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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이 남긴 꿈과 덫

《적과 흑》 by 스탕달

by 프렌치 북스토어

프랑스 혁명(1789-1799)은 단순한 정치적 변혁이 아니라 프랑스 사회 전체의 가치관을 뒤흔든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어쩌면 구체제를 끝내고 근대문화의 시작점이라고도 자칭하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의 이상은 왕정의 몰락과 나폴레옹 제국의 부흥을 거치면서 프랑스인들의 정신에 깊이 각인되었다. 이후 왕정복고 시대(1815-1830)에 들어서면서도 프랑스 혁명의 이상은 여전히 강력한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스탕달(Stendhal)의 《적과 흑(Le Rouge et le Noir)》은 바로 이 역사적 전환기 속에서 혁명의 유산과 새로운 세대의 정체성이 충돌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쥘리엥 소렐은 나폴레옹을 이상으로 삼으면서 신분 상승을 통해 사회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젊은이이다. 그러나 그가 살아가는 현실은 나폴레옹의 영광이 사라지고, 귀족과 성직자 계급이 다시 권력을 장악한 왕정복고의 시대였다. 쥘리엥은 혁명이 남긴 자유와 야망의 정신을 품고 있지만, 당대 사회의 보수적인 계층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내적 이상향과 외적인 사회적 환경의 갈등은 프랑스 혁명이 남긴 유산과 그 영향을 받은 새로운 세대가 겪었던 혼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0220831112643000000_215.jpeg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된 나폴레옹", 자크 온프로이 드 브레빌, 1931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프랑스 혁명과 사회적 변동


1789년 프랑스 혁명은 구체제(Ancien Régime)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였다. 혁명은 왕권신수설에 기반한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국민주권과 법 앞의 평등이라는 개념을 확립했다. 특히 나폴레옹 시대(1799-1815)에 이르러 혁명의 정신은 법과 제도를 통해 구체화되었으며, 나폴레옹 법전(Code Napoléon)을 통해 신분제가 폐지되고 능력주의(Méritocratie)가 강조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과거 귀족 중심의 사회를 탈피하여 부르주아와 평민 계층이 사회적으로 부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혁명의 혼란은 정리되었지만, 절대적인 권력의 등장은 곧 또 다른 형태의 권위주의적 통치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황제가 되었고, 유럽 전역에 프랑스 혁명의 이상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나폴레옹이 정복자가 이상으로 영웅으로 인식되고 있는 이유는 전통적인 프랑스 계급 사회에서 평등과 능력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적 성공을 이룰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일반 대중들은 개인의 계급에 관계없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Louis_XVIII_relevant_la_France.jpg "1814년 4월 24일 부르봉 왕가의 귀환", 루이 필립 크레팽, 1814년, 베르사유 궁전




혁명과 복고, 두 가치관의 충돌


1815년 워털루 전투(La Bataille de Waterloo)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프랑스에서는 왕정복고(1815-1830)가 이루어졌다. 루이 18세와 샤를 10세가 즉위하면서 프랑스는 다시 부르봉 왕조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고, 귀족과 성직자 계층이 권력을 되찾았다. 왕정복고 체제는 혁명과 나폴레옹 시기의 사회 변화를 완전히 뒤집으려 했다. 특히 과거 특권층이었던 귀족들은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기 위해 보수적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왕정이 복귀하면서 프랑스 사회는 혁명 이전과 이후의 가치가 충돌이 시작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왕권이 회복되었지만, 혁명과 나폴레옹이 남긴 사상적 영향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계층은 경제적으로 성장했고, 평민들도 여전히 신분 상승의 가능성을 꿈꾸었다.


하지만 정부는 이러한 변화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구체제의 질서를 회복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러한 보수적 분위기 속에서 야심을 가진 젊은이들은 극심한 좌절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20240129114259000000_portrait_de_napoleon_ier_btv1b8414411r_f1_web.jpg "나폴레옹의 초상화", 1821년, 프랑스 국립 도서관




그럼에도 프랑스 사회는 프랑스는 혁명과 나폴레옹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 채, 전통적인 귀족 문화와 새로운 시민 계급의 가치가 공존하는 불안정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정치적으로는 왕정이 복구되었지만, 대중들은 사회적으로는 평등과 능력주의에 대한 혁명의 이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쥘리엥 소렐은 이러한 시대적 혼란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인물이다. 그는 평민 출신이지만 지적 능력과 야망을 통해 상류층으로 올라가기를 꿈꾼다. 그러나 당시 사회는 이미 혁명의 이상을 뒤로한 채 귀족 중심의 질서를 회복하고 있었고, 쥘리엥과 같은 신흥 계층이 기존 체제 속에서 인정받기는 어려웠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은 곧 소설의 《적과 흑》의 주요 갈등을 형성하는데 밑바탕이 된다.




20230621165349000000_8_y2_68010_1_page_de_titre.jpg 《적과 흑》, 1921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작품 줄거리


쥘리엥 소렐은 프랑스 베리에르라는 작은 마을의 목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학습과 성공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보이는 아이로 자란다. 특히, 나폴레옹을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쥘리엥은 군인이 되어 명예를 얻고 싶은 꿈을 꾸게 된다. 하지만 나폴레옹 시대가 끝나자 그는 성직자의 길을 택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하층 계급 출신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성직자가 되는 것이었다.


라틴어에 능통했던 쥘리엥은 시장인 레날 씨의 집에서 아이들의 가정교사로 일을 하게 되면서 자신의 야망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지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외모 또한 준수했기에 쥘리엥은 자신의 외모를 십분 활용한다.


쥘리엥은 젊고 아름다운 시장의 부인 레날 부인의 순수함과 따뜻함에 관심을 갖게 된다. 레날 부인 또한 지적인 쥘리엥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는 위험한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점차 주변 사람들의 의심을 사게 된다. 자신과 레날 부인의 사랑이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쥘리엥은 결국 신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정한다.




20201205145245000000_ess_1696.jpg "마틸드와 쥘리엥", 작품 속 일러스트, 프랑스 국립도서관





신학교에서도 명석함과 뛰어난 능력으로 인정받게 된 쥘리엥은 라 몰 후작의 비서로 추천되어 파리에 가게 된다. 파리 상류 사회에 진출한 그는 라 몰 후작의 딸인 마틸드를 만나게 된다. 마틸드는 지적이고 도도한 여성이었다. 철부지처럼 행동했지만, 그녀는 쥘리엥의 매력과 지성에 매료되게 된다.


마틸드와의 관계는 쥘리엥에게는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쥘리엥은 마틸드와 관계를 발전시키는 일이 라 몰 후작에게는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는 열망에 사로 잡혀 마틸드를 임신시키게 된다. 라 몰 후작은 어쩔 수 없이 마틸드와 결혼을 시키기 위해 쥘리엥을 귀족으로 만들기로 결정한다.


성공이 눈앞에 다가온 순간, 레날 부인이 라 몰 후작에게 보낸 편지가 모든 것을 바꿔놓게 된다. 편지에는 쥘리엥과 자신과의 과거에 있었던 관계가 쓰여 있었다. 쥘리엥의 과거를 알게 된 라 몰 후작은 귀족으로 만들어 주겠다던 쥘리엥과의 약속을 취소하게 된다. 모든 계획인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절망에 빠진 쥘리엥은 교회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는 레날 부인에게 총을 쏘게 된다. 다행히 레날 부인은 무사했지만 쥘리엥은 살인 미수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리고는 결국 쥘리엥은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한다.




1692.jpg 드라마에서 쥘리엥 소렐을 연기한 김 로시 스튜어트(Kim Rossi Stuart), 1997년




쥘리엥 소렐(Julien Sorel)


소설 속 쥘리엥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의 영향 아래에서 성장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평민 집안 출신으로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가정에서 성장한다. 그러나 쥘리엥은 바뀐 사회적 분위기로 더 나은 삶을 꿈꾸게 된다. 능력주의를 믿고 상류층으로 진입하려 했던 것이다. 쥘리엥의 내면은 그야말로 혁명적 열망과 현실적 한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폴레옹의 사고를 숭배하면서 자신도 능력 있는 인물이 되어 사회적 위상을 얻겠다는 꿈을 꾸게 된다.


그의 야망은 단순히 개인적인 성공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강한 욕망은 강렬했고, 그는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기회를 포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쥘리엥의 이러한 성격은 그가 나폴레옹의 후계자로서, 즉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의 이상을 계승할 수 있는 인물로 자처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하지만 그가 맞이하는 현실은 사뭇 달랐다. 과거의 혁명적 가치들이 퇴색되었고, 구체제가 다시 세워진 후의 사회 질서에서 더 이상 자유롭고 평등한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David_-_Napoleon_crossing_the_Alps_-_Malmaison1.jpg "알프스 그레이트 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 자크 루이 다비드, 1801년




나폴레옹을 향한 동경과 이상


나폴레옹은 쥘리엥에게 단순한 역사적 인물 이상으로 그의 꿈과 야망을 실현할 수 있는 상징적 존재로 그려진다. 나폴레옹은 혁명 이후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고, 자신의 능력과 열정으로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누렸던 인물이다. 쥘리엥은 그를 이상화하고, 자신의 삶도 나폴레옹과 같은 위대한 인물로 거듭나기를 꿈꾼다.


그의 꿈은 '성공'이라는 목표로 구체화되었다. 그는 능력 있는 인물로서 사회적 성공을 이룰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프랑스 혁명에서 이야기한 능력주의와 개인의 자유라는 씨앗은 그의 가슴에서도 피어나고 있었다. 그는 성직자나 귀족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 틈에서 그들과 함께 교류했고, 이러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하지만 왕정은 다시 복고되었고, 사회는 다시 불평등한 구조 속으로 퇴보한 듯 보였다. 성공의 기회는 오직 귀족 계층에게만 주어졌고, 그들과 같은 선상에서 경쟁할 수 없었다. 이러한 현실은 쥘리엥의 내적 갈등을 더욱 고조시켰다. 그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라는 이상적 삶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지만, 현실적 제약은 그에게 끊임없는 한계로 다가왔다. 마치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질 것 같지 않는 현실처럼.




65.jpg "파리에서 체포되는 조르주 카두달", 자크 루이 방스, 카르나발레 박물관




만인이 만인에게 적대적이었던 시대


쥘리엥은 교육을 통해 사회적 상승을 이루려 했다. 이러한 시도는 당시 부상하던 부르주아 계층의 전형적인 태도와 닮아 있다. 경제적으로 부르주아 계층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모습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부르부아의 영향력이 부상했다. 이러한 새로운 권력의 등장은 계층 간의 갈등은 유발했다. 귀족 사회와 부르주아 계층, 그리고 쥘리엥과 같은 신흥 계층의 젊은이들은 사회적 모순에 더욱 강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쥘리엥과 같이 개인의 능력으로 귀족 계급과 성직 계급 모두에게 인정받는 인물이 나타났지만, 그들은 여전히 혈통과 가문을 중시하며 평민 출신으로 배척당했다. 과거 성직자로서 사회적 지위를 얻고자 하는 방식도, 또 부르주아로 새로운 성공을 이루고자 하는 시도도 녹록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변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세대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러한 의문은 시기로, 투쟁으로 그리고 경계적인 모습으로 기존 사회 질서에 대한 불만과 반발심이 표출되었다.




"무도회에 참석한 쥘리엥과 레날 시장", 작품 속 일러스트, 1854년




개인주의와 이상 사이의 갈등


소설 속 쥘리엥의 내면에서는 혁명이 제시했던 이상과 개인적인 욕망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나폴레옹을 동경함과 동시에 프랑스 혁명의 유산을 이어가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현실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귀족 사회의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인정받기를 바라지만, 당시 사회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인정과 특권층의 후원이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내적 갈등은 당시 청년들이 공통적으로 겪었던 문제였다. 한편으로는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는 혁명 정신이 남아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과거의 계급 질서가 여전히 지배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은 젊은 세대들에게는 어떤 가치를 따라야 할지 혼란을 겪었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많은 젊은 세대들은 쥘리엥처럼 기존 사회 질서를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이용하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라는 이상을 지향하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귀족 계층의 가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점차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날이 서 있는 채로 살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Révolution_de_1830_-_Combat_devant_l'hôtel_de_ville_-_28.07.1830.jpg "파리 시청 앞에서 싸움", 장 빅터 슈네츠, 1833년, 쁘띠 팔래




평등한 사회,

가능성과 한계


프랑스 혁명이 지나간 후에도, 혁명의 사상과 가치관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계몽주의에서 비롯된 합리적 사고방식,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는 철학은 여전히 사회 곳곳에 남아 있었다. 이러한 프랑스 혁명의 잔재는 혁명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세대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은 프랑스 혁명의 이상적 이론을 학문적으로 접하면서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들에게 왕정복고 이후 루이 18세와 샤를 10세의 과거의 특권 계급을 복권시키고, 혁명 이전의 사회 질서를 회복하려는 행보는 그들을 향한 탄압처럼 받아들여졌다. 젊은 세대는 한편으로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믿으면서도, 현실에서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는 모순적인 환경을 인내해야 했다.




20201206233917000000_lai_046.jpg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 1830년, 루브르 박물관




이론적으로는 모든 시민이 평등하며 능력에 따라 사회적 위치를 결정할 수 있어야 했다. 이러한 능력주의적 가치가 어느 정도 실현되는 듯 싶었지만, 다시 신분제가 강화되면서 사회적 이동의 가능성이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많은 대중들은 출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이미 사회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귀족 계층은 이러한 변화를 인정하지 않았고, 기득권 중심의 사회적 질서는 새롭게 등장한 이들에게 틈을 제공하지 않았다.


이러한 갈등은 왕정복고기의 프랑스 사회가 가진 근본적인 모순을 보여준다. 혁명의 이상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사회 구조는 다시 과거로 회귀하고 있었다. 귀족과 성직자 계급은 기존의 특권을 유지하려 했고, 부르주아 계층은 경제적으로 성장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제한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계급적 긴장은 결국 1830년 7월 혁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시 한번 변화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Unknown_Artist_-_Portrait_of_Stendhal_(Henry_Beyle)_(Grenoble_-_(MeisterDrucke-913646).jpg 스탕달(Stendhal)




작품이 제시하는 ‘새로운 세대’


스탕달이 《적과 흑》에서 그리고 있는 새로운 세대는 단순히 혁명 이후 등장한 젊은 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시대적 모순 속에서 방황하는 세대로, 자유롭고 정의로우며 평등한 사회를 꿈꾸지만, 그것을 실현할 수 없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좌절감을 느끼는 모든 세대를 의미한다.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쥘리엥의 실패는 단순한 개인적 좌절 이상으로 당시 청년들이 직면했던 사회적 한계를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을 통해 이루고 싶었던 이상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큰 장벽과 충돌하는지를 보여주었다. 더욱이 당시 젊은이들은 여전히 존재하는 특권층 중심의 사회 질서에 맞서 싸우려 했지만, 결국 인정받지 못한 채 좌절하거나 기존 질서에 순응하는 모습은 프랑스 혁명의 유산이 단순한 사회적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에게 또 다른 형태의 도전과 갈등을 안겨주었음을 강조한다.


스탕달은 작품을 통해 당시 프랑스 사회가 젊은 세대에게 진정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 혁명이 추구했던 이상적 사회가 현실 속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타협되었는지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의 시각은 단순한 사회 비판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개인이 겪는 심리적 혼란과 정체성의 문제까지 깊이 있게 탐구하며, 시대의 흐름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길을 찾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쥘리엥의 이야기는 19세기 프랑스의 한 젊은이의 비극적 운명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시대의 모순과 이상이 충돌할 때, 새로운 세대가 겪는 방황과 투쟁을 담은 이야기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사회적 구조의 장벽 앞에서 좌절하고,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며, 때로는 혁명의 유산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지 질문하게 된다.








Serment_du_Jeu_de_Paume_-_Jacques-Louis_David.jpg "테니스 코트의 서약", 자크 루이 다비드, 1790년, 카르나발레 박물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로 프랑스 사회는 변화의 연속이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새로운 정치 체제를 실험했던 격동의 무대였다. 이 기간 동안 프랑스는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도입했으며, 제국과 왕정을 거쳐 다시 공화정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했다.



1. 프랑스 혁명의 발발 (1789~1799)


18세기 후반 프랑스 사회는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당시 프랑스는 루이 16세가 통치하는 절대왕정 체제였으며, 국민은 신분제(앙시앵 레짐, Ancien Régime) 속에서 불평등한 삶을 살아야 했다.


프랑스 혁명은 경제적 위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는 오랜 전쟁(예: 7년 전쟁, 미국 독립전쟁)으로 인해 재정이 악화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왕실의 사치와 낭비가 심각했고, 국가 부채가 증가하면서 정부는 세금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귀족(제1신분)과 성직자(제2신분)는 면세 특권을 가지고 있었고, 모든 세금 부담은 평민(제3신분)에게 집중되었다.


사회적 불평등은 또 하나의 혁명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프랑스 사회는 제1신분(성직자), 제2신분(귀족), 제3신분(평민)으로 나뉘었다. 전체 인구의 98%를 차지하는 제3신분이 가장 많은 세금을 내면서도 정치적 권리는 거의 없었다. 이러한 사회적 구조 속에서 계몽주의 사상가(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의 영향으로 평등과 자유에 대한 요구가 커지기 시작했다.


1789년, 루이 16세는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세금 개혁을 실시한다. 175년 만에 삼부회(États généraux)를 소집했으나, 평민(제3신분)의 요구를 무시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에 제3신분 대표들은 스스로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를 결성하고 왕에게 맞서기로 결정한다.


결국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이 시작되면서 프랑스 혁명은 시작된다. 국민들은 왕권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며 혁명의 시작을 알린 것이다. 이후 국민의회는 봉건제 폐지 선언(1789년 8월 4일)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1789년 8월 26일)을 발표하며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공표했다.




Arrest_of_Louis_XVI_and_his_Family,_Varennes,_1791.jpg "바렌에서 체포되는 루이 16세와 그의 가족들", 토마스 팔콘 마셜, 1854년




1791년, 입헌군주제 헌법이 제정되게 된다. 루이 16세는 제한적인 권력을 가진 입헌군주로써의 국가가 탄생된 것이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혁명을 반대하면서 오스트리아로 도망치려다(바렌 사건) 실패하고, 국민의 신뢰를 더욱 잃게 된다.


1792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개입으로 프랑스는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이 전쟁을 계기로 혁명 정부는 더욱 급진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결국 1793년, 루이 16세가 처형되면서 프랑스는 왕정을 완전히 폐지하고 제1공화국을 선포하게 된다.


루이 16세 처형 후 자코뱅당(급진파)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고, 로베스피에르는 반혁명 세력을 처형하며 공포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포 정치는 1794년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면서 종결되었는데, 이후 온건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지만, 여전히 혼란은 지속되었다.


이렇게 혼란의 혼란을 거듭하는 상황은 1799년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을 사실상 끝낸 장본이기도 하지만, 잠시 동안 프랑스 사회의 안정을 되찾아준 인물이기도 했다.




François_Gérard_-_Napoleon_I_001.jpeg "황제에 등극한 나폴레옹", 프랑수아 제라르, 1850년




2. 나폴레옹 시대 (1799~1815)


나폴레옹은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정치력을 바탕으로 1799년 쿠데타를 일으켜 통령정부를 수립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유지하면서도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강화했다.


나폴레옹은 1804년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하면서 신분제 폐지, 평등권 확립, 사유재산 보호 등 근대적 법률 체계 정비했다. 또한 중앙은행 창설, 산업 및 교육 개혁을 통해 경제를 개혁하는 행보를 이어갔다. 그는 국민의 지지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면서 프랑스 제1제국 수립하게 된다. 그리고 유럽 정복을 시작한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을 정복하며 최강의 제국 건설의 목표를 꿈꾸게 된다. 하지만 1812년 러시아 원정 실패하면서 그의 꿈은 실패로 돌아가고, 1814년 엘바 섬 유배되게 된다. 1815년 섬을 빠져나와 100일 동안 잠깐의 재기를 시도했지만 결국 워털루 전투 패배 후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게 된다.


3. 왕정복고와 7월 혁명 (1815~1830)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프랑스에는 부르봉 왕조가 복고하게 된다. 다시 과거로의 회기가 시작된 것이다. 루이 18세가 즉위했으나, 구체제로 완전히 돌아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인 샤를 10세는 전제정치를 부활시키려 했고, 결국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나 그를 폐위시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7월 혁명 후, 루이 필리프가 즉위하면서 부르주아 계층이 주도하는 7월 왕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부유한 계층에 유리한 정책을 펼쳤고, 결국 국민의 불만을 샀다.


4. 1848년 2월 혁명과 프랑스 제2공화국


루이 필리프의 보수적인 정책에 반발한 국민들은 1848년 2월 혁명을 일으켜 왕정을 무너뜨리고 프랑스 제2공화국을 수립하게 된다. 이로써 프랑스는 다시 공화정으로 돌아갔고, 국민 투표를 통해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로 즉위하며 제2제정(1852~1870)을 출범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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