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사회'가 뺏어간 자율성을 되찾는 법
국내 은둔 청년의 사회·경제적 비용 연간 5.3조원에 달해
[은둔 비용] 은둔 청년 1인당 사회·경제적 비용 연간 983만원
[은둔 요인] 주 요인은 '취업난'… '쉬었음'·장기 실업 시 은둔 가능성 ↑
'쉬었음' 청년의 은둔 확률은 취업 청년 대비 약 7배 높아
15~39세 '쉬었음' 주된 이유 1위(국가데이터처, '25년) : 원하는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서(31.3%)
20~34세의 첫 취업까지 평균 소요 기간은 약 14개월(국가데이터처, '25년)
■ 길 잃은 30대, 그들은 왜 무기력에 빠졌나
국민 10명 중 8명 "'은둔형 외톨이' 문제 심각"…모든 연령대로 지원 확대해야 - 권익위, 2025년 12월 2일
6070"고진감래" 4050"성장 중추" 2030"무한경쟁"…청년들 더 불행해했다 - 한국일보, 2025년 8월 6일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30대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무기력함, 일명 '현타'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부모 세대만 해도 30대면 결혼과 출산을 마친 경우가 많았습니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1990년대까지 평균 초혼 연령이 남성은 20대 후반, 여성은 20대 중반이었습니다.
그 자녀 세대인 지금의 30대는 10대와 20대 시절, 부모의 기대와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에 맞춰 성실히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기성세대가 정해둔 '정점'에 올라야 할 시기가 되자, 오히려 삶의 동력을 잃어버리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개인의 의지가 부족해서 생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은 나이에 따라 삶의 동기가 바뀌는데, 우리 사회가 그 변화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서 생긴 결핍입니다.
■ 외적 인정에서 내적 동기로…삶의 중심이 바뀌어야 할 때
저 후배, 내 자리 뺏을까…'시블링 트라우마'의 비밀 - 한겨례, 2025년 11월 1일 보도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의 발달 이론을 보면, 어린 시절 아이들은 주변의 인정과 칭찬을 통해 '나도 할 수 있다'는 감각을 키워갑니다. 이때는 부모나 선생님이 "잘했어"라고 해주는 말 한마디가 강력한 동력이 되는 시기입니다.
10대에 접어들면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정체성을 찾아야 하지만, 한국 사회는 입시라는 하나의 목표를 이유로 이 과정을 뒤로 미루게 만듭니다. 20대 중반까지도 '외부의 인정'이 삶을 끌고 가는 힘으로 작동하긴 하지만, 그 힘은 점차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숙한 어른으로 나아가려면, 남의 시선이 아니라 스스로 세운 목적의식과 정체성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걸 '외적 동기에서 내적 동기로의 전환'이라고 부릅니다.
■ 내적 동기는 어디서 오는가
"엄마! 소원대로 공무원(2년) 했으니, 기업 갑니다"…'MZ세대' 이직 증가 - 세계일보, 2025년 4월 28일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Edward L. Deci)와 리처드 라이언(Richard M. Ryan)의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을 보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내적 동기에는 세 가지 기본 욕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자율성'입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골라서 한다는 느낌입니다. 같은 야근이라도 "이 프로젝트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라고 느낄 때와 "상사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야"라고 느낄 때, 피로감이 완전히 다른 것과 같습니다.
둘째는 '유능감'입니다. 쉽게 말해 "나도 해낼 수 있구나"라는 감각입니다. 처음 자전거를 탈 때 넘어지다가 어느 순간 혼자 페달을 밟고 달리는 그 짜릿함, 그게 유능감입니다. 이 감각은 편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는 생기지 않습니다. 못하는 걸 마주하고, 실수하고, 다시 해보는 과정에서 조금씩 쌓이는 겁니다.
셋째는 '관계성'입니다. "나를 진짜로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실적이나 직함 때문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와 이어져 있다고 느끼는 관계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내가 선택하고, 해낼 수 있고, 누군가와 연결돼 있다는 이 세 가지 감각이 채워질 때 비로소 "살아 있다"는 활력이 생깁니다.
■ 그렇다면 이 세 가지를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탐색'이 먼저, '헌신'은 그다음
자율성·유능감·관계성을 채우려면 두 단계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탐색'입니다. 남들이 정해놓은 하나의 길만 따르는 게 아니라, 진짜 나에게 맞는 게 뭔지 여러 가능성을 직접 겪어보는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시키는 일만 하던 사람이 퇴근 후 새로운 취미 또는 운동을 시작하거나, 주말마다 봉사활동 등을 해보면서 "이게 나한테 맞는 건가" 시험해 보는 것이 탐색입니다. 맞지 않으면 그만두면 됩니다. 중요한 건 스스로 골라서 해본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둘째는 '헌신'입니다. 탐색을 통해 "이건 좀 더 해보고 싶다"는 감각이 생기면, 거기에 충분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보는 겁니다. 겉핥기 식 체험 열 번보다, 한 가지를 깊이 파고들며 자기 삶에 녹여내는 경험이 정체성을 만들어줍니다. 오래달리기를 하다 보면 처음엔 괴롭지만 어느 순간 몸이 가벼워지는 구간이 오듯, 한 영역에 몰입하다 보면 "이게 나구나"라는 감각이 찾아옵니다.
■ 그런데 왜 한국 사회에서 이게 안 되는가
특강 듣다 "쉬다 올게요"…대치동 곳곳 캠핑카 - SBS NEWS, 2026년 1월 28일 보도
문제는 지금의 30대 상당수가 스스로 설계하지 않은 삶을 수동적으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입시 때는 학교와 학원이 정해준 교육 과정을 따랐고, 취업 후에는 회사와 사회가 정해준 직함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왔습니다. 자율성을 연습할 기회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니 성과 평가, 승진, 연봉 인상과 같은 외부에서 오는 피드백이 사라지는 순간, 삶을 앞으로 밀어줄 동력이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이처럼 자기 기준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 SNS라는 비교의 공간에 노출되면, 무기력은 더 깊어집니다. 남들의 여행 사진, 결혼 소식, 승진 축하 글을 보면서 "나는 뭐 하고 있나"라는 감정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연애·결혼·출산이 줄어드는 현상은 주거비 부담, 고용 불안, 양육비 문제 등 여러 구조적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SNS를 통한 끊임없는 비교가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는 위축감을 키우고, 삶의 중요한 선택을 계속 미루게 만드는 요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하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 '틀릴 권리'를 되찾고…스스로 삶을 설계해야
WSJ "현금 줘도 아이 안 낳는 한국…젊은층 설득 못 해" - 연합뉴스, 2023년 9월 1일 보도
'중년의 위기' 가고, '청년 불행'의 시대가 왔다 - 조선일보, 2025년 8월 28일 보도
결국, "왜 살아야 하나"라는 30대의 무기력을 극복하는 핵심은 자율성의 회복에 있습니다. 동기가 저절로 생기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과정에서 동기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그 결정이 남들 보기에 최선이 아니더라도,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괜찮습니다. 스스로 내린 판단에 따라 에너지를 쏟는 것 자체가 자아를 형성하는 가장 큰 보상입니다. 완벽한 정답을 찾으려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는 것보다, 틀릴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한발 내딛는 쪽이 훨씬 낫습니다.
우리 사회도 청년들에게 성공의 기준만 제시할 게 아니라, 충분히 방황하고 깊이 몰입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합니다. 탐색할 시간, 헌신할 대상, 그리고 '틀릴 권리'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갖춰질 때, 비로소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청년들은 무기력을 넘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