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관계》 by 쇼데를로 드 라클로
18세기말 프랑스, 혁명의 불길이 서서히 타올랐지만, 귀족들은 여전히 눈부신 궁전과 화려한 연회 속에서 향락을 누리고 있었다. 이러한 화려함 뒤에는 부패와 위선, 도덕적 타락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쇼데를로 드 라클로(Choderlos de Laclos)의 소설 《위험한 관계(Les Liaisons dangereuses)》는 이런 귀족 사회의 민낯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1782년 출간된 이 작품은 귀족들이 사랑을 권력의 도구로 활용하면서 벌이는 치명적인 심리 게임, 그리고 그 속에 감춰진 인간의 욕망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야기 중심에는 메르테유 후작 부인과 발몽 자작이 있다. 이들은 사랑을 감정이 아닌 지배와 조작의 수단으로 삼는다. 유혹과 배신이 오가는 편지 속에서, 그들의 관계는 하나의 전략이자 전쟁과도 같이 보이기도 한다. 감정이 아닌 이성이, 진실이 아닌 기만이 지배하는 이들의 세계에서 사랑은 먹고 먹히는 게임으로 전락했고,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위험한 게임은 단순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작품 속 인물들의 행동은 당시 프랑스 귀족 사회의 위선과 몰락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가면 뒤에 숨겨진 욕망과 권력의 냉혹한 현실. 과연 이 관계의 끝은 몇 백 년을 이어오던 프랑스 사회의 몰락과도 같았다.
소설은 프랑스혁명 직전의 사회 분위기를 생생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작품 속 귀족들은 사랑을 권력의 도구로 삼아 치열한 심리 게임을 벌이지만, 그들의 유희와 권력 놀음은 당시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구체제)이 지닌 모순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앙시앵 레짐은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프랑스의 봉건적 신분제 사회를 의미한다. 왕과 귀족, 성직자들이 절대적인 특권을 누리는 구조였지만, 18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이 체제는 점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경제적 위기가 심화되고, 계몽사상이 확산되면서 기존 사회 질서에 대한 회의와 반발이 거세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은 변화의 필요성을 외면한 채,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사치와 향락에 몰두했다. 그러나 대중들의 시선은 달라졌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귀족 사회의 부패와 무능에 분노했고, 이러한 사회적 긴장은 결국 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왕권은 여전히 절대적 권위를 주장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무너져 가고 있었다. 소설 속 인물들이 벌이는 치명적인 관계와 그들이 지닌 위선은, 당시 귀족 계층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작품 속 주인공들의 몰락은 마치 앙시앵 레짐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처럼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렇듯 소설은 화려한 가면 뒤에 감춰진 부패와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프랑스 사회가 혁명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강렬하게 보여준다.
18세기 프랑스 왕실과 귀족 사회는 겉으로 보기에 찬란한 전성기를 구가하는 듯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매일같이 호화로운 연회가 열렸고, 세련된 사교 문화와 예술·철학의 발전은 유럽 전역에서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겉으로만 화려할 뿐, 실상은 점점 깊어지는 위기 속에서 서서히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루이 15세(1715~1774) 시대의 프랑스는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직면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 등 연이은 전쟁으로 국가 재정이 악화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귀족들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개혁이 추진되었으나 강한 반발로 인해 실패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왕실은 방탕한 생활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궁정의 화려함은 대중들의 불만을 가중시켰다. 특히, 퐁파두르 후작 부인과 뒤바리 백작 부인과 같은 왕의 정부들이 국정을 좌우하게 되면서 사치를 주도하게 되고, 이로 인해 귀족 사회의 도덕적 타락은 더욱 심화되었다.
루이 16세(1774~1792) 시대에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루이 16세는 개혁을 시도했지만, 강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고, 귀족과 성직자들은 자신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개혁을 가로막았다. 한편, 평민들은 무거운 세금 부담을 떠안아야 했다. 그로 인해 귀족과 성직자들이 면세 특권을 누리는 불공정한 사회 구조에 대한 분노는 점점 커져 갔다. 결국 계급 간 갈등이 심화되면서 사회적 불안은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귀족들은 현실을 외면한 채, 여전히 베르사유에서 향락적인 삶을 즐겼다. 마치 《위험한 관계》 속 귀족들처럼, 이들은 사랑과 권력을 게임처럼 소비하며 위선적인 귀족 문화를 이어갔다. 그러나 이 화려한 가면무도회는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앙시앵 레짐의 몰락을 가속화한 핵심 요인 중 하나는 심각한 경제 위기였다. 18세기 후반 프랑스는 국가 재정이 파탄에 이르렀고, 이에 따른 사회적 불안은 점점 커져 갔다.
당시 프랑스의 세금 구조는 극도로 불공정했다. 성직자와 귀족 계층(제1·2신분)은 면세 특권을 누렸던 반면, 평민(제3신분)만이 무거운 세금 부담을 떠안아야 했다. 이러한 구조는 평민들의 불만을 키웠고, 여기에 1780년대 연이은 흉작과 경제 불황이 겹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빵 가격의 폭등은 민중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였다. 당시 빵은 프랑스 서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주식이었으며, 가격 상승은 단순한 경제적 어려움을 넘어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결국, “빵을 달라!”는 절박한 외침은 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배경에는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루소, 볼테르, 디드로와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불평등한 신분제 사회를 비판하며 자유, 평등, 국민 주권의 개념을 확산시켰다. 이들의 사상은 기존의 왕권과 귀족 중심의 질서를 정당화하던 가치관을 흔들었으며, 민중들은 점점 더 정치적 변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혁명을 향한 시대적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18세기 프랑스에서 귀족들은 여전히 사회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점점 변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문화적·정치적 리더로서 존경받던 존재였으나, 18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사치와 부패의 상징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또한 귀족들은 스스로를 사회를 이끄는 품위 있는 계층이라 자부했지만, 실상은 도덕성과 윤리를 유지할 의지도, 사회적 책임을 다할 의무감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들의 삶은 사치와 향락에 집중되었으며, 결혼과 사랑조차도 위선의 수단이 되었다. 결혼이란 단순한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 재산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계약으로 전락했고, 결혼 이후의 연애(외도)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관행이 되었다. 부부 관계는 점점 형식적으로 변해갔으며, 귀족들에게 결혼은 감정과 헌신이 아니라 유희와 정치적 이득을 위한 수단처럼 인식되는 것이 일반적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리베르티나지(Libertinage) 문화가 등장했다. 이는 자유로운 연애를 표방했지만, 실상은 극단적인 도덕적 타락을 의미했다. 귀족 사회에서는 자유와 방종의 경계가 모호해졌고, 쾌락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곧 권력의 상징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귀족들의 이러한 행태는 《위험한 관계》와 같은 작품을 통해 대중들에게까지 알려지면서 더욱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었다. 소설 속 인물들이 사랑을 권력과 지배의 도구로 삼아 타인을 조종하는 모습은, 당시 귀족 사회의 위선적인 실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발발했을 때, 민중들은 더 이상 귀족들을 존경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가차 없이 심판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만들었다. 결국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조차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소설은 메르테유 후작 부인과 발몽 자작의 위험한 계약으로 시작된다. 메르테유는 얼마 전 약혼자였던 제르쿠르에게 파혼을 통보받았다. 제르쿠르는 젊고 순진한 세실과 새롭게 약혼을 하게 되었고, 이에 분노한 메르테유는 그의 약혼녀를 도덕적으로 타락시키기로 결심한다.
이를 위해 그녀는 연애와 유혹의 기술에 능한 발몽 자작을 끌어들이기로 한다. 메르테유는 그에게 세실을 유혹해 타락시킬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발몽은 그녀의 복수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눈에는 세실이 너무 순진하고 하찮은 상대였으며, 그의 목표는 전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발몽이 노리는 인물은 바로 투르벨 부인이었다. 독실하고 정숙하며,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그녀를 유혹하는 것이야말로 그에게는 더 흥미로운 도전이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진 두 사람은 서로의 계획을 비웃으며 위험한 내기를 제안했다. 발몽은 세실을 타락시키고, 동시에 투르벨 부인의 마음까지 얻어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한편, 메르테유는 **발몽이 이 두 가지를 모두 성공한다면, 자신과의 하룻밤을 내기의 보상으로 내걸게 된다.
두 사람의 위험한 게임이 시작되면서, 그들의 유혹과 배신이 얽히고설키며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향해 나아간다.
발몽이 예상했던 대로 세실을 유혹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어머니의 엄격한 감시 아래에서 제대로 된 연애조차 경험해보지 못했던 세실은, 발몽의 노련한 구애에 쉽게 마음을 내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동시에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당스니와도 몰래 밀회를 이어가며 혼란스러운 감정에 빠지게 된다.
한편, 투르벨 부인은 소문대로 신앙심이 깊고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발몽의 접근을 단호하게 거절하려 애썼다. 그러나 발몽은 끈질기고도 능수능란한 애정 공세를 펼쳤고, 시간이 흐르면서 투르벨의 마음에도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이루어졌다. 세실은 도덕적으로 타락했고, 발몽은 마침내 투르벨의 마음을 얻어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발몽이 투르벨에게 진정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그와 메르테유의 은밀한 공모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메르테유는 발몽이 투르벨에게 점점 진지한 감정을 품어가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녀는 발몽을 조롱하며, 사랑에 빠진 우스운 남자가 되었다고 그를 자극한다. 한편, 발몽 역시 투르벨과의 사랑이 그동안 자신이 사교계에서 쌓아온 명성에 흠이 될 것이라 판단한다.
결국, 발몽은 투르벨과의 이별을 선택하게 된다. 그가 보낸 차가운 결별의 편지를 받은 투르벨은 깊은 상처를 받고 쓰러지고 만다. 그녀에게 발몽과의 사랑은 단순한 유희가 아닌, 진심을 담은 것이었기에 이별의 충격은 더욱 컸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었지만, 그 대가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비극이었다.
발몽은 다시 사교계로 돌아와 메르테유에게 계약대로 그녀와의 하룻밤을 요구한다. 그러나 메르테유는 발몽이 여전히 투르벨을 사랑하고 있다며 이를 거부한다. 그녀의 냉담한 반응에 발몽은 분노했고, 이에 대한 복수로 메르테유가 밀회를 즐기던 당스니와의 사이를 갈라놓기로 결심한다.
발몽은 당스니에게 메르테유의 배신을 암시하며 의심을 심어준다. 이에 격분한 메르테유는 발몽과 세실의 관계를 당스니에게 폭로하면서 맞대응한다. 충격과 분노에 휩싸인 당스니는 결국 발몽에게 결투를 신청하게 된다.
두 남자의 결투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결투 끝에 발몽은 심각한 부상을 입고 결국 목숨을 잃게 된다. 그의 죽음 소식을 들은 투르벨은 깊은 슬픔 속에 병을 얻어 결국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결투가 시작되기 전, 발몽은 모든 진실을 담은 편지를 당스니에게 건넨다. 당스니는 결투 이후 발몽의 편지를 모두에게 공개하고, 그동안 은밀하게 감춰져 있던 귀족 사회의 위선과 잔혹한 권력 게임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진실이 밝혀지자, 세실은 자신의 타락한 모습을 견딜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수녀가 되기로 결심한다. 당스니 역시 파리를 떠나 새로운 삶을 살기로 한다. 한편, 모든 계획의 중심에 있었던 메르테유는 귀족 사회에서 완전히 몰락하며 철저한 파멸을 맞이한다.
화려했던 유혹과 권력의 게임은 결국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는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소설은 18세기 프랑스 귀족 사회에서 단순히 사치와 향락에 탐닉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당시에는 도덕과 윤리를 초월한 새로운 문화를 형성했고, 그것이 바로 리베르티나지(Libertinage)였다.
본래 리베르티나지는 자유로운 사고와 쾌락을 중시하는 철학적 개념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성적 자유와 권력관계 속에서 쾌락주의적 게임으로 변질되었다. 귀족들은 결혼이라는 제도의 틀을 벗어나 자유로운 연애와 성적 탐닉을 즐겼고, 그 과정에서 권력과 욕망이 뒤섞이며 위험한 관계들이 형성되었다.
소설은 리베르티나지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메르테유와 발몽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권력과 지배의 도구로 삼아 타인을 조종하는 모습은 당시 쾌락과 유희를 위해 도덕과 금기를 철저히 무너뜨린 당시 귀족 사회의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다.
리베르티나지(Libertinage)라는 개념은 리베르탱(Libertin)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17세기 프랑스에서 리베르탱은 자유로운 영혼, 또는 기존의 종교적 도그마에서 벗어나 합리주의적 사고를 추구하는 자유사상가를 의미했다. 초기의 리베르탱들은 신 중심의 도덕 체계를 거부하고 개인의 자유와 이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개념은 점차 성적 자유와 쾌락을 지향하는 문화로 변질되어 갔다.
18세기 프랑스 귀족 사회에서 리베르티나지는 단순한 철학적 사상이 아닌, 실제로 실천되는 문화적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연애와 성적 탐닉이 권력관계 속에서 이루어졌고, 사랑은 개인적 감정을 넘어 심리적 지배와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특히 소설 속 메르테유 후작 부인은 단순한 연애를 넘어 사랑을 조종하는 기술을 구사하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복수를 실행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당시 귀족들이 리베르티나지를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렇듯 소설은 사랑과 권력, 욕망과 조작이 얽힌 리베르티나지의 극단적 형태를 가장 선명하게 담아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리베르티나지는 단순한 귀족들의 유흥 문화였을까, 아니면 시대적 흐름 속에서 등장한 필연적 현상이었을까? 《위험한 관계》가 보여주는 리베르티나지는 단순한 개인적 쾌락을 넘어, 권력과 사회 구조 속에서 형성된 하나의 문화적 산물로 그리고 있다.
18세기 프랑스에서 리베르티나지는 귀족 계층을 중심으로 발전했지만, 단순한 방종이나 타락이 아니라 당시 사회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문화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프랑스 사회는 절대왕정 아래에서 전통적인 도덕과 종교적 가치가 흔들리는 시대를 맞이했고,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기존의 권위와 질서에 대한 회의가 깊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일부 귀족들은 자유로운 연애와 쾌락을 추구하며, 기존의 가치관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해야만 했다.
특히, 리베르티나지는 개인의 자유와 욕망의 해방이라는 측면에서 현대적 개인주의의 일부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개인의 감정과 욕망을 존중하는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결혼과 가족이라는 전통적 제약에서 벗어나려는 태도가 형성되었다. 사회적으로 정해진 관계가 아니라, 개인의 선택과 쾌락을 중심으로 새로운 인간관계를 구성하려는 시도가 리베르티나지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단순한 개인의 자유를 넘어, 권력과 지배의 논리 속에서 작동했다. 사랑과 관계는 순수한 감정이 아니라 정복과 지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상대방을 조종하는 능력이 곧 힘이 되었다. 작품에서 메르테유 후작 부인과 발몽 자작이 벌이는 유혹과 심리 게임은 이러한 문화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있어 사랑은 쾌락을 위한 도구이자, 상대를 지배하고 조종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리베르티나지가 단순히 귀족들의 타락한 문화로만 남지 않은 이유는, 그 속에 존재하는 권력관계와 개인의 선택이라는 주제가 여전히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시대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구조적인 문제를 반영하고 있다.
마치 요즘까지 사랑과 권력, 자유와 책임의 균형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디까지가 권리이며, 어디서부터 도덕적 책임이 시작되는가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유효하다. 《위험한 관계》는 이러한 관계의 본질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보여준다.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은 프랑스혁명 이전까지 유지되었던 봉건적 신분제 사회를 의미한다. 이 체제는 왕이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고, 귀족과 성직자가 특권을 누리며, 대부분의 평민들이 세금과 노동의 부담을 떠안는 구조로 운영되었다.
이 용어는 혁명 이후 과거 사회의 질서를 부정적으로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절대왕정과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상징하는 용어로 자리매김했다. 앙시앵 레짐 하에서 프랑스 사회는 세 개의 신분(les trois ordres)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 계층은 법적·경제적 특권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생활을 영위했다.
앙시앵 레짐 사회는 출생에 의해 신분이 결정되는 사회였다. 개인이 이를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귀족과 성직자는 면세 특권을 누렸고, 제3신분(평민)은 세금과 봉건적 의무를 부담해야 했다.
1. 성직자(Clergé): 종교적 권위를 지닌 특권 계층
성직자는 사회적·종교적 권위를 지닌 계층으로, 법적으로 면세 특권을 보장받았다. 고위 성직자(대주교, 주교, 수도원장)는 귀족 출신이 대부분이었으며, 성직자의 지위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신도들에게 십일조(la dîme)를 걷기도 했다. 당시 이러한 계층의 사람들은 베르사유 궁전과 같은 왕실 사교계에서 활동하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는 생활을 이어갔다.
마을 신부, 수도사와 같은 하위 성직자들은 대부분 평민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반 국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낮은 보수를 받았다. 농민들과 가까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일부는 혁명 시기에 평민의 편에 서기도 했다. 성직자 계층은 법적으로 강한 특권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 귀족 출신의 고위 성직자와 평민 출신의 하위 성직자 간의 격차가 존재했다.
2. 귀족(Noblesse): 세습적 특권을 유지한 계층
귀족 계층은 사회적·정치적 특권을 누리는 동시에 면세 혜택으로 주요 관직을 독점하고 있었다. 검의 귀족(Noblesse d’épée)이라고 불리는 계층은 전통적인 귀족 계층으로, 군사적 공헌을 통해 작위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왕권 강화를 위해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으로 소집하면서 실질적인 정치적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법의 귀족(Noblesse de robe)은 법관직을 구매하여 귀족 신분을 획득했던 계층으로, 관료와 법률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재정적 능력이 있었지만, 전통 귀족들에게는 낮게 평가받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지방 귀족(Provincial Nobility)은 지방에 거주하는 귀족들을 의미했는데, 일부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귀족들도 존재했다. 일부는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부르주아(부유한 평민)와 결혼하여 재산을 확보해야만 했고, 이러한 행태는 점점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국가 재정 위기가 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특권을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면서 제도적으로는 경제적 부담을 평민에게 전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했다.
3. 평민(Tiers État): 사회적·경제적 부담을 짊어진 계층
평민들은 법적·경제적 특권이 없는 계급으로 프랑스 인구의 97~98%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세금과 봉건적 부담을 지며 살아가야만 했다.
부르주아(Bourgeoisie)라고 불리는 계층은 상인, 은행가, 변호사 등으로 구성되었다. 경제적으로 부유했지만 법적으로 귀족의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정치적 발언권을 요구하며 점차 혁명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했다.
반면 농민(Paysans)은 프랑스 인구의 80%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대다수가 귀족과 성직자의 토지에서 소작농으로 일했다. 세금과 봉건적 의무로 인해 생계가 어려웠으며, 혁명 시기 가장 강력한 반발을 보인 계층이기도 했다.
장인과 공장 노동자 같은 도시 노동자(Artisans & Ouvriers)들은 열악한 근로 환경과 저임금에 시달려야만 했다. 빵 가격 상승과 경제적 불안정으로 인해 급진적인 혁명 세력이 되었다.
이미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앙시앵 레짐 시대의 생활은 신분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귀족들은 사치와 향락을 즐겼고, 면세 특권을 누리며 경제적 부담 없이 풍요로운 생활을 유지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리는 연회와 무도회는 귀족 문화를 상징했고, 연애와 사교 활동이 중요한 사회적 활동으로 여겨졌다. 반면 평민의 삶은 경제적 불평등 속에서 지속되었다. 농민들은 귀족과 성직자에게 세금과 봉건적 의무를 부담해야 했고, 도시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무 환경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특히 18세기말에는 빵 가격 상승과 경제 불황으로 인해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졌으며, 이로 인해 1789년 프랑스혁명의 원인이 되었다.
루이 14세부터 이어진 균열은 지속된 전쟁과 사치로 인해 국가 재정이 파탄에 이르렀다. 루이 16세에 이르러서는 삼부회를 소집하는 등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귀족들의 반발로 인해 무산되었다. 결국, 1789년 제3신분이 국민의회를 결성하면서 프랑스혁명은 시작되었고, 앙시앵 레짐은 붕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