 전통적인 본질론적 철학과는 차별성을 가진다.


실존주의의 기원은 쇠렌 키에르케고르, 프리드리히 니체, 마르틴 하이데거와 같은 사상가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우선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는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인간이 신과의 관계 속에서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객관적 진리보다 개인적인 신념과 선택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신은 죽었다(Gott ist tot)"라는 선언을 통해 전통적인 도덕과 종교적 가치를 거부했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이 기존의 가치에서 벗어나 스스로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는 실존주의적 관점과 일맥상통한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존재론적 철학을 정립했다. 존재(Sein) 자체에 대한 탐구를 중심으로 인간이 던져진 존재(Geworfenheit)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 한다.




afcd431a8a1389058d08a8cb5a3d8707.jpg 사르트르 실존주의의 핵심: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실존주의를 가장 널리 알린 철학자로, 그의 사상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라는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시선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정해진 본질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간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러한 시각은 전통적인 철학이 인간의 본질을 미리 규정해 놓고 해석했다면, 사르트르는 인간이 행동과 선택을 통해 본질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는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스스로 선택해야 하며,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타인이나 사회적 규범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으로 자신을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사르트르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인간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간은 절대적인 도덕적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가야 한다.



자유·선택·책임



실존주의는 단순한 철학적 개념을 뛰어넘어, 대중들에게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실천적 철학으로 다가왔다. 특히 자유와 선택, 그리고 책임에 대한 중요성을 설파함으로써 철학적 의미를 더해나갔다.


자유(Liberté)는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존재하는 가치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택(Choix)은 인간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정의된다고 보았다. 물질적, 혹은 이미 정의된 어떤 조건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된다고 보았다. 책임(Responsabilité)은 샤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 에서 인간 은 자신의 선택을 통해 삶의 의미를 정의한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자유로운 선택에는 반드시 따라오는 선택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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