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프랑스 사람들은 왜 낙관적이면서도 냉소적일까?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by 볼테르

by 프렌치 북스토어

프랑스인들처럼 낙관적인 사람들이 있을까? 물론, 전 세계에는 다양한 문화권에서 낙관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의 낙관주의는 그들의 역사, 문화, 사회적 배경과 깊이 연결되어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일상에서의 여유, 파리 에펠탑




그들은 개인의 자유와 표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가치를 둔다. 이는 일상생활에서 여유를 즐기고, 예술과 문화를 향유하며,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에서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미식, 예술,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들만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일상생활에서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방법을 안다. 또,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를 가지고 사회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러한 그들의 일련의 행동들은 프랑스인들이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1947년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한 시위 사진




반면 그들은 무척이나 비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격변의 시기를 여러 차례 경험하면서, 비관적인 사고방식은 그들의 문화 깊숙이 자리 잡았다.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 그 불만을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이러한 비관주의는 사회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무력감이나 냉소주의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프랑스 문학에서도 강하게 드러난다. 그중에서도 볼테르(Voltaire)의 《캉디드(Candide)》는 프랑스적 낙관과 비관이 충돌하는 가장 극적인 모습을 담아낸다. 소설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가능한 세계 중 최선이라는 낙관주의적 철학을 신랄하게 조롱한다. 주인공 캉디드는 "모든 것은 최선의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을 믿으며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만, 전쟁, 배신, 자연재해를 겪으며 점차 혼란에 빠진다. 특히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이라는 거대한 참사를 마주하면서 그는 낙관과 비관 사이에서 방황하게 된다.


그렇다면 볼테르는 단순한 비관론자였을까? 아니면 낙관과 비관을 넘어서는 또 다른 시각을 제시하려 했을까? 《캉디드》를 통해 볼테르가 전달하려는 진짜 메시지는 무척이나 흥미롭다.




계몽주의(Les Lumières)




계몽주의의 빛과 그림자


18세기 유럽은 ‘계몽의 시대(Siècle des Lumières)’라고 불릴 만큼, 이성과 과학, 인간의 진보를 신뢰하는 사상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였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합리적 사고를 통해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고, 그 결과 과학, 철학, 정치사상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계몽주의자들은 신권정치, 절대왕정, 미신, 비합리적인 종교적 권위를 비판하면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 사회 개혁을 강조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루소(Rousseau), 디드로(Diderot), 몽테스키외(Montesquieu)와 같은 철학자들은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계몽주의 사상가로 활동했다. 그들은 문학과 철학, 백과사전 편찬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주도했다. 또, 그들은 이성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고, 교육과 지식을 확산하면서 인간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은 결국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했다.




볼테르




볼테르 역시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이었다. 신권정치와 교회의 억압, 사회적 불평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자유와 관용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계몽주의 사상가들과는 차별화된 시각을 갖고 있었다. 루소를 비롯한 일부 철학자들은 인간 본성을 선하게 바라보면서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꿈꿨지만, 볼테르는 달랐다. 그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사회의 부조리에 중점을 두고, 보다 현실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맹목적인 낙관주의를 경계하며, 이성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조차 지나친 이상주의일 수 있음을 지적했는데, 이러한 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캉디드》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계몽주의가 가진 빛과 그림자를 모두 비춰 보이고자 했다.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계몽주의와 낙관주의


계몽주의는 인간이 이성과 과학을 통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낙관적인 믿음을 기반으로 발전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미신과 무지를 극복하고, 합리적 사고와 지식의 힘을 통해 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과학과 철학의 발전은 이러한 믿음을 뒷받침했다. 철학적 사고를 통해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강화해 갔다. 그 결과, 정치와 사회 개혁의 원동력이 형성되었다. 계몽주의자들은 “우리는 과거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성의 힘을 기반으로
합리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


데카르트(René Descartes) 같은 철학자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Je pense, donc je suis)"라는 철학적 명제를 통해 이성이 인간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대중들에게 확산시켰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인간이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존재라는 인식을 보편화시켰다. 이러한 이성적 판단의 존재로서의 인식은 인간 스스로 합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는 믿음을 형성했다.




뉴턴(Isaac Newton)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따른
자연을 이해하고 사회도 개혁할 수 있다는 자신감


이러한 시각을 뒷받침했던 분야가 과학이었다. 당시 과학적 성취는 세상이 규칙과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뉴턴(Isaac Newton)의 물리학은 자연의 질서를 수학적으로 설명해 주었으며, 우주를 신의 섭리가 아닌 법칙으로 이해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과학적 발견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점차 세상을 더욱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사회도 개선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더 나은 정치 체제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사회 개혁의 가능성


이러한 인식은 정치와 사회제도의 개혁으로 번져갔다. 실제로 이론적 배경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몽테스키외(Montesquieu)는 권력 분립 개념을 제시하면서 절대왕정을 비판하고 합리적인 정치 체제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디드로(Diderot)와 달랑베르(D'Alembert)는 《백과사전(Encyclopédie)》을 편찬해 지식을 대중에게 보급함으로써 교육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퍼뜨렸다. 루소(Rousseau)는 민주적 정치 체제를 내세우며 인간의 자유를 강조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본성은 선하기 때문에, 스스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낙관론적 시선이 밑바탕이 되었다.




볼테르와 프리드리히 2세



볼테르의 계몽주의


이에 반에 볼테르는 계몽주의의 핵심 가치인 이성과 진보를 신뢰했지만, 맹목적인 낙관주의에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인간 사회가 발전할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 본성과 사회 구조의 근본적인 한계로 인해 불합리와 고통이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계몽주의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세계가 지나치게 낙관적이며,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특히, 볼테르는 신앙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강조했다. 그리고 종교적 광신과 미신이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주요 요인이라고 보았다. 그는 교회의 권력 남용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특히 영국의 자유로운 정치 체제와 비교해 프랑스의 절대왕정과 종교적 억압을 조롱하기도 했다. 그는 종교가 인간의 도덕성을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될 때, 오히려 사회를 후퇴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볼테르는 루소와는 달리 인간 본성이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완벽한 이상 사회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루소가 인간의 선함을 강조하면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반면, 볼테르는 사회가 개선될 수는 있어도, 인간의 어리석음과 탐욕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지나친 낙관주의를 경계하고, 현실을 직시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리스본 대지진", 작가미상




계몽주의의 한계


실제로 계몽주의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한계가 분명히 드러났다. 이성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불합리는 여전히 존재했다. 그들은 현실의 복잡성과 사회의 구조적 문제(부패, 불평등, 전쟁 등)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완벽해 보였던 계몽주의적 사고가 실제 사회에서는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재해가 불러온

현실적 반박


이러한 회의적인 시각에 불을 지핀 사건이 1755년에 있었던 리스본 대지진이다. 당시 지진으로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엄청난 지진과 쓰나미, 화재로 초토화되었고, 수만 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계몽주의적 낙관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 야기되었다. 계몽주의자들이 믿었던 "이성적 질서"가 현실에서는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신랄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특히,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가 주장한 "이 세계는 가능한 모든 세계 중 최선의 세계"라는 철학적 낙관주의는 리스본 대지진 앞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볼테르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맹목적인 낙관주의가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는 태도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소설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리스본 대지진을 경험한 후에도 여전히 "이 모든 것은 최선의 세계에서 일어난다"라고 주장하는 팡글로스를 풍자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나친 낙관론이 어떻게 인간의 고통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7월 혁명", 파리 시청 앞에서의 전투, 장 빅터 슈네츠, 1833년, 쁘띠 팔래




프랑스 혁명,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상이 낳은

혼란과 폭력


계몽주의가 주장했던 자유, 평등, 인권 사상은 결국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많은 계몽주의자들이 꿈꾸었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회를 실현하려는 시도가 혁명을 통해 본격화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은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시작되었지만, 혁명의 과정에서 극단적인 폭력과 혼란이 발생했다. 특히, 1793년 시작한 공포정치(Règne de la Terreur)는 혁명을 주도했던 자코뱅파가 반대 세력을 탄압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절대왕정의 억압을 타파하려 했던 혁명이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억압과 공포를 초래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




볼테르는 맹목적인 낙관주의도, 극단적인 비관주의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오히려 보다 현실적인 태도를 유지할 것을 강조했다.


《캉디드》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Il faut cultiver notre jardin)"라는 메시지는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실용적 태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변화는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현실적인 행동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세상의 불합리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는 무기력하게 체념하는 대신 각자가 실천할 수 있는 영역에서 변화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디오북,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라디오 프랑스, 프랑스 컬처 팟케스트




작품 줄거리


소설은 주인공 캉디드가 부유한 귀족의 성에서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의 스승 팡글로스(Pangloss)는 “이 세계는 최선이며, 모든 것은 최상의 이유로 존재한다”라고 가르치면서 순진한 캉디드에게 맹목적인 낙관주의를 심어준다. 그러나 캉디드는 성주 딸 퀴네공드와의 풋사랑이 발각되면서 성에서 쫓겨나고, 평온했던 삶은 순식간에 무너지게 된다.


냉혹한 현실 속으로 내던져진 그는 곧 전쟁터에 끌려가, 처참한 학살과 비극을 목격하게 된다. 스승 팡글로스와 재회하지만, 그 역시 신분이 몰락한 채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팡글로스는 여전히 "모든 것은 최선"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그런 스승의 태도를 지켜보며, 캉디드는 점차 회의감에 빠지기 시작한다.




《캉디드》, 퀀틴 블레이크의 일러스트, 2011년




이후 캉디드는 대지진이 휩쓴 리스본에서 끔찍한 참상을 직접 겪고, 종교재판에 휘말리는 등 연이어 비극적인 사건들과 맞닥뜨린다. 그 과정에서 그는 세상이 더 이상 팡글로스의 말처럼 최선일 수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잔혹한 현실 앞에서도 팡글로스는 끊임없이 낙관주의를 반복하지만, 캉디드는 점점 그 말에 의문을 품는다. 그는 스승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한편, 자신이 직접 겪은 고통과 혼란을 통해 “이토록 가혹한 세상이 정말 ‘최선의 세계’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결국 캉디드는 더 이상 타인의 철학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존재로 성장해 간다.




《캉디드》, 퀀틴 블레이크의 일러스트, 2011년




리스본을 떠나 남미로 향한 캉디드는 다시금 예기치 못한 모험에 휘말린다. 원주민들의 삶과 문화를 접하며, 그는 이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다양한 인간 군상과 사회의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던 중 그는 오랜 전설로만 알려졌던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를 찾아가게 된다.


엘도라도는 말 그대로 풍요롭고 평화로운 유토피아였다. 빈곤도, 전쟁도, 종교적 억압도 없는 그곳에서 캉디드는 잠시나마 완전한 세계의 모습을 경험한다. 모든 것이 조화롭고, 이상적이기까지 한 이 도시는 그동안 그가 겪어온 비극과 부조리로 가득한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캉디드》, 퀀틴 블레이크의 일러스트, 2011년




그러나 그 완벽함 속에서도 캉디드는 사랑하는 퀴네공드를 되찾고 싶다는 열망을 버릴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엘도라도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 결정을 통해 캉디드는 깨닫는다.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이상향일지라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엘도라도는 그저 잠시 머물 수 있었던 꿈같은 공간일 뿐, 현실의 문제는 결국 스스로 마주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진리를 캉디드는 몸소 체험한 것이다.


이후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캉디드는 팡글로스, 퀴네공드,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한적한 농가에 정착하게 된다. 더 이상 "모든 것은 최선"이라는 말만을 맹목적으로 믿지 않게 된 그는,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길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캉디드는 작품의 마지막에서 이러한 깨달음을 "우리는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Il faut cultiver notre jardin)"라는 문장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허황된 이상향을 좇기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현실에 뿌리내리고 작은 것부터 정성스럽게 가꾸는 삶. 그것이야말로 캉디드가 온갖 고난과 모순 속에서 끝내 얻어낸 가장 값진 교훈이었다. 그렇게 소설은 조용하지만 묵직한 깨달음과 함께 마무리된다.




《캉디드》, 캉디드와 팡글로스, 퀀틴 블레이크의 일러스트, 2011년



팡글로스의 맹목적 낙관주의


작품 속 팡글로스는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의 낙관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라이프니츠의 낙관론에 따르면 신이 완전한 존재이므로, 그가 만든 세계 또한 궁극적으로 최선이라 말한다.


팡글로스는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소설 내내 현실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행과 비극을 합리화하려 시도한다. 리스본 대지진과 같은 참사를 겪으면서도 “모든 것은 신의 섭리에 의해 최선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라고 말하고, 심지어 자신의 고통과 질병조차도 신의 계획 속 일부라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언한다.


볼테르는 이러한 맹목적인 낙관주의의 비합리성을 조롱한다. 리스본 대지진 한가운데에서도 “이 모든 것이 최선의 세계에서 최선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라며 현실적인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지고 허무맹랑한지를 보여준다. 이후에도 한 노예가 가혹한 학대를 당하는 모습에도 신의 섭리라고 평하고, 매를 맞고, 교수형을 당할 뻔하고, 성병에 걸리는 등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이 모든 것은 최선"이라는 말만을 반복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불행할 운명을 타고난 존재




마르탱의 극단적 회의주의와 냉소주의


캉디드의 여정에서 만나는 마르탱은 팡글로스와 정반대 되는 철학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극단적인 비관주의자로, 세상이 본질적으로 악과 불행으로 가득 차 있다고 믿는 인물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사건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시선을 갖고 있다. 인간이 타고난 본성 자체가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전쟁, 불평등, 부조리를 경험하면서 더 이상 인간에게 희망을 두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마르탱의 태도는 팡글로스의 낙관주의만큼이나 극단적이다. 철학적 냉소주의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팡글로스가 모든 것을 낙관적으로 보려는 것처럼, 마르탱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본다. 그러나 그의 태도 또한 단순한 체념이나 불평에 불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볼테르의 《캉디드》, 프랑스어




순진한 이상주의자에서

비관주의를 넘어 현실주의로


이러한 낙관주의를 바라보는 캉디드의 시선은 우리와 닮아 있다. 소설 초반부에는 순진한 이상주의자로 팡글로스의 낙관주의적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삶의 모습에 감동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그는 "이 세계는 최선의 세계"라는 철학을 신봉하면서 인생이 뜻대로 풀릴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캉디드는 불합리와 시련과 불행을 직접 겪어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함께 변화한다. 비관주의적이 되었다가도 이를 넘어 현실주의적 시각으로 발전하게 된다.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더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캉디드는 더 이상 철학적 논쟁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대신 현실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러한 그의 선택은 볼테르가 제시하는 현실적인 철학이 담겨 있다. 맹목적인 낙관이나 극단적인 비관이 아닌 능동적인 실천과 현실적인 해결책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시작 - 바스티유 감옥 습격", 장-피에르 우엘, 1789년, 프랑스 국립 도서관




역사 속의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의 교차점


작품에서 나타난 낙관과 비관의 긴장은 단순한 철학적 논쟁에서 멈추지 않는다. 프랑스 역사와 문화 속에서 계속 반복되어 온 사고의 양면성을 드러내고, 그들의 삶에 녹아 있는 철학적 기틀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프랑스의 역사에는 특히 이상과 현실이 부딪히며 낙관과 비관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혁명(1789년)이 그랬다. 자유, 평등, 박애를 추구한다는 이념으로 시작했지만, 혁명이 가져온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많은 이들은 인간이 스스로 사회를 바꾸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절대왕정이 무너진 후에도 혼란과 분열은 계속되었다. 오히려 이러한 혼란은 수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고, 폭력과 공포가 난무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나폴레옹의 집권과 전쟁, 산업혁명 속의 사회적 불평등, 두 차례의 세계대전 등을 거치면서 프랑스 사회는 진보와 퇴보, 희망과 절망을 오가는 경험을 반복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은 프랑스인들이 단순한 낙관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이상을 꿈꾸지만, 그것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마치 작품 속 캉디드처럼 세상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지만, 맹목적인 낙관론을 경계하면서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 오디오북




프랑스 문화 속에서 나타나는 낙관과 비관


프랑스 문학과 예술은 낙관주의와 비관주의가 혼재된 세계관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매체다. 19세기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스탕달의 《적과 흑》이나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는 이상을 꿈꾸지만 현실에서 좌절하는 주인공을 통해 낙관과 비관의 긴장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시대의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에서 인간의 고통과 부조리를 그리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 태도를 유지한다.


반면, 20세기의 실존주의 철학과 문학에서는 보다 강한 비관적 정서가 드러난다. 사르트르의 《구토》나 카뮈의 《이방인》은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을 강조하며, 세상은 본질적으로 의미 없는 곳이라는 비관적 시각을 보여준다.


프랑스 영화 또한 이러한 양면성을 반영한다. 프랑스 영화에는 희망과 꿈을 이야기하는 작품도 많지만, 현실의 냉혹함과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조명하는 작품들이 더 큰 영향을 끼쳐왔다. 특히 프랑스 누벨바그(New Wave) 영화에서는 화려한 해피엔딩보다는 인간의 불완전함과 복잡한 감정을 탐구하는 경향이 강했다. 프랑스 예술이 이런 방향으로 발전한 것은 프랑스 사회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는 태도를 지속적으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의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프랑스인의 생활 철학 속에 나타나는 양면성


이제 프랑스인들의 일상적인 사고방식 속에서도 낙관과 비관은 공존하는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들은 평소 유머와 냉소를 즐기면서도, 동시에 삶의 작은 기쁨을 중요하게 여긴다. 프랑스인들은 정부나 제도를 향한 강한 비판 의식을 가지고, 공공정책이나 사회문제에 대해 자주 불평을 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예술과 음식, 여행과 같은 삶의 즐거움을 찾는 데에도 열정적이다.


이러한 특징은 작품의 메시지와도 연결된다. 세상이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시각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시선은 국가나 사회를 향해 강한 불만을 제기하면서도, 삶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개인적인 수준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려 하는 그들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그들에게 비관주의는 체념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는 태도이며, 낙관주의는 근거 없는 희망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인 것이다.







라이프니츠와 가능한 세계 중 최선의 세계, 장 폴 몽강




가능한 세계 중 최선의 세계

(le meilleur des mondes possibles)


독일의 철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가 주장한 "이 세계는 가능한 세계 중 최선의 세계(le meilleur des mondes possibles)"라는 개념은 그의 철학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동시에 가장 많이 오해받는 주장 중 하나이다. 이 철학은 신정론(Théodicée, Theodicy)이라는 저서에서 본격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가능한 세계 중 최선의 세계"란?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신은 전지전능하고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으며, 선한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할 때 수많은 ‘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가장 좋은 세계를 선택하여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즉,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지만, 이 모든 것을 고려해도 이 세계가 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가장 완전한 상태로 창조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능한 세계들'은 신이 상상할 수 있었던 모든 현실적 시나리오를 의미한다. 신은 그중에서도 가장 조화롭고, 가장 많은 선을 포함하고, 가장 큰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세계, 즉 ‘최선의 세계’를 선택해 현실로 만들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라이프니츠와 가능한 세계 중 최선의 세계, 장 폴 몽강




악의 존재와 신의 완전함의 조화


이 주장에서 가장 큰 의문은 바로 악의 존재이다. "만약 신이 전능하고 선하다면, 왜 이 세계에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것일까?” 라이프니츠는 이에 대해 세 가지 형태로 악을 구분해서 설명한다. 우선 형이상학적 악은 존재 자체의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죽는 존재라는 사실은 태초부터 죄를 지은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물리적 악은 고통, 지진이나 질병 같은 자연재해를 의미한다. 도덕적 악은 인간의 죄, 도덕적 타락으로 발생한다.


그는 이 모든 악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한 필연적인 부분이라고 본다.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은 악을 선택할 가능성이 있지만, 자유 의지 자체는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신은 선과 악을 모두 허용했다는 논리이다.


이 철학이 비판받은 이유


라이프니츠의 이론은 철학적으로 정교했지만, 현실적인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고통과 재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이 모든 것도 최선의 세계의 일부다”라는 말은 위로가 되기보다는 현실을 외면하는 철학처럼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볼테르는 이 사상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라이프니츠 철학의 비현실성과 맹목성을 비판하면서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는 이성과 판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리스본 대지진", 조앙 글라마 스트뢰베를레, 1755년, 국립고대미술관(Museu Nacional de Arte Antiga)




리스본 대지진


1755년 11월 1일,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유럽 역사상 가장 참혹한 지진 중 하나가 발생했다. 엄청난 규모의 지진과 그에 따른 해일, 그리고 화재로 인해 도시는 초토화되었고,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대재앙은 당시 유럽 전역에 퍼져 있던 계몽주의 철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지즌의 규모는 8.5~9.0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지진은 유럽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자연재해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강진 → 쓰나미 → 화재로 이어진 재앙을 겪게 된 리스본의 현실은 참혹했다. 지진으로 인해 건물들이 붕괴되었고, 그 여파로 대규모 쓰나미가 발생했다. 해변가의 건물과 배들이 휩쓸려가면서 도시 전체가 초토화되었다. 이후 발생한 대규모 화재로 인해 남아 있던 건물들마저 무너져 내린 상황이었다. 당시 사망자는 약 30,000~50,000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리스본 인구의 약 1/3에 달하는 규모였다. 도시의 85%가 파괴되었고, 왕궁, 성당, 도서관, 병원 등 주요 건축물들이 붕괴되었다.


유럽 사회에 미친 충격


리스본 대지진은 유럽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유럽 사회 전체에 철학적·종교적·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신과 인간의 관계를 둘러싼 철학적 논쟁을 촉발했는데, 신의 섭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과연 이 세계는 과연 신이 설계한 최선의 세계인가?" 하는 의문이 대중들에게 퍼져나갔다.


충격적인 재앙으로 볼테르 같은 계몽주의자들은 기존의 낙관주의 철학이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 당시 유럽에서 영향력이 컸던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의 철학을 강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 세계가 신이 창조한 최선의 세계라면, 리스본 대지진 같은 끔찍한 재난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받고 죽어가는 것을 신이 허용한다면, 과연 신은 선한 존재인가? 이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종교적·철학적 해석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를 지적한다.




『리스본 대지진에 대한 시』, 볼테르, 1756년, 프랑스 국립 도서관




볼테르는 대지진 이후, 『리스본 대지진에 대한 시(Poème sur le désastre de Lisbonne)를 발표하면서 신과 인간, 낙관주의 철학에 대한 회의적 입장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부 철학자들은 "모든 것은 신의 섭리 속에서 최선으로 이루어진다"는 입장을 고수지만, 볼테르는 이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인간의 고통을 신의 섭리로 정당화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세계는 최선의 세계"라는 주장은 무고한 희생자들의 현실을 외면하는 태도라고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더욱이 자연재해는 도덕적 원인과는 무관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지진이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볼테르는 자연 현상은 도덕적 문제와 무관하다고 반박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나친 낙관주의는 현실을 외면하게 만들며, 우리는 보다 실용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리스본 대지진이 계몽주의와 프랑스 사회에 미친 영향


이 사건을 계기로 많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기존의 낙관적 세계관을 수정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이후 계몽주의는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자연재해를 신의 벌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증가했고, 18세기 후반부터 유럽에서는 보다 체계적인 재해 예방 및 대응 시스템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볼테르뿐만 아니라, 이후의 프랑스 문학과 예술에서도 지나친 이상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확산되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