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소녀 쟈지》 by 레이몽 크노
프랑스 문화는 고급스럽지만 난해하다. 특유의 아방가르드함은 어떤 이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만, 또 다른 이들에게는 불편함과 당혹감을 안겨준다.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함은 논란의 중심이 되고, 어떤 이는 그것에 찬사를 보내는 반면, 또 어떤 이는 그것을 향해 격렬한 반응을 보인다. 때때로 그 난해함 자체가 프랑스 문화의 정체성이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와인에서 시작해 예술과 철학으로 이어지는 프랑스 문화는 깊이 있는 사유와 상징적 표현을 특징으로 한다. 단순히 감각적으로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담긴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상징과 은유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프랑스 문화가 하나의 거대한 수수께끼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프랑스 문학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한 이야기 전달을 넘어, 철학과 사회적 맥락을 함께 고려해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문학 전통을 가지고 있다.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은유와 상징을 통해 사유를 확장하는 방식을 사용해 표현하고, 작품을 읽는 행위에서 오는 즐거움이 아니라, 사고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유희를 느끼도록 만든다. 그렇기에 프랑스 문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입 장벽이 높을 수밖에 없다. 또, 이런 배경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난해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프랑스 문학의 난해함은 단순히 표현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문화적·사회적 변화 속에서 형성된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프랑스혁명과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문학은 단순한 감상의 대상에서 사회 비판과 철학적 사유의 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20세기 이후에는 실존주의,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철학적 흐름이 문학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며 더욱 분석과 해석이 필요한 형태로 변화해 왔다.
또한, 프랑스 사회가 전통적으로 유지해 온 엘리트 중심의 문화적 위계는 문학을 지적인 탐구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프랑스 문학의 독특한 특성은, 문학을 순수하게 즐기고 싶은 이들에게는 높은 장벽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프랑스 문학의 난해함을 단순히 어렵다고 치부하기보다는, 왜 프랑스 문학이 이러한 형태로 발전해 왔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난해함 속에는 그만의 문학적 가치와 깊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프랑스 문화와 문학이 담고 있는 철학적·사회적 의미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프랑스 문학의 난해함은 단순히 언어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프랑스 문학은 이야기 자체보다 이야기가 담고 있는 철학적 의미와 사유의 깊이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다. 단순한 서사를 넘어, 인간 존재와 사회를 탐구하는 철학적 성찰의 장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프랑스 문학이 단순한 오락이나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사고를 유도하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문학적 특징에 익숙한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작품 속에 스며든 철학적 배경과 개념을 해석하고, 그 의미를 탐구하는 방식으로 문학을 읽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 방식은 독자들에게 적극적인 해석을 요구하게 된다. 해석에 필요한 배경 지식이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해석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이러한 방식의 문학적 유의는 높은 장벽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특징은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다. 18세기 계몽주의(Lumières) 시대에는 문학이 인간 이성과 자유를 탐구하는 장이 되었고, 20세기 실존주의(Existentialisme)와 구조주의(Structuralisme)를 거치면서 더욱 복잡한 형식과 철학적 깊이를 가지게 되었다. 단순히 서사를 따라가는 방식에서 벗어나, 작품 속에 담긴 개념과 철학을 분석하고 의미를 찾는 방식으로 문학이 변화한 것이다.
그 결과, 프랑스 문학은 단순히 이야기를 즐기는 이야기에서 독자가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사고해야 하는 철학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문학적 특성은 프랑스 문학을 더욱 깊이 있는 장르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더욱 난해해졌다.
프랑스 문학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추상성과 상징성을 강조하는 독특한 표현 방식 때문이다. 프랑스 문학은 직설적인 서술보다는 은유와 비유, 상징을 활용하여 사유의 폭을 확장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단순히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담고 있는 의미를 해석하고 상징을 해독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든다.
프랑스식 표현 방식은 상징주의(Symbolisme) 문학 전통 속에서 발전해 왔다. 19세기말 상징주의 작가들은 현실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감각과 상징을 통해 보다 깊은 내면세계와 철학적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다. 이러한 경향은 이후 프랑스 문학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작품 속 표현은 점점 더 함축적이고 난해한 방식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상징주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가 『악의 꽃(Les Fleurs du mal』)에서 향기, 빛, 그림자와 같은 이미지를 활용하여 감각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를 만들어냈다면, 스테판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같은 작가들은 언어가 단순한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의미를 확장시키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의도적으로 더욱 난해한 시를 창작했고, 그 난해함이 작품을 받아들이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이후에 나타난 초현실주의(Surréalisme) 문학은 비논리적 서술 방식을 만들어 냈다. 기 드보르(Guy Debord)나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같은 작가들은 문학이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기존의 논리적 서술을 파괴했는데, 특히 꿈, 환상, 무의식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독자들이 직관적으로 작품을 경험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문학적 전통 속에서 프랑스 문학은 점점 더 추상적이고 다의적인 의미를 가진 작품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독자들은 작품을 속에 숨겨진 상징과 철학적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고, 그 흐름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 문학이 이러한 방식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전통적으로 지식인 중심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문학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소수의 엘리트들이 향유하는 지적 유희의 수단이자, 철학적 탐구와 논쟁의 장으로 자리 잡았다.
일명 정통 프랑스 문학으로 인정받는 문학은 단순한 서사 전달을 넘어, 사유하고 토론하며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중요한 기능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태도 속에서 문학은 점점 더 해석과 분석이 필요한 지적인 도구로 변화했다.
이러한 흐름은 18세기 계몽주의(Lumières)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볼테르(Voltaire)와 디드로(Diderot) 같은 작가들은 문학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인간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이 과정에서 문학은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 비판과 사상적 논쟁을 담아내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문학은 점점 더 논증적이고 사유적인 형식으로 발전했다.
오늘 우리가 느끼는 프랑스 문학의 난해함은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며 더욱 심화되었다. 프랑스 문학은 단순한 이야기 전달을 넘어 철학적이고 지적인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었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와 카뮈(Albert Camus) 같은 작가들은 소설 속에서 실존주의 철학을 탐구하고, 인간 존재의 의미와 도덕적 선택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들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이해하고 분석해야 하는 과제를 부여했다.
그 결과, 프랑스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철학적 질문을 함께 고민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되었다. 이러한 과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프랑스 문학을 더욱 난해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게다가 프랑스 문학은 종종 불편한 문학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단순히 서사나 표현 방식 때문이 아니라, 전통적인 도덕, 종교, 사회적 금기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 때문이기도 하다. 프랑스 문학은 오랫동안 기존 사회 질서를 비판하고, 금기를 깨는 실험을 지속해 왔다. 이러한 도전 정신은 문학을 더욱 깊이 있는 탐구의 장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당대 독자들에게는 불편함과 불쾌감을 안기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프랑스 문학은 금기에 도전하는 행위 자체를 문학적 실험의 중심으로 삼아왔다. 전통적 도덕관, 종교적 가치, 정치적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금기를 깨는 방식으로 새로운 문학적 표현을 끊임없이 시도해 왔다. 이 과정에서 성(性), 종교, 정치, 철학적 개념에 대한 도발적인 표현과 급진적인 사상이 등장했고, 이러한 과감한 표현 방식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각도 함께 존재했다.
특히, 성적 표현과 욕망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도덕과 윤리를 벗어나는 문학적 시도가 두드러졌다. 이러한 금기의 확장은 종종 사회적으로 논란을 일으켰고, 때로는 검열과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 문학은 성(性)을 단순한 자극의 요소로 사용하기보다는 인간의 본능과 억압된 욕망, 사회적 규범과의 충돌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다루며, 금기의 경계를 확장하는 역할을 해왔다.
프랑스혁명 이후, 세속주의(Laïcité)가 사회의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으면서 문학은 전통적인 기독교적 도덕관과 신념을 흔드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프랑스 문학은 종교적 권위와 교리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인간 존재의 불안과 신의 부재를 다루며 기독교적 가치관과 전통적 도덕 개념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인간의 욕망과 도덕적 질서를 전복하는 극단적인 표현 방식을 시도하거나, 사회적 도덕관념에서 벗어난 인물을 그리면서 기존의 도덕 기준이 절대적인 것인지에 대한 철학적 의문을 던지는 작품들도 등장했다.
이러한 문학적 전통 속에서, 레이몽 크노(Raymond Queneau)의 《지하철 소녀 쟈지(Zazie dans le métro)》는 프랑스 문학이 지닌 난해함을 해체하려는 시도를 담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기존 프랑스 문학이 철학적 탐구와 소수 엘리트 중심의 구조 속에서 점점 더 복잡하고 난해해졌다면, 크노는 이러한 전통을 조롱하면서도 새로운 문학적 실험을 시도했다.
그는 기존 프랑스 문학이 강조해 온 정제된 문체, 철학적 사고, 문학적 권위를 의도적으로 해체했다. 그는 작품 속에서 속어와 비속어를 전면적으로 사용했고, 아이의 시선을 통해 철학적 질문들을 우스꽝스럽게 풍자하는 방식을 택했다. 등장인물들은 깊이 있는 사고를 하려 하지만, 쟈지의 말장난과 가벼운 대화 속에서 철학적 논의는 희화화되고, 지식인 중심의 문학 전통이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크노는 이를 통해 프랑스 문학의 난해함 자체를 풍자하는 동시에 문학이 반드시 고상하고 철학적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새로운 형식적 실험이 또 다른 방식의 난해함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존 문학이 강조해 온 철학적 탐구, 정제된 언어, 지식인 중심의 논의를 해체하는 도이에 문학이 더 가볍고 자유로울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문학이 반드시 엄숙하고 고급스러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유희적이고 일상적인 언어 속에서도 충분히 새로운 가능성을 가질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소설 《지하철 소녀 쟈지》는 그래픽 노블, 영화, 연극, 뮤지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며 지금까지도 대중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이렇게 꾸준히 회자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크노의 실험적인 문체와 자지의 반항적인 태도가 만들어낸 독특한 조합 덕분이다. 이 두 요소는 소설을 접한 독자들에게 기존 문학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묘한 해방감을 선사했다.
독자들은 기존 문학에서 볼 수 없던 과격하게 변형된 언어 속에서 가벼우면서도 통쾌한 감각을 맛보았다. 익숙한 문학적 언어가 아니었기에 처음에는 다소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지만, 속어와 비속어, 말장난이 난무하는 작품의 스타일은 오히려 문학이 가진 진입 장벽을 허물어버리는 역할을 했다.
기존 프랑스 문학이 철학적 분석과 사회적 해석을 필요로 했다면, 《지하철 소녀 쟈지》는 문학을 더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문학이 반드시 어렵고 엄숙할 필요는 없다며, 난해함 속에서도 유머와 장난스러움을 발견할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소설은 시골에 사는 소녀 쟈지가 삼촌 가브리엘과 함께 지내기 위해 파리로 오면서 시작된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쟈지는 도시의 상징인 지하철을 타고 싶어 하지만, 하필이면 파업으로 인해 운행이 중단된 상태이다. 결국 가브리엘은 친구인 택시 기사 샤를을 불러 쟈지를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간다.
아파트에 도착한 쟈지는 지하철을 타지 못한 것에 실망한다. 이를 본 가브리엘의 아내 마르셀린은 쟈지를 위로하며 잠자리에 들게 한다. 한편, 저녁 시간이지만 가브리엘은 출근 준비를 한다. 그는 투랑도가 운영하는 술집 ‘라 카브(La Cave)’에서 여장을 하고 춤을 추는 일을 하고 있었다. 화장품을 챙긴 가브리엘은 밤무대로 향한다.
다음 날 아침, 쟈지는 몰래 집을 빠져나와 파리를 탐험하기로 한다. 그러나 여전히 운행하지 않는 지하철을 보고 다시 한번 실망한다. 그때 페드로-쉬르플뤼라는 남자가 다가와 그녀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쟈지는 그를 경계하면서도, 호기심에 이끌려 함께 시장과 식당을 구경하기로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페드로가 점점 수상하게 느껴지자, 쟈지는 그를 피해 달아나려 한다. 그러자 페드로가 쟈지를 붙잡으려 하고, 이에 쟈지는 그가 자신을 추행하려 했다고 소리친다. 그녀의 외침에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자, 페드로 역시 쟈지가 물건을 훔쳤다고 맞서며 모함한다. 혼란 속에서 결국 쟈지는 하는 수 없이 페드로를 가브리엘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게 된다.
그곳에서 페드로는 가브리엘이 여장을 하고 밤무대에서 춤을 춘다는 이유로 그를 조롱하며 비난하기 시작한다. 결국 두 사람 사이에 또 한 차례 소란이 벌어지고, 가브리엘은 화가 나서 페드로를 쫓아낸다. 이렇게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후, 사건은 일단락된다.
다음 날, 쟈지는 가브리엘과 함께 파리 관광을 하기로 한다.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즐기던 중, 쟈지는 여장을 하고 춤을 추는 가브리엘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호기심을 보인다. 가브리엘은 장황한 설명 대신, 직접 자신의 공연을 보여주기로 한다.
공연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페드로는 이번에는 ‘트루스카이용’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난다. 그는 갑자기 쟈지와 가브리엘을 포함한 일행들에게 총을 들이대며 위협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자신을 왕자라고 주장하며 더욱 소란을 일으킨다. 사태가 점점 격해지면서 무력과 총격이 난무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지고, 결국 경찰까지 대거 출동해 쟈지 일행도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때, 우연히 지하로 이어지는 숨겨진 통로를 발견한 쟈지와 가브리엘은 이를 이용해 가까스로 빠져나오게 된다. 그렇게 소란에서 벗어난 둘은 무사히 가브리엘의 아파트로 돌아오면서 소란은 마무리된다.
다음 날, 쟈지의 어머니 잔은 딸을 데리러 파리 기차역에 도착한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역에 도착한 쟈지는 잠에서 일어나 마치 꿈같은 파리에서의 모험을 되새기며 말한다.
“이제 더는 어린아이가 아니야.”
이렇게 쟈지의 특별한 파리 여행은 끝을 맺는다.
프랑스 문학에서 난해함은 곧 권위의 상징이 되기도 하다. 문학을 이해하는 방식이 점점 더 경직되고, 진정한 문학적 해석을 위해 요구되는 기준이 높아지면서 프랑스 문학은 소수 엘리트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니치(niche) 문화화 되었다. 그들의 사이에서는 난해한 문학을 이해하는 능력이 곧 지적인 우월성을 증명하는 척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지하철 소녀 쟈지》는 이러한 문학적 권위를 풍자와 웃음으로 돌파한다. 크노는 문학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기존 문학이 가지는 엄숙함과 형식을 무너뜨리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유희적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지적인 수준을 증명하는 수단으로써의 문학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단순히 가벼운 소설로만 소비되지 않는 이유는, 웃음 속에 날카로운 풍자와 도전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기존 문학의 권위를 조롱하면서도, 문학이 가진 가능성과 확장성을 실험했다. 문학이 즐기면서도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프랑스 문학이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때로는 그 난해함을 심각하게 분석하기보다는, 쟈지처럼 가볍게 웃어넘기는 것도 하나의 즐기는 방식이 될 수 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는 1635년 프랑스의 추기경 리슐리외(Cardinal Richelieu)에 의해 설립된 기관으로, 프랑스어의 규범을 정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프랑스 정부와 직접적인 행정적 연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프랑스어의 권위와 순수성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담당하고 있는 주요 미션으로는 프랑스어의 규범화 및 정비, 신조어 및 외래어 관리, 사전 편찬 및 철자 개혁, 프랑스 문화 및 문학 발전 기여 등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이 기관의 회원은 불멸의 존재(Immortels, 불멸자)라고 불리는데, 총 40명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평생 임기를 가지며, 기존 회원이 사망하면 새로운 회원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회원들은 대개 작가, 철학자, 역사학자, 학자 등 프랑스 문학과 학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로 선정된다.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설립된 이유는 단순한 언어 관리가 아니라, 프랑스어를 정제하고 보호하는 것이었다. 17세기 당시 프랑스에서는 다양한 지역 방언이 존재했고, 문학 작품에서도 각기 다른 언어적 변형이 나타났다. 리슐리외 추기경은 이러한 언어적 다양성이 국가의 통합을 방해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하나의 고급 언어로 규범화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바른 프랑스어를 결정하고, 특정한 표현과 철자법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거나 배제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구어적 표현이나 방언을 배제하고, 문학적·공식적 프랑스어를 표준으로 정하거나, 프랑스어를 정치·외교·문학에서 고급 언어로 자리 잡게 만든다거나, 프랑스어 사전(Dictionnaire de l’Académie Française)을 1694년에 발간하여, 언어의 표준화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단순한 언어 정비가 아니라, 언어의 위계를 만들고 특정 계층의 언어를 정통으로 규정하는 과정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프랑스 문학이 난해하다고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언어적 규범화에 있다. 정해진 문체와 어휘를 벗어나는 표현은 비문학적이라고 간주되었고, 이는 독자들에게 높은 진입 장벽을 만들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프랑스어에 새롭게 유입되는 단어를 관리하고 규제하는 것이다. 특히, 외래어(특히 영어)와 신조어를 적극적으로 배제하려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예를 들어, Email은 Courriel로, Weekend - Fin de semaine, Selfie - Autoportrait, Smartphone - Téléphone intelligent 등으로 대체해서 사용한다. 최근에는 이러한 대체어들은 대중적으로 잘 사용되지 않고 있지만, 그럼에도 많은 단어들이 프랑스화 되어 사용되고 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여전히 프랑스어의 공식적인 기준을 설정하는 역할을 하지만, 최근 들어 그 권위와 영향력은 점점 약화되고 있다.
오늘날 프랑스어는 인터넷과 SNS, 대중문화 속에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여전히 고전적 언어를 유지하려 하고, 신조어와 속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프랑스는 글로벌화된 사회로 변하면서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프랑스어 속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여전히 프랑스어의 순수성을 강조한다. 다언어적 요소를 배제하려는 보수적 태도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과거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결정이 법적으로 강제되거나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지만,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이를 잘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프랑스의 젊은 세대들은 더 이상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언어적 규정을 신경 쓰지 않고, 보다 실용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는 추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